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5.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게 된 대4 시절

백조히프 2018. 8. 10. 14:01


15.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게 된 대4 시절

 

 

<1978년의 대학 4년 시절>

 

1. 외무고시에의 관심

 

대학생활 중 가장 괜찮았다 여겨진 ‘77년을 보내고 ’78년을 맞았다. 이제 병역과 취업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대학원 진학이라는 선택지도 열어놓아야 했다.

 

‘77년 겨울부터 부친은 니는 고시 같은 데는 한번 도전하지 않나?‘ 하고 이 나라 부모들이 당시 자식들에게 기본적으로 많이 품던 기대감을 지나가는 듯이 슬쩍 내비췄다. 원래 젊은 청춘을 저당잡힌 채 단호한 결심 속에 법대공부를 한 뒤 몇 년씩 시험공부만 파야, 그리고 시험출제 경향에도 상당히 빠싹해야 겨우 도전해 볼 만 하다는 사법고시는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다.

 

그렇다면 행정고시나 외무고시가 있는데 전자 역시 사시만큼이나 빡세게 준비해야 한다 했지만 준비과목들이 뭔가를 살펴는 보았다. 행정학, 행정법, 민법, 경제학, 정치학 등이 있었는데 알만한 과목은 부전공 어깨너머로 배운 경제학 밖에 모르던 터라 아무래도 이들을 입문편부터 시작해 깊이 파며 달려들 염이 선뜻 나지 않았다. 나머지 과목들 역시 정치학 빼고는 별로 하고 싶지 않던 것들이라 더욱 그랬다.

 

남은 외시쪽 과목들을 보니 여기도 행정법이라는 게 끼어있기는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국제자가 붙은 국제정치학, 국제경제학, 국제법 등이 있는 데다 독일어도 써먹을 수 있는 외국어 영역까지 시험과목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옳다구나 고시공부를 한다면 이쪽이 내게는 제격이라 싶었다.

 

안 그래도 당시 이문동 외대 정문에 무슨 고시합격자들의 전공과와 이름이 적힌 플랭카드들이 가끔씩 붙어있는 것을 보면 외시 쪽이 압도적으로 많아 아무래도 외대-외시라는 그림이 알게 모르게 내게도 꽂혔다.

 

게다가 하숙집 식구로서 동래고 나와 무역학과 다니던 사람 좋은 복학생 선배의 후배로서 우리집에 자주 놀러와 동해고량주에 노가리 구워먹는 술판을 통해 꽤 친해진 부산고 출신의 한 친구도 어느 날 플랭카드에 외시합격자로서 이름이 떠억 붙어있었다. , 나도 한번 해보자 하는 호승심이 절로 생겼다.


<요즘 나오는 국제 외교사 서적>

 

학기 초부터 정외과 쪽 수업표를 보니 국제외교사란 과목이 있어 청강을 해보기를 했다. 노창준 교수란 양반이 가르치는 과목이었는데 들어보니 빈회의가 종료된 1815년 이래의 주요 유럽국들 간 외교적 회담이나 협정들이 맺어진 배경적 환경, 각 당사국의 초기 포지션, 체결과정, 체결 후 각국의 득실 평가 등이 다루어졌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근대 유럽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이 깊게 기술되고, 평가분석되니 외시 준비용을 넘어서서 이 과목 자체에 흥미를 느껴 홀딱 빠지게 되었다. ‘견제와 균형’, ‘영광스러운 고립’, ‘민족의 차별적 분리통치 및 이이제이(적을 적으로써 제압함)’, ‘위협의 교환을 통한 안정 추구같은 외교정책적 용어 개념들이 상당히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과목 청강에 재미를 본 뒤 2학기에는 국제법이 어떤가 싶어 또 한번 청강을 시도했다. 강사는 이 분야의 국내 권위자라는 S대의 배재식 교수였는데 강의의 흐름은 비교적 여유롭게 전개되었으나 국제외교사만큼의 사건 중심 스토리텔링이 부족할 수 밖에 없어 아무래도 과목에 빠져들게 하는 데는 상대적 한계가 있었다.

 

이 두 과목 청강을 통해 나의 외시준비에 대한 열의는 한 때 잠깐 반짝했다가 2학기 중반부터 간간이 있은 취업시험 응시 같은 게 끼어들어 서서히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도 이러한 유럽외교사에 대한 접근 경험은 나중 유럽 사회사상사들에 대한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해줘 내가 무슨 유럽통이 되는 듯한 독서취향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2. 여유롭던 전공과목과 주마간산 격의 부전공

 

2학년까지 독일작가들의 원서 작품들을 우리말로 정갈하게 해석연습하는 독어강독 시간들은 일단락되고, 3학년부터 독어학 개론(언어학적 측면), 독문학사, 독회화 작문 등이 있었는데 난 독문학사 과목이 흥미로왔다 (경제학에서도 경제사과목이 맘에 들 듯 무슨 자가 든 과목은 거의 모두 자연 뻥처럼 좋아했다).



   <박찬기 교수-독일문학사> 

 

외대 오한진 교수가 추천한 연대기적 작가 소개와 작품요약 내용으로 기술된 주황색 표지의 문고용 레클라메(광고보급)판 독일원서보다, 고대 박찬기 교수가 우리 말로 저술한 독일문학사책이 훨씬 내용이 방대하고 깊이가 있었다. 당연히 가독력도 압도적이라 난 얼굴도 모르는 저자 박교수의 저작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이 책을 항상 감사하게 대했다.


