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4. 내공 함양으로 뚜벅뚜벅 가던 대2~3 시절

백조히프 2018. 7. 30. 19:30



14. 내공 함양으로 뚜벅뚜벅 가던 대2~3 시절

 

 

<1976~77년의 대학 2~3년 시절>

 

1. 알찬 겨울방학과 포항석유 사건

 

제법 다사다난했던 ‘75년을 보내고 부산집으로 내려와서는 한 일주일 여 친구들 만나 남포등 등에서 다방, 당구장, 술집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이 기간이 지나니까 뭔가 지속적인 나만의 독학 시간을 갖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하자 일본어 학습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후배인 신영주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해 배우는 일본어 수업 텍스트를 한두번 구경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이 80년대 중후반까지 지속된 ‘Japan No.1’의 길을 가는 시동을 열심히 걸던 때라 이 언어에 대한 호기심도 크게 당겼고, 배워두면 두루두루 썩먹을 때가 많겠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당장 절실하게 배워야 할 동기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신영주가 갖고 있던 박성원 일본어책을 구입하여 동대신동에 있던 동아대 도서관에 가서 흥미롭게 독학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혹독하게 추울 때가 많아 동아대까지 가는 구덕운동장 뒷길을 걸어갈 때는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도 더 되는 듯 느껴지는 거리를 머리를 띵하게 하고 호흡을 방해하는 세찬 바람 때문에 몇 번이나 쉬었다 갈 정도였다.

 

그래도 도서관에 도착하면 눈비를 헤치고 몇 킬로를 걸어 학교에 찾아온 옛 학동들처럼 뿌듯한 마음에 일본어 독학 공부는 제법 집중력 있게 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는 한번씩 일본어 도사를 자처하는 부친과 떠듬거리는 초급회화도 해보곤 했다. 아무튼 이때 일본어 초급 문법은 봄학기 개강할 때까지 혼자서 한번 훑었다. 계속 꾸준히 했으면 좀 더 진전이 있었을 터인데 개강과 함께 덮어두었더니 그냥 홀딱 다 잊어먹게 되었다.



<박통의 포항석유 발견 발표 기사, 75. 1>

 

1월 중순인가 TV에서 박통이 나와 영일만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가 시추되어 이제 우리나라도 잘하면 석유생산국이 될 수도 있다있다는 긴가민가한 발표를 하는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생산국이 되어보겠다는 정치적 소망과 집념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비관적 전망을 넘어서서 77년 여름까지 굴착이 진행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포항석유 발견 지점들과 시추 시설>

 

사실 나도 다른 국민들처럼 박통의 소망이 좀 무리해 보이는 집념 속에서라도 석유가 제대로 나온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발표 일주일 여가 지나면서부터 용두사미격으로 후속보도가 뜸해지더니 급기야 매스컴들의 일상적인 취재도 규제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이 사건은 뭔가 크게 한건하여 자신의 통치기반에 적극 활용하려했던 박통의 정치적 야심 실현장이 될 뻔했지만 그런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아 슬그머니 온 국민들의 망각 속에서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2. 경제학을 만난 시절

 

개강이 되어 2학년에 올라가니 독일어 강독은 초급에서 중급으로 명칭이 바뀌었기에 조금 더 번역하기 까다로운 원서 작품들이 다뤄졌다. 어학실습 시간도 좀 더 잦아졌고, 2학년까지만 제공되는 제2외국어인 스페인어 강좌도 중급수준으로 올라갔는데 어학 호기심이 꽤 높았던 내게는 뭐 그리 못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부전공을 하나 선택해야 했는데 나는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경제학을 선택하여 경제원론과 미시경제, 경제사, 통계학 등을 들었다. 경제원론 과목이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초를 다져주는 핵심과목이었음에도 내공있는 교수를 만나지 못해 미시 파트만 잠깐 맛 좀 보다 어물어물 기말고사까지 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머지 과목들인 미시 각론과 통계학 같은 과목들도 대동소이했다.

 

그나마 상국이의 추천으로 조순교수의 경제학 원론책을 접하고서야 독학으로 경제학의 기본틀을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폴 사무엘슨의 ‘Economics’ 내용을 비교적 충실하게 소개한 책이었는데 그나마 기초를 쌓는데 도움이 되어 후일 연세대 대학원이나 독일에서의 유학시절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조순 경제학 원론 7판, 2003>

 

나는 이 과목을 접할 때마다 경남고 시절 우리에게 일반사회에서 경제 파트를 가르쳤던 허광렬 선생이 떠올랐다. 한계생산이니 한계비용이니 하는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추가 한단위를 생산하기 위해 드는 비용을 한계비용이라 칭한다라는 말이 당시에는 바로 팍 와닿지 않았지만 그 한계라는 용어 자체는 중요하다고 뇌리에 간직했던 터라 후일 다시 접할 때는 더 빨리 이해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이론용어적 테마를 문제로써 내어놓고 개념개요, 유용성과 한계점, 그리고 결언적인 종합적 고찰 같은 것을 한번 논해 보라 하면 상당한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데 반해, 무슨 계산과정을 통해 수치적 답이 나오게 하는 문제는 딱 질색이었다. 외대의 경제학 파트 교수들이 채점의 편의성을 위해 이런 계산 류의 문제를 즐겨내다 보니 이 분야 과목들의 학점은 평균 C+이상이 못되었던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경제사 같은 과목들도 제대로만 다루면 정말 영양가 있는 흥미만점의 과목이었는데 부전공 하는 학생들 상대로는 신출내기 시간강사급만 배정했는지 폭넓은 시대적 통찰 비교 같은 것은 없는, 그냥저냥하는 파편적 내용 소개로만 진행했으니 별 흥미를 끌지 못했다.

