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새로운 신촌 시대를 맞은 대학원 전반부 시절
<1979~80년의 대학원 시절>
1. 허겁지겁 수업 따라가던 ‘79년 1~2학기 시절
‘79년 2월 말 정들었던 이문동 생활을 청산하고 신촌으로 건너가 신촌극장 길 건너편에 있는 주택가에서 하숙집을 대문에 붙은 ’하숙침‘ 광고를 보고 복걸복이라 여기며 대충 정했다.
이 집은 이층 양옥으로 겉모양이 그럴싸 해 들어갔는데 며칠 지내보니 아래채에 사는 주인 여자의 야박한 인심과 주방을 맡은 고용 아줌마의 성의없는 음식솜씨 및 식탁에 올려놓는 반찬들이 수준이하라서 ‘아이가, 이게 아닌데’ 싶었다.
하지만 2층 방에 미리 들어가 있던 룸메이트가 나를 맞아주었는데 당시 모항공사 에 전문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고교선배 형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이렇게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맥주 오징어 사들고와 신고식을 하며 바로 화통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옆방에도 타 고교 선배뻘 되는 두 양반이 있다기에 같이 모여 수인사를 나누었다.
3월부터 시작된 학기에 야간 등록금을 반환받을 수가 없으니 기왕지사 이리 된 것 야간 강의도 열심히 들어보기로 하여 주야간 대학원 양쪽을 다 다니는 형상이 되었다. 주경야독이 아닌 주독야독의 생활이라 첫 학기는 제법 많이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학자 폴 크루그만의 국제경제학 서적>
경영학에 대한 기초 과목들인 마케팅, 인사관리, 회계원리, 재무관리 등을 야간에서 듣고, 낮에는 주간 대학원에서 조직행동론(OB), 국제경제학, 국제경영(International Business, IB)을 신청했고, 학부생들 수업에서 마케팅, 중급회계, 생산수리경영(Operational Research, OR), 거시경제, 통계학, 경제수학 과목들을 청강했다.
수업시간 자체가 밤낮으로 빡빡하게 짜여 있으니 평일에는 선정 교과서 내용을 제대로 한번 훑어보지도 못한 채 수업참석 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슨 고3 시절이 다시 돌아온 듯 했다. 주말에 복습을 한다고 했지만 해야 할 과목이 워낙 많아 다할 염을 버리고 중요 과목들만 집중하는 방향 전환을 했다.
주간 대학원에서 첫 학기에 신청한 중요 과목들은 국제경제학과 마케팅, 재무관리였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과목은 정구현 교수의 국제경제학이었는데 수업 진행은 이슈 중심의 세미나식 강의였다. 정교수는 한 15명이 듣는 수업에서 해당 시간 주요 이슈에 대한 배경지식 테스트를 수강자 출석부를 보며 했는데 나는 이 때가 가장 조마조마 초조한 시간이었다.
상당수는 학부 졸업생들이라 아무래도 나보다는 경제와 경영의 배경지식 축적량이 많기에 핵심을 관통하는 답을 못해도 이것저것 엮어서 썰을 풀 수 있어서 최소한 나처럼 ‘처음 접해봐서 잘 모르겠심다’를 습관적으로 연발하는 초짜와는 수업을 대하는 데 있어 좀 더 느긋한 여유를 보였다. 아무튼 나는 얘기가 돌다 정교수로부터 추가질문이라도 떨어질까봐 시간내내 고개를 아래로 수그려야 하는 ‘신입의 공포’ 기간을 제대로 체험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몇몇은 발군의 내공으로 교수와 말 그대로 상호논박까지도 하는 친구들을 보았다. 참 대단해 보였다. 얼른 나도 관련 도서와 페이퍼들 열심히 읽어 수업에서 저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친구가 되어야지 하는 각오가 절로 일어났다.
다른 마케팅과 재무관리는 담당교수들이 정교수만큼이나 철저한 세미나식이 아닌 널널한 분위기로 진행해 주는 바람에 그래도 좀 숨통이 튀어졌다. 마케팅 교수는 필립 코틀러의 마케팅 원서책 하나 지정해 주고 수강생 모두에게 한 챕터씩 학기말까지 완역해 오라는 학점부여 과제를 배분한 뒤 자신이 한국 마케팅 학계와 기업들에서 누리는 영향력 자랑을 사례연구라는 이름 속에 내보이며 한 학기를 보내주었다.
재무관리 교수 역시 자신이 학부생들을 상대로 저술한 책을 하나 들고 와서 이 책 중심으로 주요 내용 소개를 하거나, 기업들이 자기에게 의뢰한 재무관련 문제해결 프로젝트들에 대한 얘기로 시간을 때워주었다. 학점은 조교로부터 배포된 열 여개의 테마 중 하나를 골라 리포트 형식으로 제출하면 되었다. 나로서는 세미나식 질의응답 준비를 위한 커다란 예비학습 시간투자가 필요없는 아주 고마운 수업이기도 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대입학원 단과반 수강생처럼 학부생 수업 시간표를 보고 3~4 학년 수업 중 중급회계, 원가관리회계, 마케팅, 소비자행동론, 인사관리, 생산수리경영(OR) 과목 등을 ‘79년 2학기까지 1년 내내 주로 듣기만 했다 (학점 따는 중간과 기말고사를 따로 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학부수업 듣는 중에 한번은 출석체크하는 교수가 ‘최동원!’ 하기에 뒤돌아 보니 당대의 야구스타 최동원이가 청조끼 입고 예의 금테안경을 쓴 채 맨 뒷줄에 앉아 ‘옙’ 하고 대답하는 것을 봤다. 아, 저 친구가 경영학과 소속으로 연대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수업 마치고 다가가 인사라도 나누어야지 했는데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에는 수업에 별로 나타나지 않아 스포츠 대스타와의 개인적 만남은 아쉽게도 거기서 불발이 되고 말았다.
