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체험기

몽골 탐방기-3/3

백조히프 2019. 3. 8. 20:52

몽골 탐방기-3/3

 

 

2019. 3. 8

 

여러분, 본 탐방기 마지막 편을 남겨 놓고 지난 주말(3/1~3/3) 대학동기 동계모임이 열린 속초별장을 3번째 다녀왔고, 이번 주에는 학교 개강 시즌이라 학생들과의 미팅 등으로 이리저리 탐방기 마무리 지을 형편이 못되었심다.

 

그럼에도 제 독자들과의 약속이기에 몽골여행에서 막 돌아온 현장감은 좀 사그러 들었지만 기억을 쥐어짜 마지막 마무리를 지어볼까 하네요.

 

게르에서의 새벽달 기상과 마무리 철수

 

전날 늦은 밤까지 대화하던 동료들을 뒤로 하고 좀 일찍 침상에 든 탓인지 다른 이들보다 약간 일찍 일어났다. 물론 한 밤중에 두 번인가 노상방뇨를 하기 위해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때의 시리던 겨울 밤 기온에서도 게르 내 열기에 휩싸이다 나와서 그런지 파자마 차림의 허술한 옷차림에도 잠깐 동안은 별 냉기를 느끼지 못했다.

 

 

<게르 밖 새벽녘 보름달>

 

하지만 제법 멀리 떨어진 화장실의 3개 밖에 없는 양변기 중 하나를 선점하기 위해 5시경 눈떠자마자 파커와 털모자로 무장한 채 세면도구 챙겨 집어들고 곧장 게르를 나섰다. 걸어가는 길에 게르 구역 뒤쪽 언덕을 보니 넘어가기 직전인 새벽달이 떠억 걸려있었다. 휴대폰 카메라에 횡재한 듯한 그 광경을 담아놓지 않을 수 없었다.

 

참 그럴 듯한 정경이었다. 여명 속에 굽어 본 몽골의 눈 살짝 덮힌 초원 역시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하나의 뚝 떨어진 비현실적 격리공간처럼 소담스러운 신비감을 마구 풍겼다. 또 한번 대자연의 본질적 속살을 이 어울리지 않는 화장실 변기 찾아가는 길에서 예상치도 않게 만나본 듯 하였다.

 

다행히 남자화장실에는 그 순간 아무도 없어 마음에 드는 위치의 해우소를 찾아 커다란 숙원사업 해치우듯 편안하게 일을 보았다. 더없이 흐뭇한 기분으로 나오니 그제서야 같이 새벽잠 없는 아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느긋한 맘으로 옆에 있는 세면대에서 칫솔질 하고 머리까지 감고 나자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게르로 돌아오자 늦게 잔 친구들도 모두 기상해 침소를 대충 치우며 내게 화장실 상황을 물었다. 하나 밖에 없는 샤워실 샤워만 포기한다면 아직 방문객 밀도가 그리 높지 않으니 지금이 그래도 방문 적기라고 전해주었다. 모두 비상 걸린 것처럼 후다닥 튀어 나갔다.

 

식당에서 어제 저녁과 같은 메뉴로 30분 간의 식사를 끝내고는 게르로 돌아와 각자의 짐들을 최종 건사하고는 대기시켜 놓은 버스에 올라탔다. 퉁퉁한 용모의 몽골인 기사가 목례해 주고, 게르촌에서 같이 1박한 유나가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유나는 우리가 착석하자 오늘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울란바토르로 가는 도중에 칭기스칸 기마상을 잠깐 방문하며, 시내 도착해서는 첫날 묵었던 J-호텔에서 다시 1박하기 위한 짐을 풀며 좀 휴식한 뒤 점심을 하고, 오후에는 쇼핑 장소 두 곳 탐방과 몽골 국립예술극장에서 전통 가극을 감상한다는 일정이었다. 그리고는 한국 레스토랑을 찾아 김치찌개 저녁을 마치면 공식일정은 마친다고 전했다. 마지막 날 아침은 아무 일정없이 칭기스칸 공항으로 직행한다고 덧붙였다.

 

칭기스칸 기마상 방문

 

게르촌을 뒤로 하고 기마상 자리까지 가는 도중에 본 몽골의 자연은 겨울이라 좀 삭막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처연한 듯한 정취도 간간이 보여주었다.

 

현대중공업 시절인 200712월 남북협력단 사업으로 평양을 방문해 원산까지 가는 버스 길에서 본 북한의 한적하면서도 뭔가 안된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던 그 풍경 분위기가 여기서도 오버랩 되어졌다.