파이프 담배 피워 물고 호연지기적 폼생폼사분위기를 달고 다니던 김광요 교수로부터는 독회화 작문’, ‘시사독어’, ‘독일희곡과목을 배웠다. ‘독회화 작문은 어디선가 발췌해온 독일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들로 편집하여 구성했다. 이 문장들을 옛날 서당 훈장식으로 다짜고짜 외우게 해 자기 앞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며 재낭송하게 했다. 시험도 이런 식으로 치뤄 학점을 주었다.

 

실전에서는 거의 써먹을 수 없는 구닥다리 古文체였지만 학점을 건지기 위해서는 열심히 암송해야만 했다. 먼 훗날 독일에서 공식편지를 쓸 때 문틀을 잡기 위해 일부분은 어쩌다 활용할 구석이 있었기에 그 때마다 이 양반 얼굴이 떠올랐다.

 

대신 독일 신문이나 잡지 기사들을 편집해 엮은 시사독어과목에서 배우고 익힌 독일어 용어들은 독어 실력을 테스트하는 국내 직장들의 취업시험에서 꽤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또 주로 정치, 경제, 환경문제를 다룬 시사적 내용들은 독일 유학시 예비전공 학습코스에서 담당 독일인 강사들에게 호평을 받을 만큼의 리포트 작성능력 향상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난 내가 좋아한 독일어 전공과목들에 대한 애착으로 대학 4년 동안 회화를 제외한 독일문학과 역사문화 및 시사, 그리고 경제독어에 대한 배경지식을 이런 식으로 상당히 쌓았다.

 

거기에 비해 기계적인 반복학습을 천성적으로 싫어한 탓인지 듣기와 말하기 패턴연습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약한 리스닝 능력으로 상대의 말귀를 빨리 캐치하지 못해 말빠른 독일교수들의 수업을 따라가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전체적으로 독일어 전공에 대해서는 한번도 펑크 난 과목없이 높은 평점을 유지했기에 4학년이 되자 전공학점 취득에는 더 이상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반면 부전공이었던 경제학 관련 과목들에서는 학점관리가 취약해 전체 평균학점을 끌어내리는데 주요 장애요인이 되었다.

 

아무래도 전공자들보다는 배경지식 축적량이 적은 부전공자들을 상대로 따로 배정한 강사진이 해당과목에 대한 관록과 초급자들에 대한 강의 경험이 일천한 시간강사들로 구성되다 보니(특별한 예외 몇을 제외하고는) 수업의 질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떨어졌다고 여겨진다.

 

강사들은 과목에 대한 주차별 강의 테마에 대한 수업계획서 제공도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시간 때우듯 떠들다 나가는 것이었고, 수강자 역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인지하지도 못하니까 어떤 내용을 주력해서 강의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저 먼나라 얘기 같았다.

 

많은 학생들이 그저 땡땡이 많이 치고도 학점 하나 건지는 데만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이니 수업이 내실있게 진행될 리가 만무했다. 요즘의 대학교 강의 풍토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았지만 그때는 선생이나 학생이나 그리해도 넘어가는 것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부전공인 경제학 파트의 과목(경제원론, 미시거시경제, 국제경제, 통계학, 화폐금융론, 경제사, 재정학, 경기순환론)들을 이런 식으로 때우고 말았으니 축적된 지식량은 한심할 정도로 소량이거나 전무했다.

 

사실 나도 3년 간 제공된 과목들에서의 학점은 벼락시험 공부하여 겨우 펑크 나지 않을 정도로 건지기는 했지만, 해당과목들에서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배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은 채 그냥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치기만 했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3. 고도근시로 인한 병역면제

 

‘77년부터 나는 고도근시에다 난시 때문에 병역문제는 현역으로 가기보다 방위 정도로 마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해부터 부쩍 잦아진 대학가의 유신체제 타파시위에 자극받은 박정권은 방위역을 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더라도 대학생은 점점 현역입영 대상으로만 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78년 봄 신검 통지서를 받은 나는 방위가 실제적으로 없어져 현역을 가게 된다면 신체적 이상 사유로 면제되는 요건은 뭔지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양안이 고도근시로서 근시도수인 -7.2 디옵터 이상이면 면제되는 신체 이상임을 알아내었다. 안경점에 가서 재어보니 내 눈 양쪽이 다 -7.8 이상이고 왼쪽은 교정하기가 특히 까다로운 난시성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감지한 채 당시 망미동에 소재한 부산병무청을 찾아 가 본 사안에 대한 확인면담을 신청했다. 면담관이 나와 면담을 하기 전에 내 얼굴을 보며 대학은 어디에 다니며 고교를 어디서 졸업했는가를 묻지 않는가. 외대 다니며 경남고를 졸업했다 하니 자기도 경고 18회라고 하며 바로 반가움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게 무슨 행운이냐 하고 쾌재를 부르며, ‘선배님, 제가 삼수를 했심다. 이 고도근시로 방위면 군말 없이 가겠는데 현역은 좀 억울함미다. -7.8 디옵터의 양안 시력을 정상적으로 신검에서 판정 받아 면제처분을 받게 좀 도와주십쇼하고 바로 매달렸다. 사람 좋게 생긴 그 선배가 그래, 부정으로 사바사바 하자는 것도 아니고 하니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겠네하고 화답해 주었다.