‘79년 1학기까지는 지불한 등록금이 아까와 야간대학원 수업에도 최대한 많이 참석하려 애썼다. 수업 수준은 학부생 수업에서보다 피곤한 직장인들의 수업집중도가 낮아 고만고만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낮에 들은 과목들의 편안한 복습시간이 되어주었다.
한번씩 상국이 부탁으로 저그 경제학 전공반 수업에 들어가서 대리출석도 해주면서 말이었다. 아무튼 ‘79년은 새로운 공부에 대한 꽉찬 스케줄로 ’똥푸고, 야경돌고‘ 하며 나름 제법 빡빡하게 한 해를 보내었다.
2. 국제경제학과 국제경영학 과목에 빠지다
나는 연세대 대학원 시절에 가장 흥미진진하게 듣고(비록 정교수 세미나 수업 때 쫀 적이 더 많았지만) 나중에 석사논문도 ‘국제경영(IB)' 쪽으로 쓰게 한 두 과목이 ‘국제경제학’과 ’국제경영학‘이었다. 그 다음으로 인상 깊게 들은 과목이 오세철 교수의 ’조직행동론‘이었다.
마케팅도 다루는 내용들의 성격상 꽤 흥미로울 수 있는 과목이었지만 담당교수들이 그리 매력을 끄는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제공하지 않아 상기 두 과목들보다는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끌렸다.
재무관리와 회계, 생산수리경영(OR) 쪽도 인문학적 배경지식보다는 수리계산에 밝아야 하는 전형적인 도구과목적 특성 때문에 내게는 기피대상 과목들이었다. 그저 경영학 전공자로써 어떤 내용들이 소개되고 논의되는지를 파악하자는 정도로만 동과목들을 대했다.
국제경제학은 외대시절 부전공으로 경제학 공부를 할 때 잠깐 맛은 봤지만 전체 조망은 못한 상태라 연대 대학원에서 정구현 교수 수업을 들으며 비로소 이 과목의 참 맛을 알게 되었다.
국제간 교역동기와 교역이익을 설명하는 교역이론(데이빗 리카르도의 비교생산비설, 헥셔-올린 정리, 린더의 유사수요 가설, 버넌의 제품수명주기(PLC) 이론 등), 국제금융, 환율이론, 국제수지, 보호무역-관세론, 해외직접투자(FDI) 이론, 세계화, 개도국 경제발전론 등으로 구성된 ‘국제경제학’은 나중에 독일 가서도 한번 더 깊게 파고들 여러 배경지식적 토양들을 제공했다.
정교수가 추천한 루트 등의 미국 저자들이 쓴 ‘국제경제와 투자’라는 원서 책과 안승철이 저술한 ‘국제경제학’ 책을 병행하여 읽으며 많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이제 2학기로 갈수록 이 과목에서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만큼 논의되는 테마들에 대해 제법 같이 말을 섞을 수 있는 자신감이 강화되었다.
<나를 국제경영학의 세계로 입문시켜준 은사 정구현 교수(2000년대 중반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시절)>
‘79년 2학기에 처음 들은 ‘국제경영학’은 내게 드디어 이 과목이야말로 앞으로 경영학에서 석사논문을 쓸 전공분야로 삼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내가 처음부터 지도교수로 삼으려던 정교수의 전공이었기에 그 결정은 더 빨리 확정될 수 있었다.
자국기업이 해외시장을 겨냥해 수출이나 현지기업에 기술 라이센싱만 하는 단계를 넘어 ‘외국비용’이라는 낯선 외국에서의 불확실한 환경적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왜 현지에 생산공장이나 판매법인들을 세우는가 하는 ‘해외직접투자’(FDI) 현상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먼저 다루었다.
독점적 우위이론, 과점적 대응이론, 제품수명주기(PLC)이론, 내부화이론, 절충이론 등을 접하면서 기업들의 다양한 직접투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를 장착하는 맛에 이제는 학자의 길을 가도 제법 할 만 하겠다 싶었다.
해외에 진출해서는 생산, 판매, 연구개발(R&D) 세 파트를 글로벌적으로 배치하여 초국적기업들인 다른 ‘글로벌 플레이어’들과 세계시장을 놓고 다양한 글로벌 경영 전략을 펼치는 이 분야에 대한 사례연구를 하고 새로운 시사점을 발견해 이들 전략을 변증법적으로 진화시키는 이 분야 공부가 딱 내 마음에 들었다.