 

3. 외대 경남고 야구단에 끼어 놀다

 

나는 고교 때부터 꽤 괜찮았던 어깨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캐처 포지션에 자주 앉게 되었다. 그래서 피처를 리더하며 상대타자를 삼진처리하는 맛이나 세컨 도루를 바운드 없이 바로 던져 잡는 맛을 제법 많이 알게 되어 그 이후로도 웬간한 팀에서는 주전 캐처를 맡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재수삼수할 때 친구들과 야구할 기회가 없다가 언젠가 어떻게 한번 하게 되었는데 모처럼 하는 야구에 아무런 몸 풀 기회도 갖지 않은 채 갑작스런 무리를 했던지 대학 들어와서 캐처를 맡으니 강한 송구를 할 때마다 어깨가 막 아픈게 아닌가. 그래서 중요 시합이 있을 때는 진통제를 먹고 시합에 임하면 통증이 없으니까 그런대로 세컨 송구를 빨랫줄 비스무리하게 던질 수는 있었다.

 

그래서 외대 4년 동안 경남고 야구단에서는 거의 주전 포수직을 놓치지 않았다. 나와 이 시절 배터리를 맟춘 투수는 29회 이범익(포르투갈어과)이었는데 이 친구의 구위는 거의 아마급이었다. 어디서 피처로 실력을 쌓았는지 외대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모임 올림픽대회에서 포어과 투수로 나와 발군의 투구력을 보여 그 명성도 외대 전체에서 쩌르르 할 정도였다.

 

이 친구는 그냥 강속구파이니 변화구 별로 섞지 않고서도 스윙속도가 느린 타자들은 정중앙으로 볼이 오게 해도 그냥 밀리거나 헛스윙하기 일쑤였다. 볼 좀 맞춘다는 타자들에게는 아웃코너나 급작스런 인코너 공을 요구하면 강속구에 약간 높아도 헛스윙 아웃됨이 공식처럼 되었다.

 

어찌 포볼 골라 나가는 친구들은 세컨 도루에서 한 40%는 내게 걸려 아웃되어 주니 그 당시 우리 둘이는 경남고 야구단이 타 고교 야구단(주로 부산고)과의 돈내기 시합에서 거의 진 적이 기억나지 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매사에 가시나처럼 다소곳하고 조용하던 29회 신영주(독어과)도 야구 글럽만 잡으면 표범이 되어 날렵한 서드 포구로 한 역할을 했고, 최태룡이 동생이자 29회인 돌콩별명의 최명룡(스페인어과)이도 파이팅 넘치는 게임 분위기 메이커 역을 톡톡히 했다.

 

출중한 핸드볼 실력에 비해서는 야구경력이 좀 일천한 27회 김홍수(중국어과)도 퍼스트나 외야수를 맡겨놓으면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일인분을 충분히 했고, 출루라도 하면 빠른 발로 득점은 굳은 짜였다.

 

24회 고 김대원 형(일어과), 25회 김일태 형(영어과), 26회 고 옥달혁 형(영어과)이 번갈아 기용되며 유격수나 세컨를 맡았고, 26회 이학기 형이 중견수 정도로 자리 잡으면 나머지 포지션은 고참선배 예우용 출전 자리로 남겨 놓았다. 주로 22회 김도살 형(불어과)23회 김강x (불어과)들이 여기에 많이 기용되었다.

 

한번은 경동고와의 시합이 있었는데 상대투수가 나와 독일어과 팀에서 배터리인 신정수라는 친구였다. 이범익이 보다는 볼 제구력이 떨어졌으나 강속구 구종을 갖고 있어 우리팀이 초반에 삼진 몇 개를 헌납하며 끌려다니다 긴장한 고참 형들이 수비에서 에러까지 범해 리드를 당하게 되었다. 29회지만 야구실력으로 사실상 감독 역할을 하던 이범익이가 급박하던 마음에 삐꾸 선배들에게 좀 예를 차리지 않고 선수교체를 행했다.

 

그 이후 우리팀이 심기일전하고 상대팀의 구멍들이 동네야구답게 실책을 범해주자 게임을 뒤집고 승리했다. 그런데 게임 끝나자마자 아까 교체되었던 선배가 정색을 하고 선수단 소집을 교내 건물 한 강의실에서 하겠다고 통고했다. 이 양반은 26회 군기반장 학기 형을 앞에 나오게 하더니 니 후배들 교육 이 정도 밖에 못시켰냐?’ 하며 엎드려 뻗쳐 빳다를 한 다섯 대 날리고는 퇴장했다.

 

학기 형은 이범익이를 먼저 불러내어 먼지가 나도록 자기가 맞은 이자까지 붙여 제법 소리나게 한 열대를 날렸다. 26회지만 평소에는 나와 니네도리 하던 학기 형이 군기잡기 시작하자 빨간모자 쓴 해병 조교처럼 제법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다. 두 번 째로 나도 나가 한 세대인가 맞았다. 출전 선수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학기 형에게 몇 대씩 맞았다. 무슨 학교 프로선수단에서처럼 얼차려 세레모니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리고는 홍콩반점 뒤 무슨 막걸리 집에 가서 응어리 풀기의 화합주 자리를 질펀하게 가졌다. 요런 자리에서 하리수 같은 젠더 캐릭터로 동창회 모임에서 인기가 높았던 29회 신창호(중국어과)의 몸 배배 꼬는 눈물의 미아리 고개노래와 그 포즈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이 인간은 지금 뭐하는 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더욱 궁금하다.