 

유나도 집이 아닌 곳에서의 하루밤 유숙이 불편해 휴식겸 눈을 붙였는지 별 말이 없었다. 기마상 지역이 가까워져 오자 이 기마상에 대한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은 어느 몽골 실력자의 사유지이며, 유나식 표현으로는 한국의 에버랜드처럼 뭔가 볼거리 조성을 해 방문코스화 함으로써 자신의 소유지 땅값을 올리려는 의도가 깃들여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초거대 칭기스칸 기마상>

 

2010년 몽골제국 800주년을 기념해 은백색의 스테인리스 철로 아래 받침대 건물(박물관) 높이 10M, 기마상 높이 40M의 조형물을 건설했다고 했다. 기마상의 왼쪽 열린 공간에는 몽골 기마병들이 달리는 활동 조형물이 6기 정도 배치되어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바빠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몹시도 추운 바깥에서 입김을 내뿜으며 증명사진들만 한동안 찍었다. 유나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칭기스칸의 채찍, 갑옷, 투구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했다.

 

 

 

<칭기스칸 기마상 광장과 충견> 

 

추운 날씨속 초원의 열린 공간에 휑덩그레하게 우뚝 세운 기마상이 민족적 유서가 어렸다고 보이는 문화적 유물 대신, 어째 디즈니랜드 같은 데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 같이만 여겨졌다. 그 전날 봤던 대형 돌거북상과 비교해 자연적인 진품이 풍기는 아우라 같은 것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허장성세적 인공 모형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오니 다시 매연과 교통혼잡으로 많이 답답했지만 다행히 숙소인 J-호텔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 방배정을 받고, 짐을 푼 뒤 점심을 하고는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오후에 들린 쇼핑장소는 몽골에서 제일 큰 ‘GOBI’라는 양모 캐시미어 제품 총판장이었다. 유나가 이곳과 국영백화점에 들려 쇼핑하는 것이 오후의 주요 일정이라고 버스 안에서 소개했지만 아무도 큰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며칠 간 쌓은 유나에 대한 우리 일행들의 호감 때문에 결코 속들여다 보이는 엉터리 바가지 상술은 아닐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시미어 판매 전문점 고비(GOBI)와 국영백화점 쇼핑

 

먼저 GOBI 총판점에 들렸는데 도회적 화장과 옷차림의 여판매원들이 고객접대를 했는데 서울의 어느 쇼핑마트에 들린 것 같은 분위기와 흡사했다. 몽골화폐 ‘100 투그릭은 우리 돈 ‘46에 해당했는데 여기서는 그냥 투그릭 정찰가의 반 값으로 원화 환산이 되었다.

 

<울란바토르 시내지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캐시미어 제품들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아줌마 일행들은 마치 신천지에서 사냥감 포획하듯 대규모 쇼핑에 몰입하는 듯 했다.

 

나는 이번에 특가상품 여행 같이 가자 권유했으나 편의점 본부에 눈치 보인다고 예의 A형 소심증을 발휘해 가게나 지키고 있을 박점주가 생각나 목도리나 하나 위험부담 없이 사려 둘러보았다. 촉감도 좋고 가격도 아주 맘에 들었지만 색상이 어떤지 몰라 와이파이가 되는 매장에서 카톡사진 전송으로 와이프와 교신을 했다.

 

 

<GOBI 매장에서 캐시미어 목도리 고르기> 

 

이 인간이 죽을 때가 다됐나, 생전 안하던 짓을 하니 처음에는 내 안목을 믿지 못해 됐고하며 시큰둥하던 와이프가 계속 날라가는 물건 사진들에 대충 눈치를 긁고서는 옅은 청색 계통으로 가격 좋거든 하나 골라 와봐라하는 지령을 내렸다. 아싸 하고 하나 잡아 가격표를 보니 54,000 투그릭이고 우리 돈으로 약 27,000원이었다.

 

계산 카운터에서 연말 정산을 위해 우리의 계산서를 받아 모우던 유나에게 물으니 한국돈 보다 비자카드로 지불하는게 환율상 더 유리하다고 조언해줘 바로 그렇게 했다. 쪼잔한 내 계산서보다 손 큰 아줌마 고객들의 큰 금액 계산서를 많이 확보한 모양인지 유나의 표정이 제법 밝았다.

 

<국영백화점 전경>

 

GOBI 판매장을 나와서는 버스로 좀 이동하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큰 국영백화점에 도달했다.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백화점 같은 규모의 백화점 내로 들어서니 물건들 진열과 매대 운영 방식이 우리나라와 거의 흡사했다.