3. 10/26 박통 시해 사건 발발
정신없이 바빴던 1학기 시절을 보내고, 여름 방학 후 시작된 2학기부터는 ‘신입생의 공포 기간’은 좀 벗어난 듯 약간의 숨돌릴 여유가 있었다. 좋아하는 국제경영학 수업도 맞이하고, 그 사이 신촌역 앞으로 하숙도 옮겨 양산출신 할매가 해주는 손맛 좋은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이 집에 오니 연대 학부생들, 복학생들, 그리고 직장인들로만 있어 이들 하숙집 식구들과 어울리는 맛도 제법 쏠쏠했다. 학부생들 몇 명은 얼마 안가 나를 선배나 형으로 호칭하며 스스럼없이 따라주었다. 어떤 친구는 내가 독일어과 나왔다고 ‘게르만 형’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던 10월26일 아침 마당에서 이 닦고 세수한 뒤 방에 들어가 라디오를 켜니 박통이 간밤에 어느 안가에서 측근들과 회식 중 중정부장이던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 간에 부마사태 진압에 대한 의견충돌로 크게 다투다 격분한 김재규에 의해 차지철과 함께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실화냐’ 할 정도로 쇼킹한 뉴스라 방을 나오니 다른 방 사람들도 모두 같이 나와 ‘이 무슨 변고냐’ 하며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만 봤다. 시간이 가면서 좀 더 자세한 그날 밤 사건이 방송보도로 전해지며 김재규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쿠데타냐 그냥 울뚝 밸에 의한 총기난사 사건인가가 첫 며칠의 주요 화두였다.
그 무렵 박통은 제1야당 당수 김영삼이 외국기자들 앞에서 미국과 유럽국들은 박정권의 안하무인격 독재정치를 국제적으로 비판하며 징치해야 한다는 발언에 격분해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쪽수로 국회에서 제적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안 그래도 소비자물가가 그 해 한해에만도 60%씩 올랐는데다 YH 여노동자들의 시위를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민심이반이 현저한 상태에서 이 제적사건까지 가미되자 부산과 마산권 대학생들의 항쟁이 폭발했고 이 현장을 답사한 김재규가 이건 단순 폭동이 아닌 정권붕괴를 의미하는 민란 수준으로 판단하고 이를 안가 주연자리에서 보고했다.
<10/26 사태의 주범 김재규>
박통은 언짢은 표정으로 이 보고를 듣는데 이 무렵 판단이 흐려진 박통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온갖 같잖은 권력행사로 주위의 미움을 한 몸에 받던 호위무사 역의 차지철이 옆에서 ‘각하, 이런 폭동은 캄보디아 사례를 보더라도 군탱크를 동원하면 설혹 백여 만명의 시위군중이 희생된다 해도 정권안보는 무난하게 유지할 수 있심다’ 하고 설레발을 쳤다.
평소 차지철의 전횡에 몸서리치던 김재규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 하고 중간에 잠깐 나가 소지하고 온 권총으로 차지철을 즉살한 뒤 박통에게 가슴 한 방, 그리고 격발이 안되어 중정 부하에게서 받은 새 권총으로 후두부를 확인사살용으로 쏘아 18년 간을 이어온 박정권의 장기집권을 종료시켰다.
<박통 서거를 보도한 당시 기사>
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계획성으로 안가에 같이 있은 비서실장 김계원, 육참총장 정승화의 확실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차로 현장을 떠나는 중 삼각지에서 중정본부로 가지 않고 정승화가 있는 육군본부로 간 게 김재규로서는 패착이었다.
완벽한 플랜없이 김재규가 우발적 충동으로 국가원수를 시해했다고 본 정승화는 더 이상 김재규의 불확실한 쿠데타 추진 페이스에 말리기 싫었던지 육본 도착 후 수하 헌병감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고, 육본 진입한 지 30분도 안되어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결국 이 때를 기점으로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과 그의 친구이자 막역한 충복 노태우를 비롯한 그 졸개 장교단이 정권탈취의 꿈을 품게 해주었고, 그 첫 시도로 12/12 사태를 발발시켜 계엄사령관으로 올려놓았던 정승화를 긴급 체포한 뒤 전두환을 구심점으로 자기들이 차기 정권 창출의 실세로 급격히 전면에 부상했다.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발표하며 세상에 나타난 당시 합수부 본부장 전두환>
나를 포함한 주위의 많은 이들이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나라들처럼 국격 떨어지게 박통이 하극상에 의해 급사를 한 사실이 좀 아쉬운 구석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야, 어쩌면 철권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적 정치판이 짜지기도 하겠다는 희망도 생겨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전두환 일당의 전면 등장은 일감에 아, 차기정권은 전두환이가 잡겠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전해져 왔다. 이 나라가 아직도 국운이 없어 앞이 갑갑한 군부통치를 또 눈 앞에 두고 있구나 하는 암울함 속에 나는 이 정치적 암흑기간이 얼마나 더 오래 갈꼬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79년 대학원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신촌역 앞에서의 하숙생활
신촌극장 길 건너편에 있던 첫 하숙집은 주인집의 하숙생들에 대한 인간미 없는 쌀쌀한 태도와 자린고비 같던 식단 인심에 한달 만에 나와 신촌역과 형제갈비집 중간 쯤에 위치한 한옥 하숙집으로 옮겼다. 주인장이 양산 출신 할매였는데 성격도 화끈하고 음식인심도 널널하여 아주 맘에 들었다.
하숙방이 마당을 한가운데 두고 4개인가 되어 하숙생들끼리 금방 친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내 룸메이트는 연대경영학과 3년에 다니는 부산 출신의 張군이었는데 이 친구가 나와 죽이 잘 맞아 하숙생활이 모처럼 이문동 시절처럼 흥미진진했다. 연대와 S대 상경계 다니는 저그 부산 친구들도 자주 몰려와 나를 고향선배로 모시며 잘 챙겨주었다.