<2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상국이와의 하숙생활

 

'762학기가 시작되려는 무렵 그 앞 해 정동빌딩 페스티벌의 폭망에서 덮어썼던 빚갈이가 좀 정리되었던지 박상국이가 마침 비어있던 내 방에 룸메이트로 같이 지낼 수 있냐고 묻기에 100% 바람직 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그러라고 했다.

 

워낙 내 꼬질꼬질한 변태성 습관(손가락 발가락 잡아당기기나 꺾기, 발가락으로 꼬집기, 코딱가리 튕겨 벽과 천장에 붙이기 등등)을 낱낱이 다 아는데다 기억까지도 더럽게 좋아 밖에서 자주 나불거리는 것을 사실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낯선 룸메이트보다는 미주알고주알을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참지 않아도 되는 편한 점도 꽤 될거라 기대하며 수락했다.

 

하지만 우려했던대로 서로 생활패턴과 세상살이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 처음 한 동안은 조금 많이 불편했다. 그래도 그 기간을 넘기며 서로를 이해하고 다른 생활습관에도 익숙해지니 그 다음부터는 평생 가게 될 추억의 공유시간이 되었다.

 

상국이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독일어과에 떠밀려 왔다고 생각했는지 독일과 독일어에 대한 애정이 나만큼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독일어과 적만 유지한 채 영어와 상경계 공부에만 몰두하여 지가 원하는 곳에의 취업이 목표인양 나름 전략적 비전을 품은 채 학창생활을 행했다.

 

나와 같이 있은 처지로 독어과 마이티 학우들과도 하숙방에서 내만 물묵나!’ 하며 자주 교우를 했지만, 이들이 떠나고 나면 영어공부를 밤 이슥할 때까지 형광등 켜놓고 했다. 나중에 나와 같은 방에서 룸메이트 했던 27회 박경효도 밤도깨비 같은 습관을 갖고 있어 나는 이들과 같이 지내며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신공을 터득했다.

 

하여튼 비싼 등록금 내고 독어과 들어왔으면 독일어는 기본으로 하고 난 뒤 중요한 사이드 디쉬 정도로 영어와 경제학 공부를 하는 게 순리라 여겼는데 이 친구는 전공 공부를 거의 처음부터 제끼고 취업에 핵심인 후자들의 공부에만 온통 집중하는 것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우리 75학번 독어과에서 ROTC 티오가 아닌 공채시험으로 삼성그룹에 들어간 최초의 케이스였기에 자신의 전략적 집중이 옳았음을 거의 70%는 입증했다. 자기가 볼 때 4학년이 다 되도록 취업전략 같은 것도 모르고, 영어와 상경계 공부보다는 돈 안되는 독일어 공부를 그리 특출하게 잘하지도 못하면서 시키는대로만 끄떡끄떡하는 내가 많이 한심했으리라.

 

향후 인생에 대한 전략적 비전으로 세상을 굽어보는 큰 안목 같은 것도 없이 코앞에 떨어진 시험준비들에만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최우선적으로 대응하는 내가 동기 중 누가 언급한대로 늘푼수 없는 팔푼이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반면 내가 자기를 볼 때는 하숙비 내고 아침마다 아줌마가 차려준 아침 겸상을 앞에 두고도 못일어나서 밥도 못 챙겨먹는 그 불성실한 꼬락서니에서 참 이 친구가 일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것 같아 그 오줄없음에 도리어 혀가 차졌다.

 

하지만 이런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 갈등을 넘어서고도 남을 중고교 동창과의 하숙은 재미있는 구석이 많았다. 우리 둘이 같은 방을 쓰고 있으니 먼 곳에 있는 27회 동기들이나 외대 선후배들도 마음 편하게 사랑방에 유숙하듯이 드나들며 방방곳곳의 소식을 전해주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2. 양태종이와의 노름판 조우

 

'77년 봄부터는 양태종이가 외대 다니는 저그 제주 후배들과 패거리 지어 우리 집에 올 때도 많았다. 양태종이는 쪼그만 모타리에도 금테 안경과 금니빨로 무장된 강단있어 보이는 인상에 배포도 크고 해서 거의 작은 거인같은 대접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거기다 독일어 회화와 작문도 언제 도둑공부해 그리 잘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독일어과의 에이스급이었다.



<양태종이가 그날 잡은 전설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패>

 

당구도 한 300 치는 실력에다가 노름도 지독하게 좋아해 저그 후배 놈들 바람잡이로 앉혀 놓은 채 내 방에서 주인 제끼고 객들끼리 붙은 포커판에서 8-포커 잡은 독어과 복학생 아재를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쉬(같은 무늬의 A-K-Q-J-10)라는 말도 안되는 카드로 눈도 깜짝 않은 채 아작내며 뭉텅이 판돈 챙겨가는 것도 봤다.