 

집에 와서 모친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니가 삼수의 한을 여기서 좀 푸는갑다하고 크게 기뻐해 주었다. 난 개인안과가 아닌 대학병원과 시립병원에 가서 시력검사를 해 양안 -7.8 디옵터라는 진단서를 확보한 뒤 선배를 찾아 제출했다.

 

일주일 후 선배에게서 연락이 와 신검예정일에 시력검사를 하는 군의관들에게 이 진단서를 제출한 뒤 이것을 참조하여 공정한 검사판정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 왔다. 정말 든든했다. 예정 신검일에 출석해 담담한 마음으로 신검을 받았고, 특별한 해프닝 없이 병역면제판정을 받았다.

 

뭐 있는 그대로의 사실 속에 규정에 따른 판정을 받았지만 이렇게 무난하게 상황이 진행되는 데 커다란 개런티를 보여준 선배께 그냥 입을 싹 닦는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모친과 의논해 O십만원을 감사의 표시로 전해 드렸다. 공정한 검사판정을 특별한 요구없이 내려준 군의관들과 식사라도 한번 하시라고 말이다.

 

병역면제 사건은 내게 삼수기간을 만회할 1~2년의 시간을 벌어줬지만, 다른 한편 군면제자의 기죽음을 후일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남자들 술좌석에서 군대시절 자랑 경연대회가 펼쳐지면 국가공인 장애자의 자세로서 낮은 포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군 근처에도 안가 본 마누라는 물론이고, 병역필한 두 아들 놈도 아빠는 군대를 갔다오지 않아 조직의 위계질서 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없어 직장에서 반항적 인물로 자주 찍히는 것 같애하고 뭔가 대발견을 했다는 식으로 주절거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이나 현대중공업 시절 조직 대가리들에 대책없이 대드는 사건에 심심치 않게 휘말리는 나의 아마츄어리즘적 전력을 세상이치 다 깨친 도사들처럼 쯧쯧하며 걱정해 주는 것이었다.

 

4. 클래식 음악에 본격 입문

 

내게 있어 클래식 음악은 초등 고학년 때부터 입시준비용으로 유명 서양작곡가 이름과 그들의 주요 작품명을 익혔고, 중고교 시절 음악교과서나 음악수업시간, 그리고 점심시간 때 교내방송을 통해 자주 접했기에 크게 낯설거나 미지의 세계는 아니었다. 이런 클래식 음악에 대한 초기의 접근환경은 많은 이들에게도 거의 비슷했을 거라 여겨진다.

 

다만 그 이후 어떤 계기 속에 이 음악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가 살펴보는 시간과 그 속에서 다시 새로움과 무르익은 완숙함을 발견해 내는 꾸준한 탐구정신이 클래식에 대한 벽쌓기와 애호가로서의 길을 가른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70년대 중반부터 MBC 방송에서 당시 인기 있던 우수 고교생 상대의 장학퀴즈프로그램의 애청자였는데 여기서 꼭 클래식 음악 관련 문제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좀 더 깊은 관심을 품었는데 ‘78년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오니 부친이 근사한 소니 FM 라디오-카셋레코더를 구입해 놓은 것이었다.



<정윤수-클래식 시대를 듣다> 

 

지금도 그만한 기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스테레오 방송음향과 카셋녹음 음향이 내 귀에는 환상적으로 들렸다. 클래식 FM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곡들이 하나같이 고급 오디오에서 나오는 LP 원판 소리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부산에서 청취할 수 있는 KBS, MBC, CBS-FM 클래식 음악방송들만 찾아 공테입으로 유명 작품들을 제목 레이블까지 붙여가며 녹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차이콥스키, 슈베르트, 쇼팡, 슈만, 브람스, 바그너, 리스트, 멘델스존, 드보르작, 비발디, 롯시니, 구노, 오펜바흐, 시벨리우스, 그리이그, 브루흐, 쥬페 등의 음악들이 아무래도 익숙했기에 잘 들렸다.

 

좀 더 시간이 가면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샤코프, 글린카 등 러시아파와 말러의 심포니, 베르디와 푸치니의 유명 오페라곡, 드뷔시, 베를리오즈, 라벨, 샤티 등의 프랑스 인상파 음악들에까지 감상수준을 높여갔다.

 

나의 클래식 음악계에 대한 감상여행은 독일 함부르크 유학 시절 그 절정에 달해 없는 살림에도 CD 사모아서 아침시간에 듣는 게 참 그럴 듯 했다. 나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막강한 해박함과 애호정신이 훨씬 높은 조태영 박사(경제학)를 통해 수많은 귀동냥 기회를 가지고, 여러 관련 서적들을 체계적으로 훑어본 게 나름 이 음악에도 애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조우석-굿바이 클래식>

 

하지만 나는 다른 장르의 음악은 좀 아래에 있는 음악인 듯 은연 중 경시하는 클래식 매니어들과는 거리를 두며, , 우리 가요, 월드 뮤직(샹송, 칸소네, 라틴뮤직, 파두, 엔카 등), 재즈, 뮤지컬 음악 등에도 다양한 관심을 품었다. 특히 한국 돌아와서는 재즈의 뿌리와 발전사에 특별한 호기심을 갖고 크게 심취한 적도 있었다.

 

재즈라는 음악은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인들이 중노동의 고달픔을 허밍 영가(靈歌)나 블루스의 형태로 노동요 속에 배여넣어 부르며 위무받던 데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미시시피 강 아래 루이지애너주에 있는 뉴오얼리언즈가 초기 재즈의 원산지로 떠오르다 이 지역 흑인 재즈인들이 북부 시카고와 서부 연안지역으로 이동하며 미국에 전파되었다.