이 무렵 막내 여동생이 이대 피아노과에 입학해 이대 기숙사 생활을 하며 혼자서나 지 친구 몇을 끼워 내 하숙집에 오라배 알현하려 오면 張이 아주 곰살스레 접대를 하는 짓거리가 밉지 않았다. 여동생이 클 때는 집에서 ‘호박’이라 불릴 정도로 수수한 외모에 성격도 제법 거세고 행동거지도 꽤 왈가닥성이라 내게 얻어맞기도 꽤 했지만, 성장하면서 어느 새 남자들 앞에서 다소곳한 내숭쟁이가 되었는지 기가 다 찰 정도였다.
<대학원 졸업식 때 같이 찍은 여동생>
수도권 대학 물이 보통이 아닌지 외모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피기 시작한데다 피아노 전공녀라는 아우라도 상승작용을 일으켜 한 시즌이 다르게 경매가가 올라가는 듯 했다. 게다가 우리 모친의 영향으로 큰 오라배에 대한 충성도도 꽤 높은 체 하는 자세를 취해 하숙집 후배들에게서 내 위신을 많이 세워주었다.
그럼에도 이 시절이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여자 좋아하는 내게 특별한 인연으로 다가오는 여인은 이상하게 없는 가뭄기였다. 여동생이 지가 좋아하는 기숙사 선배언니라고 한 두명 소개해 줬지만 그냥 지처럼 개성없이 곱게 자란 양가집 규수 같은 타입들이라 그리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때되면 제법 외모 되고 개성 충만한 친구와 만나지겠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대학원과 학부에서 빡센 경영학과 경제학 공부 따라가기도 벅차던 시절이라 원하던 타입의 여인네가 질정없이 쨘 하고 나타날까봐 오히려 걱정하는 체 했다.
2. LG 희성산업 야구팀에 초빙 선수로 합류
‘79년 가을이 되자 외대시절부터 친했던 26회 옥달혁 형이 자기들 LG 그룹내 계열사간 야구리그에 내가 한번 초빙캐처로 뛰어줄 수 없느냐 하는 연락이 와 얼씨구나 하고 합류했다. 옥형은 당시 영어과를 졸업해 4년 내내 상국이처럼 열심히 공부하던 영어실력으로 지금의 LG애드 전신인 희성산업에 들어간 듯 했다.
나와 절친했던 외대시절 26회 선배들인 박복수, 이학기 형과 함께 트리오를 이루었던 옥형은 소속된 희성산업 야구팀의 캐처 포지션이 약했던지 나를 끌여들여 한 게임 뛰게 하며 기존 멤버들에게 합류가능 테스트를 받게 했던 듯 했다. 거기서 안정적인 캐처 포지션 소화능력과 당시만 해도 꽤 다부졌던 배팅실력이 호평을 받아 외래선수로써 입단하게 되었다.
그 후 독일 유학을 갈 때까지 거의 1년 반을 이 팀에서 주전 멤버로 뛰게 되었다. 나로서는 하고 싶던 야구를 규칙적으로 내 돈 안들이고 하게 되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신촌 로타리에서 123번 버스를 타고 1시간 여에 걸쳐 오류동에 있는 유신고 구장까지 가거나 강남에 있는 경기고 구장에서 다른 LG 계열사들과의 게임에 외국인 용병처럼 투입되었다.
옥형은 외대 경남고 야구단에서는 29회 신영주에게 밀려 서드를 맡지는 못했으나 여기서는 빠릿빠릿한 주무 역할의 功을 인정 받아 주전 서드 자리를 꿰차더니 승부근성보다는 말 그대로 즐기는 야구를 하며 시간이 갈수록 야구실력이 늘어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처음에는 사람이 좀 가볍게 까불까불거린다 싶었지만 겪어보니 정말 무게 잡거나 격의 같은 게 없고, 베이스처럼 덩치 큰 장비 4개, 알미늄 배트, 경식 공, 캐처 장비등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 더블백 속에 넣어 시합장까지 챙겨오는 궂은 일을 책임감 있게 도맡아 함으로써 ‘진국 맨’의 이미지로 급속히 바뀌었다.
시합을 이기고 돌아올 때는 둘이서 옥형이 잘 가는 강남이나 이태원 쪽의 바나 클럽에 가서 맥주 한잔 하거나 디스코장 분위기에 한번씩 젖어들 때도 있었다. 하여튼 이 시절 돈버는 옥형이 물주가 되어 어줍짢은 용병관리해 주듯 내게 유흥업소 구경을 많이도 시켜 주었다.
<79~80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12/12 사태와 서울의 봄
‘79년 10/26 사태를 일으킨 김재규가 체포되며 전면에 부상한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신군부들은 자신들이 얼굴마담 격으로 계엄사령관에 올려놓은 정승화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장과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던 전두환을 동해경비사 사령관으로 전보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12/12일 정승화를 체포하는 무장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하극상 반란에 당해 체포되는 육참총장 정승화>
이 쿠데타의 성공으로 신군부 세력은 막강한 정계개편 힘을 갖게 되었고, 당시 ‘쓰리 金’으로 떠오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중 김대중을 제외한 양 김은 혹시라도 신군부가 자기를 국가수반으로 옹립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 ‘80년 2월부터 청렴성과 참신성 경쟁을 추구하며 세력 확산 경합을 벌였다. 매스컴은 이를 두고 ‘서울의 봄이 왔다’고 보도했다.
<12/12 사태 직후 승자 코스프레 하는 신군부>
하지만 이런 봄은 얼마 안 가 미리 김치국부터 먹는 오산과 함께 허망하게 사라졌다. 신군부는 5/17일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긴급 구금한 뒤, 김영삼과 김종필은 각각 구태정치와 부정축재 혐으로 가택연금을 한 뒤 전두환 스스로가 최고실력자로 전면에 등장하게 했다.