 

후일 그게 카드 나눠준 저그 후배의 타짜짓임이 아주 농후했는데도 리얼타임에서는 하도 그 드라마틱함에 감동해 그냥저냥 묻혀 넘어가 버릴 정도로 현장연기가 출중했다. 하지만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고, 당시 이문동에서 유명했던 외대 프로 도박단에 걸려 또 내 방에서 한 하루 반동안 줄창 포커판을 벌이더니 학기 등록금을 다 날릴 정도로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 무렵은 승부사 게임 역시 좋아하는 박경효와 같이 지낼 때인데, 난 학교 오며가며 이 판이 벌어지는 것을 간헐적으로만 지켜봤다. 아무리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지만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부아를 참고 내 얼굴 봐서 이 상황을 꾹 참아준 하숙집 배여사에게 사죄와 고마움의 염을 지금에사 전한다)

 

결국 한 학기 저그 제주집에는 학교 다니는 체 휴학하며 이문동 골목의 유령처럼 이집저집 쏘다니는 낭인생활도 해댔다. 그 와중에 내 방에 와서 스페인어 문법책을 보더니만 빌려가서 한 두달 만에 다 뗏다고 돌려주었다.

 

돌아온 책 안을 보니 이놈이 포커판의 그 작은 망나니인가가 믿겨지지 않을만큼 세밀한 주석을 달며 이 책을 열독한 게 아닌가. 과연 작은 거인놈 맞다고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76~'77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중국의 4인방 몰락

 

‘7610/6일 문화혁명을 주도하며 마오주의의 강력한 추종자였던 장칭(江青, 중앙정치국 위원), 장춘차오(張春橋, 부총리), 야오원위안(姚文元, 중앙정치국 위원), 왕훙원(王洪文, 당 부주석) 등 이른바 4인방이 9/9일의 마오 사후 반대파와 권력투쟁을 벌이다 긴급 체포되었다.



<몰락 직전과 직후의 4인방> 

 

반대파의 주역인 수상 화궈펑(華國鋒)과 당 부주석 예젠잉(葉劍英)은 강청 등이 장칭 당주석, 장춘차오 수상이라는 집권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마오의 특무부대장으로써 4인방을 싫어한 왕둥싱(汪東興)을 끌여들여 고위간부들의 회의장소인 중난하이(中南海)에 회의참석차 도착한 4인방을 차례차례 체포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국은 또 다른 문화혁명급의 극좌노선화를 회피하고, 1년 후 덩 샤오핑 등 실용주의자들을 복권시켜 오늘의 중국이 있게 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도입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재판 받는 4인방>

 

당시 내가 관심있게 추적한 국내언론들도 4인방과 반대파의 고조되어가는 대립국면을 예의주시한 채 보도했으며, 4인방이 타도되었다는 서구언론의 뉴스를 신속하게 보도함과 동시에 그 의미를 전망하는 심층분석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난 그 때 방송매체의 논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오의 와이프 장칭과 벼락출세한 30대 기수 왕훙원이 부상되는 게 웬지 싫었는데 이들이 역공을 당해 도리어 제거되었다는 소식에 !’ 하고 한시름 놓으면서도 우리 정계 윗대가리들은 요렇게 싹쓸이 하는 맛이 없을꼬?’ 하며 좀 안타까와 하기도 했다.

 

2. 박동선 사건의 발발


’7610/24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박동선이라는 재미 한국인이 한국 정부 지시에 따라 연간 50~100만불 상당의 현금으로 90여 명의 미국 정치인에 대해 매수공작을 했다고 무려 10여 면에 걸쳐 특종 보도했다. 미대사관이 중앙청에 도청을 행해 입수된 정보라는 것이었다.



<'3억3천만불의 對한국 쌀원조가 부패한 독재정권을 살찌우기 위해 미국에 되팔렸다'라는 미언론 타이틀> 

 

당시 카터가 취임한 미 정가에서 박정희 독재정권하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회유·매수하려던 시도였다는 것이다. 미 언론은 이 사건을 닉슨의 몰락을 부른 워터게이트에 빗대 코리아게이트로 부르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후반 한·미 관계는 사상 최악의 길로 치달았다.

 

미국산 쌀을 한국으로 수출하던 재미(在美)교포 사업가 박씨는 한국에서 조지타운대로 유학가 졸업한 1960년대부터 워싱턴에 조지타운 클럽이라는 고급 사교장을 운영하며 미 유력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박씨의 불법 로비 사실이 밝혀지자 1978년 미하원은 윤리위원회 청문회를 열어 그를 소환했지만 한국정부의 거부로 불응하다, 미행정부의 식량원조 삭감과 주한미군 철수 압박에 밀려 사면을 대가로 증언대에 선 그는 미 전·현직 의원 32명에게 약 85만불을 선거자금으로 후원했다고 자백했다.



<미의회에서 증언하는 박동선>


 

그러나 이것은 모두 개인적인 동기에서 행해졌을 뿐 한국정부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고, 결국 청문회는 동북아 외교의 교두보인 한국정부를 마냥 코너로만 몰아넣을 수는 없어 박씨로부터 돈을 받은 일부 의원만 징계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언론의 보도 태도는 당시의 내가 보기에도 보도관제가 극심하구나 하는 것을 한 눈에 알아챌만큼 전체 내막에 대한 보도보다 맥락없는 단편적 찔끔찔끔 보도로 일관했다. 어느 날 박동선이라는 이름이 신문지면에 등장하더니 이 사람의 사기꾼적 행색을 보도하고, 한국정부와는 무관한 인사임을 애써 강조했다.



<청와대 도청 비난 데모>

 

그 다음에는 미대사관이 한국정부의 중앙관청을 도청했다는 사실을 대서특필 비판하며 사건의 본류를 흐리려는 물타기 보도도 시도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방이 길어지며 미 프레이저 청문회의 심문과정에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의 증언까지 파생연결되어 박통정부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3. 김형욱의 미청문회 증언


’76년 박동선 사건이란 코리아게이트가 터지면서 미언론에 박정권의 불법적인 로비 현황과 반인권적 행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런 차제에 ‘693선개헌 이후 토사구팽되어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정부장 김형욱이 ’776/2일 뉴욕타임즈지와 기자회견을 가지며 박통을 본격 비판했다.