<요아힘 베렌트-재즈북, 3판>

 

이 곡조들의 인간원형적인 탄식의 감정에 감명 받은 미국과 유럽의 서구적 음악교육을 받은 백인음악가(조지 거쉰, 글렌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등)들이 클래식적 작곡체계를 믹싱하여 좀 더 음악적 세련미를 갖춘 재즈 곡들을 쏟아내며 이 음악은 클래식에 버금가는 발전변천사를 가진 주요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78년부터 본격 입문하게 된 클래식 음악에 오랜 기간 빠지면서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장르의 음악들에도 그 음악적 특성과 배경 정서들에 대해 클래식과 비교하며 나름 몰두해 보는 음악적 토양과 호기심을 같이 배양할 수 있었다.

 

<78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현대 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787월 현대그룹이 정부로부터 경부고속도로 건설대금으로 받은 한강 공유수면을 매립해 지은 1,510여 가구의 아파트 중 660채를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교수 등에게 특별분양 하였다. 원래 이 아파트 단지는 950채를 무주택 현대 임직원들에게, 나머지 560채를 일반인에 분양하도록 허가되어 지어졌다.

 

하지만 이 무렵 아파트 투기광풍이 불어오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권에 보통 아파트 한 채 값의 프레미엄이 붙게 되자 사회고위층 인사들이 현대그룹에 압력을 가해 이 아파트 분양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특혜 스캔들 기사-동아일보 78/7/14>   

 

결국 무주택 사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아파트 950 가구 중 290 채만 사원들에게 분양되었고, 나머지 660 채는 각개각층의 오피니언 리더(고위직 공무원 220, 언론인 40)들에 특혜식으로 분양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투서가 11월 청와대로 올라가 언론이 이 사건을 특혜 스캔들로 대서특필해 터뜨렸다.

 

<대국민 사과문 발표하는 정주영 회장과 당시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

 

국민들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현대그룹의 뇌물공세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며 비난 여론을 비등시켰다. 결국 일부 고위공무원들과 현대그룹내 한국도시개발의 정몽구 사장이 구속되거나 해임되면서 사태는 서서히 무마되며 잊혀져 갔다.

 

난 이 사건에 대한 뉴스를 처음 접하며 그 전모에 대한 폭로보도들이 연속되자 우리나라의 재벌과 고위관료들 사이의 해묵은 정경유착 상태에 대해 적지 않은 실망감을 한번 더 느꼈다. 한국재계에 중동특수로 혜성처럼 떠오른 현대그룹조차 구태의 답습에 빠져 이런 엄청난 작태를 부렸다는 사실에서 우리 재벌들과 특수층과의 짬짬이 관계에 의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2. 미국, 이스라엘, 이집트의 캠프 데이빗 협정 발효


캠프 데이빗 협정(Camp David Accords)‘789/5~9/17일 사이에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빗에서 카터 대통령의 주재로 중동전의 양대 숙적인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초치되어 난산 끝에 양국간 평화협정을 맺는 데 동의했다, 결국 ’793/26일 두 나라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캠프 데이빗 산장에 도착한 3국 수뇌>

 

당시 이란에서 벌어진 반미시위 격화에 골머라를 앓으며 지지율이 떨어지던 카터는 중동에서의 외교업적 성과를 위해 이스라엘-이집트 양국간의 단독 평화안을 구상하여 이런 실현시키고자 했다.

 

‘7310월에 벌어진 4차 중동전에서 이집트의 사다트는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이스라엘에 초반 기습으로 선전하여 아랍권 내 위상을 크게 올렸다.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를 자신의 맞수로 인정하며 조건만 맞는다면 양국간 단독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협정 서명 후 공동회견 하는 3인-78/9/17>

 

그 조건은 이집트에 시나이 반도 상당부분을 이미 반환했으니 남아있는 부분에서의 4,500여명 이스라엘인 정착지와 군대 유지는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다트는 들어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하며 캠프 데이빗을 떠나려 하자 카터가 중재에 나서 양 지도자에게 따로 오가며 경제 및 군사지원책을 당근으로 설득외교를 펼쳤다.

 

결국 이스라엘에는 매년 30억불 상당의 군사지원을, 이집트에게는 매년 15억불의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가까운 장래에 중동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이스라엘은 인정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5년 내에 시나이 반도를 단계적으로 철수하는데 동의한다라는 공동선언문을 이끌어내는 대 성공했다.

 

사다트와 베긴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할 정도로 국제외교무대에서 각광을 받았지만, 이 협정 논의에서 소외되었던 대부분의 아랍국들은 사다트를 배신자라고 맹비난하며 이집트를 아랍연맹에서 제명시켰다. 사다트는 자국에서 실리외교를 성공시켰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2년 뒤인 ‘8110월 중동전 승전 퍼레이드에서 아랍내 과격테러 조직원들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암살되었다.

 

난 이 해 이 캠프 데이빗 평화협정 발효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 주요 내용보다는 이란의 소요 사태로 궁지에 몰린 카터가 중동에서 만회의 한 건을 노리고 있구나 하는 인상 정도만 받았다. 하지만 뭔가 유연해 보이는 사다트에 대한 개인적 호감은 딱딱한 교장선생 같은 인상의 베긴 보다는 훨씬 더 컸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국내 분위기는 여전히 아랍권 보다 친이스라엘적인 쪽이 압도적이라 나 역시 사다트 개인은 맘에 들지만 시나이 반도 일부를 더 수복하는 걸로 만족하고, 이스라엘이 중동권의 낭중지추’(주머니 속의 송곳) 역할을 여전히 하며 (그때만 해도) 이 지역에 더 굳건한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겠다고 내 생각을 정리했다.