나를 비롯해 전국민의 80%는 12/12 사태 이후 이러한 시나리오의 전개를 거의 확신했는 데 반해 김영삼과 김종필은 신군부가 ‘김대중 만은 최소한 안된다’고 은근히 흘리는 시그널을 철떡같이 믿고 가택연금 당일까지 자기들이 간택될 것을 크게 기대했다고 알려졌었다.
2. 이란 혁명의 완성과 레이건 시대 개막
’78년 여름부터 격화된 이란인들의 반 팔레비 시위는 결국 팔레비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팔레비왕이 해외로 망명하게 하고,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79년 2월 해외망명에서 돌아오자 국가지도자로 추대되며 반미 강경파 이슬람 세력이 득세하여 이란내 이슬람 혁명이 완성되었다.
<미대사관 습격하는 이슬람 강경파 군중>
이슬람 강경파는 집권하자마자 반미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미국과 자국영내 상대국 자산동결책을 주고받으며 아라비아해에서 군함 간 무력대치 등 긴장을 에스컬레이트 하다 팔레비 인도 요구를 카터정부가 거부하자 11월 테헤란 미대사관에 난입하여 대사관 직원 50여명을 인질로 삼으며 대사관을 점거했다.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억류된 미대사관 인질>
‘80년 4월 미국은 인질 구출 특공대를 파견했으나 계획 차질과 일기불순에 의한 헬리콥터 간 공중 충돌로 대원 8명이 사망하며 구출작전은 대실패로 중단되어 카터의 미국내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해 대선에서 레이건에 패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인질억류는 계속되다 9/22일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란-이라크전이 발발하자 호메이니가 석방교섭에서 외교적 유연성을 보여 레이건 정부와의 새로운 관계모색의 신호로써 인질인도를 레이건이 취임하는 ‘81년 1/20일 행함으로써 사건 발생후 444일 만에 동사태는 종결되었다.
<공중충돌로 추락한 미특공헬기 잔해를 점검하는 이란 수비대>
나는 당시 미특공대의 구출작전이 8명의 특공대원 사망 피해만 입은 채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대문짝 만한 보도를 국내신문과 방송에서 접하는 순간 ‘참, 카터가 정치 운도 더럽게 없구나. 차기 대통령은 이제 레이건이 되겠구만’ 하고 미대선의 향방을 바로 점칠 수 있었다.
남부 조지아주의 땅콩농장주 출신으로 도덕정치와 인권정치를 내걸며 미국정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얼룩진 워싱턴 정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되었던 카터 대통령은 도덕성은 높았지만 현실정치의 여러 얽히고 설킨 장애들을 정치적 아마튜어리즘으로는 극복하지 못한 채 임기내내 고전했다.
그 결과 현역 대통령으로 대선에 나서 현실정치 표방 속에 ‘강한 미국’ 정책 프레임을 내세운 상대후보 레이건에 패배하는 첫 기록을 세우며 4년 만에 정치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내게는 좀 많이 착잡하게 여겨졌다. 카터의 ‘도덕적 인권정치’ 압박이 한국에서 박통의 18년 철권정치를 종식시킨 계기였다고도 믿어졌으니 말이었다.
3. 5.18 광주항쟁 사건
온국민이 조마조마하기는 했지만 실날 같은 희망 속에 품었던 ‘서울의 봄’을 ‘혹시나 하다 역시’라는 금언대로 ‘80년 5/17일 전두환과 그 일당은 3김을 전격 체포내지 가택연급하며 전면에 권력의 실세로 짠 하고 나타났다. 이들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시키고, 방송계를 장악하며 국가권력 접수를 본격화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던 마오쩌뚱의 어록대로 신군부는 ‘국가수반 옹립’의 헛꿈을 꾸던 김영삼과 김종필을 보기 좋게 내팽겨치고, 박통시대 내내 호남을 제외한 친여권 사회에서 항상 이단적인 반항아 이미지의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김대중을 이 참에 아예 내란선동죄로 몰아 사형까지 시킬 속셈으로 체포 구속하였다.
5/18일 김대중의 정치적 홈그라운드였던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살벌한 비상계엄령 속에서도 ‘김대중 석방과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삽시간에 광주시민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 광주시내 중심가에서 거의 민란 수준의 민주화 봉기로 확대되어갔다.
신군부는 이런 사태를 기다렸다는 듯 맹견처럼 공격성을 키우기 위해 투입 전부터 혹독한 훈련을 시킨 공수특전단 2개 여단을 급파하여 첫날 시위대를 겁주는 위력시위 행진을 했음에도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다음 날부터 다짜고짜 발포와 함께 잔혹한 폭력으로 시위대를 전방위적으로 뭉개기 시작했다.
<위력 탱크시위하는 진압군>
이러한 진압방식에 격분한 광주시민들은 스스로 모이기 시작한 시민군을 구성하여 파출소 무기고에서 탈취한 엉성한 무장에도 한 때 진압군을 몰아내며 전남도청까지 접수했다. 이러한 대규모 반격에 당황한 신군부는 병력을 대폭 증강 투입하여 제 나라 국민을 빨갱이 반군폭도로 몰아 군사작전하듯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공중공격까지 하는 등의 맹공을 펼쳤다.