<미청문회에 선 김형욱의 폭로 발언>

 

내친 김에 프레이저 청문회까지 나가서 중정부장 재직시에 겪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까발렸고, 이를 아예 회고록으로 정리해 놓으려고까지 했다. ‘63년 대선 때 여론조작으로 야당 단일화 저지, 한일기본조약 협상시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키려는 시도, ’67년 선거부정 대선을 무마하기 위한 대형간첩사건 조작, 그리고 3선개헌 성사를 위한 상당수 국회의원 협박공작 등이 주 내용이었다.

 

당황한 박통은 몇 번이나 측근을 보내 김형욱을 회유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79년 중정 해외담당 간부와 거래를 위해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하여 미궁의 실종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형욱의 파리 납치 실종의 전모 폭로 기사, 신동아, 2004. 8>

 

내게는 이 사건 역시 박동선 사건처럼 미언론에서 크게 보도된 내용들을 국내용으로 축소하고, 간헐적으로만 김형욱이가 개인적 배신감에 조국을 등지며 입막음 돈을 찾아 재직시 알았던 국가기밀들을 마구 떠들어댄다는 취지로 보도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국내언론에서 김형욱의 파렴치한 인물됨을 폭로하는 일화적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 나왔기에 저 놈, 저러다 경치고, 지 명대로 못살지하고 예견했다. 2년 후 파리에서 실종사망한 것 같다는 보도들이 나오자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먼저 떠올라졌다.

 

4. 덩 샤오핑의 복권과 문화혁명의 공식 종료 


‘7610월의 4인방에 대한 전광석화 같은 체포에 성공한 화궈핑과 예젠잉은 ’778월 이미 2번의 숙청바람에 지방 공장으로 쫓겨가 있다 ‘74년에 복권되어 사태추이를 관망하던 오똑이 부도옹덩샤오핑에게 ‘777월 행정실무적 권한직위를 주며 명실상부한 복권을 시킨다.



< 그 유명한 덩 샤오핑의 '흑묘백묘론'>

 

덩은 복권하자마자 실용주의적 경제개방노선을 상징하는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 잘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을 펼치며 바다에 접한 연안지역들에 우선적으로 시범적인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게 했다.

 

다른 한편 4인방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마오 사상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화궈펑을 실용적 경제개혁파들의 입지를 확대시키면서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마오의 공과에 대해서도 ‘7은 공, 3은 과라는 비교적 엄정한 평가를 내리면서 마오에 대한 신격화 의식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7812월의 당대회에서 문화혁명의 공식 종료를 선언하였다.

 

그는 ‘80년대를 중국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경제개혁에 딴지를 거는 보수파들을 정리하고, 서방국에 과감한 중국투자를 유인함으로써 중국경제의 두자리수 고속성장기를 열었다. ’92년부터는 정무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주석을 맡으면서 여전히 스트롱맨의 포지션으로 개혁파 후계자들을 많이 키워내었다.



<명실상부 작은 거인이었던 덩 샤오핑>

  

그 결과, 개방정책을 선언한 ‘78년부터 30년 만에 중국이 경제초강국으로의 위상을 획득하게 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강타한 2008년 이후로는 미국과 함께 수퍼파워로써 G2체제를 형성하는 초석을 닦았다.

 

난 이 무렵 ‘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나던 때부터 국내신문에서 등소평이란 이름 세 자를 발견한 이래 자주 숙청되며 수년 간 지방의 트랙터 공장 관리인으로서 마오에게 끊임없이 반성문 편지를 써보내어 복권의 때를 기다리던 의 스토리에서 일본 전국시대를 종료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스토리가 오버랩 되었다.

 

어려운 시절을 만날 때마다 마오 편에 있던 저우언라이나 예젠잉 같은 혁명동지들이 ‘鄧 인재론을 설파하며 변덕과 시샘이 심했던 마오의 마음을 돌려준 것도 의 재능과 인간성을 돋보이게 했다.

 

인고의 세월 끝에 23기로 기회를 잡자 질풍노도같은 추진력으로 낙후된 중국을 강력한 현대중국으로 탈바꿈시킨 의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매력도 마오의 카리스마와 비교해 음미해 보려는 나의 관심을 계속 놓치지 않을 것 같다.

 

<3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독어과 친구들과의 설악산 여행

 

'76년부터 복학생들이 독어과에 많이 돌아왔는데 모두 다 괜찮은 심성을 가진 양반들이었다. 아 아재들과 MT도 몇 번 같이 다녀오니 같이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승진(서울고, 재수)이는 복학생은 아니었지만 1학년 내내 반수생 생활을 해오다 상국이처럼 뜻을 못 이루어 돌아온 케이스였다. 이제 마음을 비우고 독일어과 생활을 성실하게 하겠다며 우리 마이티 팀에 찰싹 붙었다.

 

윤과 초이에게는 1년 선배지만 원래 이런 나잇빨 같은 것은 개의치 않아하는 친구인데다 서울소재 고교출신이라는 저그끼리의 정서적 공감대가 있어 또 하나의 막역한 삼총사 그룹을 형성하여 나와 상국이에게도 처음부터 거침없이 친구하자며 다가왔다.