3. 이란에서의 민중시위 격화


’792월 친미적이었던 샤() 팔레비 정권에 대항하다 16년간 터키, 이라크, 프랑스에서 망명했던 이슬람 영적 지도자이던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이란 국민들의 끈질긴 반미시위 끝에 귀국하며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드디어 본격화되었다.

 

<1978년의 이란 민중 시위> 

  

이 시위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788월 이란 아바단의 한 극장에 시위하던 군중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진압을 피해 들어갔는데 비밀경찰 사바트가 방화한 것으로 의심되는 화재에 의해 400여명이 숨진 사건이었다. 그 무렵 만연한 부패와 빈부격차 심화, 과도한 서구화에 대한 반발로 팔레비 왕정체제는 한참 흔들렸는데 이 사건에 의해 저항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9월에는 테헤란 광장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발포로 2천명이 숨지는 검은 금요일사건까지 발생하자 팔레비 정권과의 협상을 통한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온건 반대파까지 반미 시위대에 적극 가세했다. 결국 국왕 팔레비는 ‘791월 가족들과 이집트로 도주하고, 2월에 귀국한 호메이니에 의해 이슬람 혁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 연표>

 

난 이 일련의 혁명흐름에 대해서도 그 당시 국내신문들의 띄엄띄엄 축약 보도에 의해 팔레비의 이란이 이토록 단기간에 전광석화식으로 무너질 줄은 정말 몰랐다. 아마도 우리의 체제유지 상황과도 비교해 많이 캥기는 부분들이 있었던지 보도관제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이슬람에 대해서는 서구적 시각에서 본 견해를 자체 필터링 없이 오랜 기간 전해왔던 국내 언론들에 의해 당시의 나도 이슬람은 많이 호전적이고 중세의 야만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좀 미개한 종교구나 하고 세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 광신적인 무슬림들이 한 30년 동안 서구적 문명화를 애써 이식시켜 놓은 나라를 한 방에 중세시대로 옮겨가겠구나 하는 아쉬움과 걱정이 도리어 앞섰다.

 

하지만 냉전시대 이래 미국의 역대 보수정권들이 제3세계 국가들을 어떻게 대했으며, 소수 집권층 이해관계자만을 위한 국익을 어떻게 챙겨왔는가를 다루고, 이슬람에 대한 편견 없는 소개를 하려 한 여러 다양한 서적들의 독서를 통해 그 때와는 많이 다르게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내가 그 당시 품었던 편협했던 서구지향적 세계관이 얼마나 한쪽으로만 치우쳤던가를 한참 뒤에서야 깨닫고 상당 부분 교정하게 되었다.

 

<4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취업 시험과 두산그룹 연수

 

‘78년 여름부터 취업준비에 전력하는 우리과 복학생 아재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면서 나도 취업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문에 나는 공채모집 광고를 보니 어디에나 경영학, 영어, 상식 시험은 거의 공통적으로 들어있었다.

 

이때부터 그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경영학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해 새로운 호기심이 움텄다. 일단 서점에 가서 경영학 연습이란 두꺼운 책을 사서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그 파트들도 많았지만 각 파트의 범위도 하도 넓어서 단기학습으로는 주마간산 격으로라도 한번 살펴보기가 벅찰 정도였다.

 

거기다 시험에 잘 출제된다는 부분과 관련 테마들에 대한 학습 정보가 거의 없으니 독학으로 단기간에 준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리였다.

 

영어 역시 고교 졸업 이후 회화패턴 연습 책들이나 만져보고, 어쩌다가 학교측에서 제공하는 타임지 강독강좌에나 참석해봤지, 상국이처럼 워드 Power’ 등등 해서 취업준비용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고급어휘력도 딸리고 텍스트 읽어내려가는 속도도 한참 느렸으니 고득점 하고는 당연히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처럼 몰려든다는 심성그룹 공채는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고, 그나마 어찌어찌 모집광고를 본 외환은행과 현대그룹 시험에 응시했으나 두 곳 다 아무런 연락도 못받은 낙방이었음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이 시절만 해도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 상투적인, ‘관심을 가져주신 귀하와 같이 일할 기회가 아쉽게도 지금은 없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하고 유감스럽심다라고 하는 통고문도 보낼 줄 모르는 기업들이 태반이었을 때였다.

 

외환은행의 경영학 시험에서 나온 ‘PLC(Product Life Cycle, 제품수명주기) 이론에 대해 개요와 그 적용사례를 논해보시오라는 문제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듣도보도 못하던 용어라서 답안지는 거의 손도 못되었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왔다. 내 이놈을 꼭 알아보리라 결심하고 파헤치다보니 나중에 대학원 석사논문 타이틀로 삼을 정도로 친숙해졌다.

 

그러던 중 어느 복학생 선배가 원서제출했다는 두산그룹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나도 이 회사가 ‘OB맥주만드는 회사란 걸 알고서는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원서와 이력서 및 성적증명서, 졸업증명 예정서 같은 것을 제출했다.