<5/18 광주항쟁과 시민 총궐기>
시민 방위군이 장악한 전남도청을 중무장한 진압군의 공격으로 5/27일 점거하며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벌어진 9일 간의 광주항쟁은 공식적으로만 근 1,000여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 희생자를 낳으며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민주화 항쟁사에 기념비적인 투쟁으로 기록되며 많은 민주화 지지 한국인은 광주시민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
나는 당시 이 사건이 철저히 보도관제되는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광주에서 5/18일 계엄령 반대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라는 소식을 듣고, ‘야, 광주사람들 참 깡다구 좋네. 이런 서슬 퍼른 계엄령 하에서도..’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음날 신문과 방송뉴스에서 ‘광주 폭도 150~200명 사망 추정’ 정도의 보도만 접했을 뿐 전개되는 진상을 실시간으로는 도저히 갸름조차 할 수 없었다. 80년 대 중반 독일 TV에 소개되었던 현장 동영상 필름과 작가 황석영이 이 사건을 직접 겪었던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인터뷰해 엮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광주 항쟁에 대한 다큐 백서 기록문을 읽고서야 그 전모를 뒤늦게나마 파악했다.
4. ‘이란-이라크 8년 전쟁’ 발발
시아파 무슬림이 주축인 이란 혁명이 완성되며 이라크내 소수 시아파 세력이 사담 후세인의 자국 현대화 기치 속에서 점차 종파적 정체성을 잃어가던 중 호메이니 이란을 믿고 수니파 이라크 집권세력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호메이니 역시 이슬람 혁명 수출을 하려는 입장에서 이라크내 소수 시아파를 지원하자 후세인은 이를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했다.
<전쟁 발발 당시 양국의 국력 개황>
거기다 이란이 이슬람 혁명 속에 미국에서 군사훈련 받은 12,000여명에 달하는 고급 장교들과 조종사들을 처형하거나 투옥하는 바람에 군사력의 질이 한참 떨어졌다. 여기에다 같은 수니파로써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을 한참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우디와 쿠웨이트도 양국간 전쟁시 후세인을 경제적으로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런 상황적 배경 속에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80년 9/22일 단기 전격전을 기대하며 영토분쟁을 빌미삼아 이란 영토로 공격해 갔다. 초기에는 후세인의 예상대로 민병대 수준의 혁명수비대가 주축인 이란군은 국경 공업도시들인 호람샤와 아바단을 내주며 패주를 거듭했다. 하지만 연말에 이르자 호메이니가 투옥시켰던 장교들과 조종사들을 전장에 복귀시키면서 전황은 다시 이란 측에 유리하게 넘어갔다.
<이란-이라크 간 잊혀진 8년 전쟁>
한국전쟁의 양상처럼 이번에는 이란군이 이라크 영내를 넘어서서 진격을 하며 ‘82년 5월에 이르러서는 이라크군이 커다란 군사적 궁지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구 열강과 인근 아랍국들이 이란의 압도적 승리를 원하지 않아 이라크가 버틸 수 있게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했다.
하지만 그 후는 미국과 함께 소련, 한국까지도 양국에 그때그때 전황에 따라 양다리 거래나 지원을 하자 이 전쟁은 거대한 소모적 교착전의 양상으로 굳어져 ’88년 8/20일 UN의 중재로 종전될 때까지 끝없이 지속되었다. 양 당사국을 제외한 전세계에 ‘잊혀진 전쟁’이 되어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처럼 전개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토가 1/4, 인구도 1/3인 이라크가 광신적인 신정국가로 되어가는 호메이니의 이란을 따끔하게 손 좀 봐줬으면 했다. 지금 와서 보면 후세인이나 호메이니나 그놈이 그놈인 독재적 지도자였지만 그 때만 해도 호메이니가 느낌상 고루한 중세적 이미지의 고집불통 영감처럼 여겨져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80년 대학원 시절의 주요 추억들>
1. 포커 게임으로 좀 더 가까와진 원우들
‘80년이 되어 2년차에 들어서는 3학기생이 되었다. 아래 후배뻘인 1, 2학기생들이 생기며 내 주변 원우 범위가 좀 더 풍성해지고, 나도 어느 듯 논문 제출을 염두에 둬야 하는 군번으로 올라섰다.
이 무렵 대위와 소령 계급의 군장교들이 위탁교육생의 신분으로 주간 대학원 수업에 많이 출몰해 참여했다. 아마도 ‘쓰리 許’(허화평, 허삼수, 허문도)를 주축으로 하는 전두환의 졸개 장교단에서 나름 똘똘한 육사출신 중급장교들을 엄선하여 서울대, 연대, 고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과정에 보내 석사쯩을 하나씩 취득하게 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이라 했다.
이 양반들은 평균 연령대가 우리보다 조금 높기는 했지만 계급장 떼고 사복 입고 수업에 들어오니 아무래도 실력이 꿇렸던지 군인티를 애써 감춘 채 ‘절간에 온 얌전한 색시’ 포즈들을 취했다. 요즘으로 치면 각 대학에서 돈벌이를 위해 받아주기는 하지만 열외로 관리하는 외국인 유학생 집단같은 존재들이었다.
아무튼 이 그룹의 등장으로 비군인 그룹 학생들 간에는 ‘민간인’이라는 유대감이 저절로 생겨나 서로 좀 더 가까와지는 계기가 되었다. '80년 봄에 잠깐 찾아온 ‘서울의 봄’이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 집권으로 사라져 버리고, 광주항쟁을 폭압적으로 짓밟아버린 군부세력에 전국민이 분노와 절망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이들과도 수업시간 앞뒤로 일상적인 말은 섞지만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도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는 도반으로서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차에 집안이 꽤 있어 보이는 민간인 2학기생 하나가 웬일로 나를 비롯해 연대 경영학과 졸업 성골들이 아닌 타대학 출신 원우들을 자기 생일이라면서 저그 집으로 초대하는 게 아닌가.