 

이 친구도 나처럼 파격적인 품성이 군데군데 숨어있어 윤과 초이도 어떤 때는 깜짝깜짝 놀랐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린데다 인간미가 진국인 친구였다. 하지만 그 당시도 사회비판적인 세계관을 자주 내비쳐 저 인간이 나중에 운동권 투사라도 되는 게 아닌가 했다.

 

(의외로 외대 대학원 독일어과를 마친 뒤 은행원 생활까지 잠깐 하다 '80년대 후반 독일 칼스루에로 유학 와 독일 대표 좌파 극작가 B. 브레히트에 관한 논문 제출을 하고 박사쯩 하나 건져갔다. 현재 좌빨교수로서 원광대 재직 중이다).


<독어과 친구들이 보내준 설악산 등정 사진>


하여튼 이렇게 지지고볶고 하는 친구들과의 독어과 생활 중 '77년 가을 우리는 설악산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대학생활에서 공식적인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복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학우들이 참여했다. 이런 과모임에 잘 어울리지 않던 상국이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처럼 동행했다.


  <나도 처음 보는 짜선생 부부 돌 사진> 

 

인솔 교수로는 우리과 에이스인 이인웅 교수와 짜선생이라 불렸던 짜보롭스키독일인 교수가 함께 갔다. 짜선생은 그 때 당시 한국생활 13년차 정도로써 부인이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말이 유창한데다 유머감각까지 높아 우리에게 독일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준 독일 아재였다.

 

한국인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해 학생들과 수업 이후 맥주타임도 여러번 가졌다고 들었다. 우리가 졸업한 뒤에도 외대에 조금 더 근무하다 자신의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우리는 시외버스로 분위기 좋게 설악산으로 떠났는데, 나는 사실 그때까지 설악산 방문이 처음이었다. 대학에 갓입학한 '754월 초 박상국, 강성보, 조용수, 박경효 등과 원주 치악산 등정할 때 처음 사입은 등산용 자켓과 등산화, 룩샥 등을 모처럼 꺼내 챙겨입고 따라갔다. 가을의 정취가 본격화하기 시작하던 시즌이라 차에서 하차할 때부터 설악산 단풍이 우리들 맘을 설레게 유혹했다.

 

도착하자 예약해 놓은 여관에 짐을 풀고 산책하듯이 갔던 데가 비선대였다. 막 어둠이 닥쳐오기 직전이라 그랬는지 방문객은 우리 일행 밖에 없어 전체적으로 더 고저넉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목욕탕 냉탕에 들어온 아그들처럼 푸근한 맘으로 이리저리 쏘다니며 끼리끼리와 단체 기념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친구들과 담배 한대 태우고 가기> 

 

여관 들어오는 길에 우리는 이인웅교수, 짜선생과 어느 막걸리 집에 들러 환담하며 첫 날의 여독을 풀었다. 요즘 같으면 팬션 개념으로 큰 방, 작은 방 두 개를 빌렸던 것 같은데 몇몇은 이교수를 끼워 포커인지 섯다 같은 것을 했고, 나머지는 작은 방이나 큰 방 언저리에서 적당히 뭉개져 잠을 청했다.

 

수업시간에는 서릿발 같은 카리스마로 우리를 압도했던 이교수가 제자들과의 노름판에서는 먹묻들 특유의 허당끼가 있는대로 다 보여져 많은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다. 짜선생도 한국적 MT 분위기를 모처럼 왕창 즐기려는 듯 세상없이 사람좋은 미소로 아그들과 대화하며 하하, 허허를 연발했다.



<복학생 아재들과도 한 컷> 

 

그 다음날 우리는 내설악 전체를 사람들이 많이 가는 코스대로 묻혀 다녔다. 권금성을 거쳐 최종 목표지인 울산바위까지 헥헥거리며 올라갔다 내려온 기억이 난다. 단풍 속에 아그들과 중간중간 담배 한대씩 피워가며 쉬었다가 기념사진도 제법 찍어가며 울산바위와 흔들바위가 있는 곳까지 갔다. 거기서 내려다 본 산아래 풍경은 , 이래서 설악산이라는갑구나!’ 하는 감탄을 절로 불러 일으켰다.


<이인웅 교수와도 함께 한 추억의 흑백 한 컷> 

 

내려 와서는 내일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나는 상국이 하고 누군가와 셋이서 여관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상국이지 싶은데 누가 근처에서 여대생 3명을 낚아채듯 데려와 거기서 즉석 미팅이 이루어졌다. 얘기를 나눠보니 충남대에 다닌다며 우리와 똑같은 케이스로 단체 여행을 여기로 왔다는 것이었다.



<의상대 정자 옆에서 찍은 단체사진>

 

아그들이 발랑 까진 수도권 여학생들과는 달리 수더분함을 보였고,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의외로 내숭끼 없는 대화가 서로 잘 통했다. 요즘 같았으면 노래방이라도 바로 갔을텐데 그냥 다방 같은 데서 대화만 나누다 내일의 일정을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나누며 해프닝과 같은 모임을 끝냈다.

 

마지막 날은 양양 낙산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 수년 전에 불타 사라진 그 정자 위에서 석양으로 붉어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맨 앞에 벌러덩 누운 김모>

 

난 대학생활에서 이 때가 가장 하이라이트 같았던 타임이었다고 지금도 최고로 친다. 나이 들어 설악산을 몇 번 더 탐방했지만 그때 만한 감흥을 못느끼는 게 마치 첫사랑의 설렘이 바랜 듯 여겨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2. 평택 여자매들과의 하숙집 교분

 

'76년 겨울을 앞두고 상국이가 방학동에 구한 자기 집에 들어가 모친과 함께 4명의 여동생과 같이 지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다섯 식솔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의 임무가 주어진 모양이었다. 내 앞에서 새벽 잠 많은 밤도깨비 생활한다고 밉살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기울어진 가세 속에서 학업과 과외선생 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팔자가 많이 안스러워 최선을 다해 버텨보라고 격려하며 작별주를 나누었다.