 

큰 기대도 안했는데 서류 통과했으니 면접 보러 오라는 통고가 왔다. 앞서 두 번의 낙방으로 좀 의기소침했는데 갑자기 이 회사가 더 고마워지며 힘이 났다. 면접장에 가니 세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는데 복판에 있는 주면접관인 양반이 자네, 참 똘똘해 보이는 인상이네하고 처음부터 친숙한 호의감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대 창업주인 박두병 회장의 창업공신으로 당시 3대로 넘어가는 무렵 수렴청정의 역할을 맡은 정수창 사장이었다. 경북출신인 정사장은 내 외대 독일어과 학벌이나 성적보다는 경남고 출신이란 게 더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주 우호적인 질문에 크게 쫄지 않고 대답도 따박따박 하면서 , 이만하면 합격되겠다싶었다. 그 옆에 있던 가장 젊어 보이던 양반이 영어지문 텍스트가 적힌 페이퍼를 하나 건네주면서 한 문단 낭송하고 대충 뜻을 말해보라 하지 않는가.

 

한 때 걸레론’(내가 싫어하는 걸레는 다른 이들도 싫어한다며, 기업매물을 내놓을 때는 알짜배기를 내놓아야 한다고 설파)으로 국내 경제계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발언을 했던, 젊은 날의 박용성 회장이었다.

 

일이 되려하니 그 문단에서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별로 없는데다 약간 아리쏭한 단어들도 전체 문맥 속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자신있게 해석해 주자 박회장도 머리를 주억거려 주었다.

 

아무튼 최종면접까지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10월 중순의 어느 날 경기북부 쪽에 있는 두산그룹 신입사원 연수장에 소집되어 갔다. 내 기억에 한 30~40명 모인 듯 했다. 여자교육생은 없고, 남자들만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보니 이공계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상대와 법대생이었으며, 나같은 독일어 전공자는 무슨 구색 갖추기용으로 불렀는지 하나 뿐이었다. 전체 문과생이라 해봤자 서너 명도 안되었다.

 

방 하나에 4인씩 배당했으며, 아침 6시에 기상해 갓 배운 사가 부르기, 체조와 구보 한번 하고 식사한 뒤 오전 교육, 오후 계열사들을 순방하는 일정으로 짜여져 있었다. 교육시간에는 두산 그룹의 주력사인 OB맥주, 두산, 동산토건, 두산판유리, 합동통신 등에 대한 매출실적, 국내업계에서의 경쟁적 위치, 창업주의 경영철학, 주력계열사 임원들의 자사 프로필에 대한 소개들이 주를 이루었다.

 

2주 교육하고 난 후 각자 희망하는 근무기업을 써내라 해서 난 OB맥주-두산 두 곳만 희망한다 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나를 데리러 온 계열사 직원은 창원에 소재하는 두산요업에서 온 양반이었다. 알고 보니 세라믹 변기 생산업체였다. 수락하면 바로 창원으로 내려가야 할 처지였다.

 

암만 문과계 전공자지만 내 몸값이 이런 하위계열사로 팔려 갈 정도 밖에 평가를 못 받나 여겨지니 교육 받으며 좋았던 두산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어졌다. 그래도 독일어 하는 친구를 뽑았으면 맥주 선진국인 독일의 맥주사들과 관련있는 OB맥주나 유럽회사들과 거래하는 종합상사 두산에 배치할 줄 알았는데 이게 아닌가 싶었다.

 

뭐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두산요업에서 나온 과장에게 죄송하지만 나는 여기 근무하려고 두산그룹에 오지는 않았심다하고 구두 통보한 뒤 그냥 작별하고 나왔다. 참 마음이 씁쓸했다. 그리고는 오냐, 내가 경영학 공부를 좀 더 해 너그가 날 모시고 갈 인재로 내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놓겠다하고 결심했다.

 

2. 대학원 진학 결심과 입학 준비

 

일껏 뽑아준 두산을 박차고 나오니 그 다음부터는 큰 기업들은 공채도 끝나고 해서 중소기업들 외에는 그리 갈만한 곳도 없었다. 이왕 이리 된 거 대학원에 가서 경영학 공부나 더해 보자 하고 본격적인 경영학 학습을 시작했다.

 

당시에 외대에는 경영학과가 없는데다 유사학과인 무역학과 같은데서 가르치는 경영학 쪽 커리큘럼이 뭔가 부족한 듯 맘에 들지 않아 상경대 쪽이 센 연세대와 S대 주간 대학원 경영학과를 지원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웬만하면 좀 만만한 연세대에 합격해 결판을 보고 싶었다.

 

혼자서 정모라는 고대교수가 집필한 경영학원론과 여러 파트 전공교수들이 예상문제에 대한 답을 작성해 놓은 경영학 총연습이란 책을 구입해 한달 반 정도의 시간에 한번은 다 읽고 갈 계획을 세워 외대도서관에 가서 열공을 했다. 영어는 한 2년 전부터 시작한 토플 책을 복습하며 어휘력이나 늘리자는 정도로 학습했다.

 

그런데 묘한 문제가 생겼다. 연세대의 경우 야간 경영대학원과 주간 대학원 경영학과가 있는데 전자는 주로 비상경 전공 출신의 직장인들이 주고객이었고, 후자는 박사과정으로 가기 전의 과정으로 입학생 중에는 상경계 전공자들이 한 80%를 차지했다. 야간이 학부생 저학년 수준의 경영학과 커리큘럼 속에 운영되는 반면, 주간에서는 말 그대로 전공졸업을 전제로 한 세미나식의 심화학습이 주를 이루었다.