가보니 평소에 저그끼리 자주 어울리는 듯 싶은 성골들도 많이 와 있었다. 깔끔하게 차린 가정식 뷔페를 대접받고, 고급 양주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며 얼큰해지자 그 그룹 좌장인 듯 짐작되던 친구가 이제 연령이 한 두 살 차이인 학기생끼리는 말도 트고 편하게 지내자고 제의했다.
그러자고 했더니 이 친구가 그렇다면 자기들이 모일 때 항상 하는 포커게임에 동참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억지춘향 격으로 저그가 자주 한다는 ‘하이 로’ 포커게임판에 끼어들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는지 이 친구들의 각본이었는지 첫날은 내가 제법 많이 땄다.
그로부터 며칠 후 포커게임이 또 있으니 시간되면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지난 번에 딴 것도 있고 해 재분배 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수락했다. 아그들 상당 수가 집안 좋은 자제들인데다 범생이 기질도 많아 포커게임을 지독한 블러핑 구사 같은 것 없이 거의 패 나오는 대로 따고 잃는 식으로 행해 나같이 잡기 감각이 무딘 친구들도 한 몇 만원 들고 제법 오래 버텨볼 만 했다.
돈놓고 돈먹는 살벌함 보다는 그냥 화기애애한 사교모임의 성격이 더 짙었다. 조교들이 많아 저그 교수들 근황과 앞으로 대학원 경영학과가 어떻게 운영될 거라는 정보들, 그리고 인근 서강대와 이화여대와의 학점 교환제로 연대 대학원 수업에 들어오는 이들 대학 원생들(특히 여학생)의 프로필에 대한 얘기들이 게임하며 서로 공유되니 이 모임이 그런대로 쓸모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80년 여름부터 그해 가을이 다 갈 무렵까지 나라 전체는 전두환 정권의 대학가와 언론계에 대한 극심한 탄압책이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의 인너서클 패거리들은 부유층 출신 경영학도들답게 시국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보다는 미국유학 정보나 교환하면서 사교포커 게임으로 시대의 우울함을 애써 우회하려는 듯 했다.
나 역시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全정권의 폭압적 몬도가네성에 관념적으로는 비판을 가하면서도, 실제로는 한국사회에서 유망대학의 대학원생이 누리는 학문적 성장경로나 취업경로에서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외형적인 저항의지는 한번도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가까운 장래에 외국 박사쯩을 어떻게 하면 건지느냐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2. 독일유학에의 꿈이 생기다
’79년 2학기에 ‘조사방법론’이라는 과목을 들고 와 논문 쓸 석사나 박사과정생들은 필수로 듣게 한 오세철 교수는 정구현 교수만큼이나 연대 대학원 시절에 만난 인상 깊은 양반이었다. 진보적 성향에서는 온건보수적인 정교수를 훨씬 뛰어넘는 골수 좌파였다.
이 양반 부친이 우리나라 불문학계의 거목이라던 오화영 교수였고, 누나도 당시 유명 문필가였던 오세령 교수였다. 가족의 학문적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력도 유복한 집안 자제가 사회학과 심리학 공부를 미국에서 박사쯩 딸 정도로 오랫동안 파고들다보니 요즘의 ‘강남좌파’처럼 강한 진보성향 학자로 자리매김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때만 해도 정교수의 자유시장주의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여 오교수의 좌파적 학문세계에는 한 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 양반이 학부에서 했던 ‘인사관리’ 파트와 많이 연관된 ‘조직행동론(OB)' 강의를 청강하고서는 이 강좌가 경영학을 넘어 사회학과 심리학, 그리고 유럽의 사회사상사까지 아우르는 데 대해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는 지적 호기심을 계속 억누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부 시간에 나눠준 ‘조직행동론’의 강좌 커리큘럼에 소개된 필독서 리스트에 나온 여러 저자명과 그들의 주요 저서나 페이퍼 텍스트들을 살펴 보니 독일어권 학자들의 이름과 독일어 원서 타이틀이 병행된 영어 번역물로 옮겨져 있지 않은가.
갑자기 신촌 오며 한 1년 이상 망각되었던 독일어가 불현듯 다시 떠올랐다. 천하의 오교수도 못읽는 독일어 원전을 나는 읽을 수 있는 언어적 무기를 지금은 무디지만, 이제 다시 벼룰 수 있는 기반은 있다 생각하니 독일어와 독일이란 나라가 새삼 그리워졌다.
드디어 ‘80년 봄학기 대학원 수업에서도 ‘조직행동론’ 과목의 세미나식 강좌가 제공되었다. 나는 이 무렵 오교수가 학부 수업에서 읽어보라던 미국의 미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의 주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후기 산업사회’를 도서관에서 빌려 살펴 보았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탈산업시대의 도래' 저자 다니엘 벨(1919~2011)>
전자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예를 들어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크게 없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실현 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가치체계와 신념‘ 같은 것인데, 유럽의 경우 오랜기간 지식인 사회에서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떠받들려져 왔었다.
하지만 70년간 이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테스트되고 있는 인권유린적인 소비에트 체제를 보더라도 이제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신성불가침성이 무너지는 것이 확연하다며 마르크스 사상을 비판하였다.