 

그 후로 '77년 여름인가 방위 갔다온 박경효가 내 룸메로 들어오기 전까지 내 방 파트너는 이리저리 제법 많이 바뀌었다. 그 사이 배여사가 과거 화장실 자리를 메워 방을 한 칸 더 만들었고, 진주녀가 쓰던 방도 두 명씩 계속 사람들이 스쳐가듯 지내다 갔다. 나만 이 집 수호신 마냥 계속 버티고 있었다.

 

'77년 가을에 학교 갔다 오니 그 화장실 메운 방에서 여자 목소리들이 들렸다. 사실 여름 방학처럼 하숙생들이 다 고향집으로 내려가면 하숙주인 입장에서는 수입원 보전을 위해 한 두달 간 하숙짐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술집 나가요언니들에게 그 기간만 방을 내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은 듯 해 방문 앞에 가서 물어보니 서로 자매들인데 앞으로 이 하숙집에서 같이 기숙하게 됐으며, 저녁에 신고식 할테니 들리라 하는 게 아닌가. ‘이게 웬 자다 생긴 떡이냐하고 흐뭇하게 쳐다보니 언니뻘 되는 친구는 한 눈에도 다소곳한 미소를 풍기는 매력이 물씬했다. 당시 내 방 파트너는 양태종이 후배로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친구였는데 그 날 밤에 같이 들렀다.

 

류가 성을 가진 언니는 경희대 지리학과 4년 졸업반이라 했으며, 동생은 국민대 1년으로 패션 디자이너 전공을 한다 했다. 중국어나 나나 인물이 좀 빠진 동생 보다는 언니에게 홀딱 빠져 서로 숫공작새 꽁무니 펼치듯 이 친구에게만 질문 공세를 해댔다. 평택이 고향인 두 자매는 동생이 서울에 올라와서 따로 살다가 같이 합쳐 사는 쪽으로 부모님과 의견이 모아져 이 집으로 이사왔다 했다.

 

언니가 이 하숙집의 수석인 내게 예를 표하며 고향, 전공, 학년, 나이 등을 예의상 물어왔다. 그 사이 천방지축 캐릭터로 변신한 동생은 커다란 잠자리 안경에 여드름이 두둑한 얼굴로, ‘앞으로 두 분을 형이라 불러도 되죠?’ 하고 예선탈락자의 편안함으로 다부지게 회돌이 쳐왔다. ‘하모, 당연히 그래야제하고 달래듯 얼른 맞장구를 쳐줬다.

 

언니는 나와 같은 음력 12월 말띠였는데 날짜를 따져보니 7일 뒤쪽이었다. ‘어머, 7일 오빠시네.. 7일 오빠..’ 하며 가느스름한 눈매 미소와 함께 살짝 홍조를 띄며 그래도 내가 연상인 것에 저윽이 안심하는 듯 했다. 나도 졸지에 오빠 포즈로 돌아서 말을 바로 놓치는 않았지만 준하대체로 말꼬리를 올렸다 놓았다 했다.

 

그 날 이후 평소에는 안하던 중국어 텍스트 낭송을 밑방 자매들 들으라고 '중국어'는 아주 심혈을 기울여 방에서 매일 읊어대는 것이었다. '중국어'의 인물과 풍채도 어디에 내세워도 결코 밀리지 않을 나름 수준급이었으나, 자매들 앞에서 좀 젠 체하는 태도와 태종이 후배라는 나이빨에 밀려 언니는 내게 더 호감을 보이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연하남은 좀 꺼림칙해 하던 시대였으니까 ‘7일 오빠덕을 본데다 격의 없는 나의 소탈한 대화방식, 그리고 경남고 출신이라는 후광이 여러모로 유리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일이 되려니까 '중국어'가 무슨 사정인지는 몰랐지만 하숙집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야말로 나의 독무대가 펼쳐진 것이었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자매들 방 저녁 방문이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동생도 저그 미래 형부가 오는 양 언행이 훨씬 공손해졌다. 그래도 좀 왈가닥형이었던 동생에 비해 언니는 처음에 보였던 그윽한 염화시중의 미소를 끝까지 내게 유지했다. 지 마음에 드는 멘트를 쳐주면 얼굴이 발그스레해지며 눈까지 살짝 흘기면서 말이다.

 

코가 야간 매부리형이긴 했지만 전체 인상이나 키, 몸매 모두 저그 과에서는 킹카 소리를 들을만한 용모 경쟁력도 있었다. 나도 한 때는 이 친구와 결혼까지 가도 큰 후회는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사주 좋아하는 우리 모친이 평소에 귀에 박히도록 여자 말띠는 안되고, 더군다나 동갑은 더 안된다는 소리가 항상 커다란 제약요인으로 떠올랐다.