 

다른 사립대 등과 마찬가지로 연대도 야간 경영대학원의 등록금 수입이 상경대학 운영에 압도적이기 때문에 나중에 알고보니 등록금 지불능력만 있으면 시험은 형식적으로 치루고 지원자를 거의 합격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간대학원보다 시험을 빨리 쳐 주간이 모집공고를 내고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기 전에 야간 합격자는 등록을 마치라는 속이 빤히 보이는 짓을 했다.

 

나는 어차피 주간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야간에 다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주간에 될지 안될지를 모르는 상황이기에 간 크게 야간 등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학교 측은 이런 경우를 미리 많이 겪은 듯 야간 등록금을 일단 납부하면 동일계 주간에 합격되더라도 반환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내가 좀 고민하는 이때 부친과 모친이 그냥 보험금 드는 셈 치고 야간 등록금 40만원을 꼴아박자고 나를 설득했다. 못이기는 채 수락하고 주간대학원 시험을 쳤다. 제법 주간인 척 경영학과 영어 시험이 야간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으며, 2외국어 시험까지도 치뤘다. 예전에 연대에 두 번이나 떨어졌던 터라 약간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필기에 합격했다며 며칠 후 면접시험 보러 오라는 통보가 왔다.

 

면접장에 가니 나중 내 석사논문 지도교수가 된 정구현 교수(국제경영)를 비롯해 오세철(조직행동론), 김기영(생산수리 경영), 추휘석(생산관리), 유붕노(마케팅) 교수 등이 앉아서 돌아가며 여기 오게 된 지원동기와 상경계 공부를 어느 정도 했느냐는 질문들을 했다.

 

김기영 교수가 좀 공격적인 압박질문을 했지만(방금 우리가 한 질문응답 얘기를 독일어로 바로 해보라는), 정구현 교수가 그런 돌발질문에는 이런 자리에서 긴장한 피면접자가 쉽게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나를 좀 잘 봤는지 먼저 방패를 쳐주었다. 그리고 나서 한 차분한 질문들에서는 나도 안정이 되자 크게 막힘없이 조신조신 대답을 제법 잘했다.

 

며칠 후 최종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고 아까운 등록금을 또 한번 이중으로 치룬 채 나는 4년 간이나 정이 든 이문동 시절을 마감할 준비를 했다. 하숙집 배여사는 수석 하숙생이 사연도 많이 남긴 채 이제 신촌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니 못내 아쉬워 했다.

 

그리고는 작별기념의 와이셔츠를 꼭 한 벌 해주고 싶다며 기어이는 나를 근처 셔츠점으로 데려가 한 벌 고르게 했다. 충청도 아줌마의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멋진 순간이었다.

 

나와 ‘77년 겨울부터 방 같이 쓰던 박경효는 이 무렵 방위근무 하려 바로 얼마 전에 부산 내려가 있었다. 상국이는 이 무렵 나와 함께 연대 야간 경영대학원에 같이 응시해 합격한 채 삼성그룹 신입연수에 참여해 마치고는 삼성물산에 입사 배정되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3. 남매 뚜엣 현이와 덕이의 오빠와 짧은 교우

 

‘78년 가을 우리 하숙집에 당시 인기가 높던 현이와 덕이그룹의 오빠 장현 군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아랫방에는 30회이며 바둑 프로 천풍조 5단의 친동생인 천인식(일어과, 바둑 1)이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평택 자매들이 나간 방에 인식이 소개로 들어왔다.

 

그 부산 악센트 강한 누나에게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나 홀딱 빠진 장가수가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와서는 아예 그 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도둑방문도 하루이틀이지 싶었던지 하루는 내 방으로 찾아와서 정식 신고를 하겠다며 수인사를 건네왔다.



<그룹-현이와 덕이> 

 

TV에서 자주 보던 연예인 친구가 낮은 포복으로 들어와 통성명을 청하니 나도 답례로 골목 안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동해고량주, 맥주, 노가리포, 오징어를 사와 배여사와 함께 집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불러내어 내 방과 주인방 앞 대청마루에서 환영연을 베풀었다. 장가수가 감읍했는지 갖고 다니던 통기타를 내려놓고는 즉석 공연을 시작했다.

 

저그 여동생 장덕이 보다는 작곡작사 능력이 좀 떨어진다지만 기타연주와 가창력은 허명이 아닐 정도로 상당했다. 당시 방송에서 자주 나오던 저그 팀 히트 곡들을 메들리로 부르더니만, 지 클래식 가창력도 한번 보여준다는 듯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흘린 눈물을 이태리 원어로 뽑는 것이었다.

 

우나 푸르티바 라 그리마~’로 시작되는 제법 슬픈 영탄조의 가사가 고량주 삘이 살짝 오른 술판에 아주 그럴 듯하게 울려왔다. 내가 이 곡에 대해 좀 아는 척 해주자 이 친구가 방송에서보다 더 멋들어지게 부르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방장님의 신청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작곡가 장덕의 지휘에 '소녀와 가로등' 부르는 진미령> 

 

그 당시 동생 장덕이가 작곡해 자기도 불렀지만 이 곡을 받은 신인가수 진미령이가 방송에서 더 히트를 쳤던 소녀와 가로등을 신청하니 이 친구가 신이 나서 고음에서는 여자 가성까지 넣어 변음하면서도 제법 열창하는 것이었다.