 

한교수는 독일제 원두커피 팩과 오늘 저녁에 마시고 한국에도 선물용으로 가져갈 몽골 보드카 사러 간다고 다른 일행들과 그 코너로 달려갔다. 나는 어쩌다가 혼자 떨어진 채 몽골 가죽 기념품 코너들을 돌아다니다 또 캐시미어 제품 코너로 들어섰다.

 

 

<백화점 내 벽걸이 가죽제품 둘러보기> 

 

아까 GOBI에서 목도리 하나 샀지만 뭔가 허전해 하나 더 고르기로 했다. 이리 싸보이는 물건을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나 여겨져 쭈욱 살펴보니 이번에는 연분홍 색이 그럴 듯 했다. 박점주에게 사진을 전송하자 고객접대 중인지 좀 있다 아까 고른 걸로 됐고, 요건 얼핏 보니 숄 끝모양새가 못하다하고 구매에 브레이크 거는 답신이 왔다.

 

<백화점에서 목도리 하나 더 고르기> 

 

하지만 내가 누군가. 하지 말라는 것 하는 재미로 살아온 차제에 니가 안하면 누구 선물용으로라도 해라하는 마음으로 바로 구입했다. 아까 것보다는 몇 천원 더 비싼 33,000원 가격이었다. 한국 오니까 정작 이 물건이 더 맘에 든다며 자기가 가지고, 자기가 고른 옅은 청색은 내게 던져주었다.

 

백화점 1층에는 큰 아들놈이 다니는 CJ뚜레주르제빵 매장이 있었다. 같은 제품에 대한 가격은 한국보다 좀 쌌지만 이곳 물가수준에서는 엄청 비싸겠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잘 차려입은 젊은층 몽골고객들이 심심찮게 들리는 것으로 봐서 여기도 한류덕을 제법 보나 싶었다.

 

나는 사고싶은 물건도 샀고 해서 아이쇼핑이나 하자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제과 코너로 들어섰는데 하리보등 독일제 과자와 함께 한국제 롯데 초콜렛과 오리온의 초코파이류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나는 몽골 현지제품에 눈이 가 옛날과자사듯 이곳에 들린 기념으로 유가류와 젤리류의 제품 두 봉지를 한국돈 2500~3,500원 씩에 샀다.

 

버스에 돌아와 우리 일행들에게 나눠주니 좀 많이 달아 두 번째 줄 때는 모두 사양하는 것이었다. 마치 6, 70년대 한국 옛과자류가 무조건 단맛을 많이 나게 만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10여년 전 평양 고려호텔에서 구입했던 북한 과자맛들도 이런 식이었는데 사람들이 자본주의 과자 맛에 서서히 길들다 보면 이곳 과자들도 당분을 왕창 줄인 은은하고 세련된 당도의 제품들로 변해갈 것이라 여겨졌다.

 

몽골 전통민속 공연 관람

 

백화점을 나와서는 한 두 블록 더 버스로 가 국립민속예술극장에서 하차했다. 명동에 있는 옛 국립극장 건물 같은 곳이었는데 들어가니 늘씬한 러시아 혼혈미녀 같은 친구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도 사진촬영은 티켓을 끊어야 한다기에 이번에는 공연에서 찍을 것도 많으리라 여겨져 다가가 가격대를 물었다.

 

미녀가 돈내고 사진 찍겠다는 자세가 가상해 보였는지 환한 미소를 띄었지만 한국어와 영어는 안되는지 유나를 통해 사진촬영은 1만원, 동영상은 2만원이라 했다. 물가수준에 비해서는 조금 쎄다고 느꼈지만 유나도 있고 해서 호쾌한 척 1만원짜리를 구입했다. 배터리가 조금 밖에 남아있질 않아 2만원짜리 동영상 촬영은 무리였다.

 

<공연 시작하기 전 관객석 내부> 

 

공연장에 들어서니 일반 관객들은 별로 없고 우리 일행 33명을 주 관람객 대상으로 펼쳐주는 특별공연인 듯 했다. 옵션이라 입장가가 30불이라 했는데 내용이 상당히 알찼다. ‘이라 명명된 탈춤놀이로 먼저 시작되었는데 우리네 탈춤문화의 원조인 양 아주 흡사한 탈모양이며 음악, 그리고 놀이 동작들이 거의 낯설지 않았다.