 

결국 나의 우유부단한 확신부족인지 지금 마누라를 만날 운명의 힘이 더 컸는지 이 친구하고는 어어 하다가 놓쳐버렸다. 79년 겨울인가 신촌 대학원 시절 서울 강남구에 있는 고교에서 지리교사하고 있던 이 친구와 연락이 닿아 한번 보자 했더니 얼른 나왔다. 아마도 내가 무슨 중요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만나서 반갑게 안부를 나누고 옛 이문동 시절을 반추하며 동생은 어찌 지내냐 했더니 괜찮은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미국유학 준비 중이라 했다. 이제나저제나 나의 중요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녀에게 나는 김새게도 류양, 내 좋은 고교 선배 한사람이 있는데 만나볼라요?’ 했더니 이 친구가 꽤 한참 생각하더니 그래요하고 선선히 수락하는 게 아닌가.

 

'79년 초 외대 졸업하고 연대 대학원 다닌다고 신촌으로 하숙집을 옮겼는데 그 하숙집에서 한양대 공대 나와 대한항공 전산실에서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던 23회 형하고 친해졌다. 이공계 수재답게 언변도 논리정연하고 용모도 이지적인데다 술도 좋아하는 호탕한 기질도 엿보여 자기가 나를 좋아하듯 나도 이 형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일주일 후 두 사람을 불러 첫 상견례를 시켰다. 그리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첫 눈에 반한 이 형이 죽자사자 구애작전을 펼치자 두어 달도 가지 않아 류모가 결혼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80년 봄 묘한 죄책감에 쌓인 마음을 애써 삭이며 명동에서 있은 결혼식장에 가 양쪽 집안에 반씩 축의금을 내었다.

 

거기서 만난 여동생이 , 왜 그러셨어요? 언니는 그날 만나기로 한 선배가 형일거라 여기고 나갔는데 말이죠하는 게 아닌가. 아뿔사, 누가 떠나간 기차가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하는 그 심정이 바로 와닿았다.

 

세월이 수십년 흘러 이미 오래 전에 은퇴한 그 형의 연락처를 동창본부를 통해 안 뒤 재작년에 집을 상호방문하며 옛 추억들을 반추하는 기회를 가졌다. 형은 여전히 정정했고, 부인 수발을 잘하는 가정적 남편으로서 어렵게 연락처 수소문해 찾아준 내게 커다란 감사함을 표했다.

 

와이프도 이 스토리를 내게서 자주 들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여인인가 궁금했는지 이 부부 모임에 기꺼이 나와주었다. 형수가 된 류선생은 오랜기간 지리교사를 역임하며 남편 기세워 주고 자녀 잘 키운 슈퍼 맘 역할을 차질없이 잘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무릎 연골을 다쳐 만났을 때는 계단 오르기나 방바닥에 앉는 것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나를 보더니 재민씨는 다른 이들에 비해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하고 덕담을 던져 주는 게 아닌가. 나도 류선생이야말로 세월이 흘러도 옛 인상 그대로요했더니 인사치레 농담하지 말라는 듯 그 옛날 염화시중의 미소를 슬쩍 흘렸다. 아닌게 아니라 세월의 무게 속에 류선생의 옛 자태는 당연히 마모되어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테고 말이다.

 

와이프는 내 이런 마음을 다 안다는 듯 , 아꼈던 옛 연인이라더니 지금 보니 나보다 더 노부인이구먼.. 노부인..’ 하며 세월을 혹시라도 비껴가는 경우가 있는 양 찾아헤매던 나의 어리석은 허황됨을 대놓고 비웃었다.

 

<이 시절에 대한 총 소감>

 

하여튼 위의 에필로그라도 쓸 거리가 있을 정도로 나의 대학 2~3년 시절이자 '76~'77년 기간은 무슨 포르티시모에서 크레센토로 올라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되더니 갈수록 학업수행력도 궤도에 오르면서 주위 친구들과 평생을 공유할 추억거리를 많이도 만들었다.

 

'77년에 들어서는 하는 일 마다 대체적으로 막힘이 없이 잘 풀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10년 만에 한번씩 찾아온다는 대운기가 이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75년과는 달리 이 시절은 여복도 꽤 있었던 것 같았다.

 

위의 류양, 박복수 형이 소개해 준 러시아어과의 킹카성 수재녀 이양, 독일어 회화클럽에서 만나 내게 호감을 보여줬던 몇몇 괜찮았던 타대학 여학생 후배들.. 모두 내가 무작정 쫓아다닐 필요도 없이 내게 먼저 좋은 감정을 보내 준 매력있었던 여인들이다. 그저 지금 와서 생각하니 고마울 뿐이다.

 

행운이 행운을 또 부른다는 식으로 '772학기에는 그동안 놀것 놀아가면서도 꾸준히 학업에도 증진한 보람이 있었는지 대학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적우수 장학금까지 따봤다. 상국이가 배아팠을 속내에도 불구하고 전화로 제일 먼저 팔푸이, 한 건 했네. 축하한다하고 대인배 행세를 했다.

 

그 때 우리과 친구들 중 오겠다는 친구는 모두 데리고 가 홍콩반점에서 고량주를 곁들인 요리들로 저녁 한끼를 거하게 쏘았다. 사실 장학금 타고는 입을 싹 씻을 수 밖에 없던 처지의 친구들이 그동안 장학금을 싹쓸이로 챙겨갔던지라 모처럼 같은 부류의 친구가 성적장학금 턱을 내니 아그들이 더 신나는 모양이었다.

  

'77년은 다가올 '78년이 더 희망적으로 여겨질만큼 내게는 대학생활에서 많은 것이 그럴 듯하게 풀린 해로 지금도 기억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소설책도 모처럼 많이 빌려 읽을 수 있었고.. ‘더블 세븐이 멋진 상징이라 더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