 

마치고는 방장님, 18번 한 곡 불러주시죠하길래 대학시절 술판에서 한창 불렀던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와 남인수의 감격시대되느냐고 물었더니 물론입죠하며 바로 뽕짝 코드로 반주를 넣는 것이었다. 나야 이 노래들을 생음악으로 많이도 불렀는데 옆에서 장가수가 기타 반주까지 능숙하게 넣어주자 그야말로 물오른 가창력으로 두 곡을 연거푸 뽑았다.


<장덕이 오리지널로 부른 '소녀와 가로등', 1986>  

 

아그들은 옆에서 열광해 떼창과 박수 반주를 겁나게 넣어 분위기가 제대로 무르익었다. 특히 주인장 배여사가 내 노래 솜씨에 까빡 가는 듯 깨갱해 주었고, 장가수도 이건 아마가 아니고 바로 프로임다하며 추임새 빨을 더 조아 주었다. 그리고는 연예계의 떠도는 얘기 보따리까지 신나게 풀며 이 날의 자리를 한껏 고조시켰다.

 

저그 둘이는 방송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앰블런스 차는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당시 청초한 소녀 이미지의 진미령이가 성질이 많이 거칠며, 아기를 키우는 미혼모라는 사실까지 우리들 귀를 호강시키려고 거침없이 까발렸다(아마도 진미령이가 더 히트친 소녀와 가로등노래 저작권 수입배분에 대한 갈등이 있는 듯 보였다). 어쨌든 우리 둘이는 바로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에 있은 가을축제 쌍쌍파티에 하숙생 각자가 한명씩 건진 여학생 파트너들을 우리집에 데리고 오겠다 하니 이 친구가 특별 출연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한 말 그대로 그날 양복입은 연예인 복장으로 기타 들고 대청마루에 나타났다. 지난 모임과 같은 레퍼토리들과 세레모니로 연회는 진행되었다.

 

나는 그 날 이범익이가 소개시켜준 저그 사촌여동생으로 단대 작곡과에 다닌다는 아그와 참석했는데 이 친구가 장현이를 가까이서 본다고 난리였다. 아무튼 장가수는 그 날 나와 우리집 하숙생들의 가오를 한껏 세워준 채 내가 교통비 개런티로 쥐어준 꼴랑 3만원짜리 봉투를 고사고사하다가 막판에 감사하다고 하며 받아갔다. 또 한번 가진 최고의 만남이었다.

 

그 모임이 있은 후 80년대 중반 나는 독일에서 한국 신문에 난 장가수의 설암 발병 기사를 보았다. 어찌나 가슴이 무너지던지.. 그 기사에 의하면, 이 친구는 암세포가 퍼진다 해도 가수의 생명인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지는 않겠다며 죽는 날까지 노래 부르다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했다. 과연 예술인다운 결정이다 하고 큰 공감을 했지만, '90년에 수면제 과용으로 먼저 간 동생 따라 6개월 뒤 사망했다는 비보를 신문기사에서 접했다.

 

80년대부터 천재소녀의 수식어가 떨어지지 않았던 여동생 장덕은 음악적으로는 큰 성공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다 수면제 과용으로 30 밖에 안된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먼저 만난 뒤, 6개월 후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된 장가수의 부음도 전해들었던 것이다. 

동생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장가수의 얘기에 의하면 예술인이자 대학교수라는 저그 부모님들이 자기들 어린 시절에 이혼하고, 남매 둘이서 서로를 돌보며 자라왔기에 그 남매지정의 애틋함이 장난이 아니라고 전해주었다.

 

짧게 만난 사이였지만 이 친구에 대한 추억은 남다르게 강렬했다. 미국의 카펜터즈남매 그룹과 항상 오버랩 될 정도의 음악성과 동기애적 우애가 짠했는데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둘 다 단명으로 세상과 작별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웠다. 부디 다른 세상에서는 좋아하는 음악 마음껏 하는 부부로 태어나서 건강하게 살며 오래 해로하기를 기원했다.

 

<이 시절에 대한 총 소감>

 

‘78년을 기점으로 우리경제는 중동 붐도 최고점을 지나 성장세도 하향세를 면치 못했고, 현대그룹이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으로 각개 각층의 여론 리더들에게 전방위로 뿌린 압구정동 아파트 뇌물선심 공세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다 그동안 억지로 눌러 놓은 물가수준이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시장매커니즘적 공급수요 현상에 의해 병마개가 터지듯 생필품 물가가 크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이 해 12월에 있은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는 다음 해의 YH사건->김영삼 제명->부마 사태->10.26 사태로 이어지는 본원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런 민생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나의 개인적 일상은 크게 악화는 되지 않았지만,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을 읽고서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우리사회 사회적 약자들의 팍팍한 일상적 삶에 대한 실체를 책으로나마 접해 봤다.

 

그리고 외시공부에의 기웃거림과 군면제 혜택을 받은 뒤 두산그룹 합격과 연수교육을 통해 자기계발 동기를 절실하게 느끼고, 대학원 진학까지 하게 된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고 보니 새로운 변화의 변곡점이 되었다고도 여겨진다.

 

아무튼 이문동 시절이 마감되고, 신촌시절이 다시 시작되며 다가올 국가의 커다란 변란기 속에서 개인적으로도 여러 사건을 겪으며 추구하는 학문적 방향도 크게 트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를 거쳐 독일유학까지도 행하게 하는 여러 선행조건들을 채우는데 ‘78년은 그 출발점으로 놓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