후자에서는 선진국 사회가 ‘산업이전기’와 ‘대량생산 산업기’를 거쳐 지식과 정보가 사회를 지배하는 ‘탈산업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는 미래전망을 내놓았다. 70년대에 이미 이런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보인 것이 참으로 놀라왔다.
80년대를 강타한 엘빈 토플러의 저서 ‘제3의 (정보) 물결’과 90년대에 나와 큰 반향을 얻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언’ 같은 책을 통해 그의 탁견이 상당부분 옳았다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나는 다니엘 벨의 책에서 자주 언급된, 유럽지식인 사회가 오랫동안 흠모해 왔다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언젠가는 한번 역으로 추적해 보자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까지는 냉전시대의 논리 속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에서 펼쳐지는 이 양반의 전체 세계관에 대한 실체적 조망은 없이 아주 부분적인 측면들만 견강부회식으로 비판함으로써 이 사상이 근본적으로 오류투성이의 옳지 못한 혹세무민적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배워왔었기 때문이었다.
<H. 스튜어트 휴즈의 명저-의식과 사회>
아무튼 나는 오교수의 이 수업을 계기로 H. 스튜어트 휴즈의 역작 ‘의식과 사회’를 통해 1890~1930년 사이에 있은 뒤르켕, 소렐, 마르크스, 베버, 그람시, 크로체, 프로이트, 융 등 기라성 같은 유럽 사상가들의 주요 사상 내용과 그것들이 배양되었던 시대적 배경 및 사상 논쟁들이 펼쳐지는 것을 처음으로 살펴보고는 이런 지적 향연이 펼쳐지는 책에 대해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이런 사상가들이 난무했던 본고장인 유럽대륙에 대한 동경심은 독일로 더 좁혀져 마르크스와 베버를 배출한 이 나라를 살아 생전에 꼭 한번은 체류해 보고 싶다는 결심을 결정적으로 굳게 해 주었다.
친해진 원우들로부터 ‘누구는 이번 가을에 미국 무슨 대학으로 어드미션 받아 떠난다 하더라’ 하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아그들아, 나는 너그가 감히 꿈도 못꾸는 독일쪽으로 갈거다’ 하고 혼자 곧 갈거인 양 자부심에 차 뿌듯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이란 나라에서 사회사상사나 경제학설사가 아닌 경영학이란 전형적인 미국적 학문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의심이었다. ‘아무렴 독일이 경제대국인데 경영학의 수준도 미국만큼은 안될라고..’ 하며 독일 가고 싶은 마음에 의심을 스스로 지우기도 했다.
그런데 걱정하는 것은 꼭 나타난다는 ‘머피의 법칙’대로 80년대 독일대학에서 제공된 경영학 분야 커리큘럼은 미국대학의 최신 경영학 사조가 거의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한국 상위권 대학들에 비해서도 많이 보수적이고 구닥다리 분야가 여전히 병존한다는 사실을 유학 가서야 알았다. 대신 경제학 분야는 야무져 이쪽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시절에 대한 총 소감>
‘79~’80년까지 지속된 이 시절은 나라 전체로나 내 개인적으로나 커다란 전환점들의 연속이었다. 이문동 시절을 마감하고 신촌에서 새로 시작된 대학원 생활은 내게 독일 유학이라는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고, 10/26 사태로 인한 18년 간 독재자의 철권통치 종료는 잠깐의 ‘정치적 봄’ 꿈을 꾸게 한 뒤, 12/12 사태와 5/18 광주 항쟁사건으로 연결되어 이 나라를 다시 기나긴 정치적 암흑기로 가게 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이란으로 대표되는 서구 기독교와 중동 아랍-페르샤 이슬람교의 종교문화적 세계관의 충돌이 가시적으로 본격 격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현상의 현대사적 효시로써 떠오르기도 했다.
이 테마를 다루며 90년대 초에 나온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란 책이 그 도식적인 대립구도 설정으로 폭넓은 종합적 고찰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이 두 종교 간 대결 양상은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그 결말이 올 것 같지 않은 계속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으리라 여겨진다.
내게는 경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세계에 매진하면서 거기서 발견된 국제경제학과 국제경영학을 특별한 관심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또 다른 분야인 조직행동론을 만나 거기서 파생된 서구사상사와 인문학적 세계에도 자연 접속되다 보니 이쪽의 본산인 유럽대륙과 그 안에서 또 핵심국가로 일컬어지는 독일이라는 나라로 언젠가는 유학 한번 가야겠다는 논리적 귀착점을 발견하게도 해주었다.
이 무렵 내가 박사쯩을 따고 싶었던 국제경영학 분야의 커리큘럼이 독일대학에서 과연 제대로 제공될까 잠깐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 시절에 발생했던 여러 사건들이 모여 내게 끼쳐진 운명의 힘은 ‘일단 Go!’라는 신호를 주는 것 같았고 나는 그쪽에 베팅을 걸어 독일행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믿게 되었다.
'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기견’ 같다는 소리를 들었네요 (0) | 2018.09.30 |
---|---|
평생 ‘금의야행‘하는 김재민 곁에서 (0) | 2018.08.26 |
15. 새로운 도약이 필요하게 된 대4 시절 (0) | 2018.08.10 |
14. 내공 함양으로 뚜벅뚜벅 가던 대2~3 시절 (0) | 2018.07.30 |
13. 독일사랑과 대학진입이 흐뭇했던 대1 시절 (0) | 2018.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