 

 

 

 

 

 

<기절초풍할 아크로바트 기예 동작>

 

다음에는 아크로바트적인 기예공연이 펼쳐졌는데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이제까지는 중국교예단의 아크로바트 동작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몽골 무용수들을 보니 참으로 세상은 넓고, 알려지지 않은 최고수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그마한 중국무용수들보다 키도 크고 신체적 볼륨감이 있는데도 어찌 저런 동작들을 저리도 우아하게 보여주는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마두금 연주가 포함된 8인 협주단>

 

그 다음에는 화려한 전통복식으로 치장한 몽골 전통 악주단의 대협연이 있었는데 한 두명을 빼고는 그저 한국인 연주자가 들어선 것처럼 인상이 아주 흡사했다. 이 나라의 전통악기라는 마두금은 우리의 해금과 비슷하지만 더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는 멋들어진 악기 같았다.

 

<남가수의 흐미 열창> 

 

공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며 드디어 기다리던 흐미’(Khoomei) 창가 공연이 시작되었다. 몽골 서부쪽 유목민들이 부르던 민요인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창법이고, 고도의 훈련을 거친 숙련된 가수는 더 많은 성부를 표현할 수 있다 했다. 이곳 무속인들이 제를 올릴 때 대자연의 바람과 강물 소리, 그리고 동물울음 소리 등을 흉부에 저장한 듯 초저음 배경음으로 뱉어내면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흐미 창가의 실제 동영상> 

 

아무튼 일반인에게는 그 발성이 신비스럽조차 했는데 우리 눈에 비친 튼튼한 몸매로 좋은 울림통을 가진 남자가수가 온 극장을 울릴 정도로 전율스러운 베이스 창법을 구사하니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가수를 비롯한 몽골의 전문 예술가수와 무용수들이 우리 이 한 줌 밖에 안되는 졸판 관객들을 위해서도 최선의 프로정신으로 자국문화를 보여주려는 데서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아리랑 열창>

 

후반으로 넘어가며 다소곳한 표정의 여가수가 우리의 아리랑을 청아한 발성 속에 능숙한 꺾기도 구사하며 서비스 공연을 해주니 좀 그럭저럭 관람하던 우리의 아저씨, 아줌마 관객들도 드디어 가슴이 벅차는지 열화같은 박수 속에 우레와 같은 앵콜을 크게 외쳐댔다.

 

 

<중앙아시아식 군무>

 

 

 

<공연 휘날레 인사>

 

마지막 피날레인 중앙아시아 계통의 템포 빠른 코삭크식 힘찬 율동의 군무를 펼치자 모두들 나와 함께 같이 뿅 가버렸다. 작별인사 하러 모두 나온 전체 출연진에게 그야말로 손바닥이 터질 정도의 박수 세례를 퍼부었다.

 

J-Hotel 방에서의 마지막 보드카 환담

 

공연장을 떠나서는 호텔 근처에 있는 한국 레스토랑을 찾아 마지막 방의 저녁 만찬을 김치찌개 메뉴로 했다. 서울에서 2000년대 초에 왔다던 주인 아저씨가 정갈한 밑반찬으로 우리 여행객들의 입맛을 크게 일으켜 주었다.

 

방에 들어와서는 이번에는 우리 방에서 한교수와 김선생을 초대해 마지막 환담자리를 만들었다. 한교수는 낮에 국영백화점에서 여러병 샀던 칭기스칸 보드카를 각자에게 배분하고, 오늘 저녁에 마실 보드카 병 중짜와 대짜를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노가리 타임 셋팅을 마무리 했다.

 

세사람은 이번에 아주 괜찮은 특가여행건을 물어온 한교수의 눈밝음에 커다란 치하를 하고 전날 밤 게르에서 펼친 얘기들의 후편을 이어 갔다. 김선생은 나의 독일생활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며 그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

 

나는 독일유학 생활은 세월과의 싸움같다고 전하고 어어 하는 사이에 세월이 후딱 지나가 마치 인공위성 타고 있는 우주조종사처럼 일상적 시간이 지구보다 훨씬 늦게 가는 듯한 체감 속에 세월을 보낸다고 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그냥저냥 6~7년을 바로 보내고, 그 다음에는 보낸 세월이 아까와서 바로 보따리 싸지 못하고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길을 식솔까지 먹여 살리며 헤쳐나가야 했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선생은 자기가 못가본 길을 가본 내게 그 어떤 경외의 눈길을 보내었고, 애살 많은 한교수도 집안을 일으켜 세울 부담만 없었다면 자기도 독일유학 바로 가서 박사쯩 하나 땄으면 했는데, 여의치 않아 한국외대에서 통역대학원 마치고 부산에서 전임강사로 시작한 35년 대학교수 생활이 2% 아쉽지만 걸어온 역정에 대한 후회는 결코 없다고 했다.

 

염사장은 대학시절에는 공부와 담쌓았으나 막상 졸업하고 재력있는 부친이 연결시켜준 중소기업에 들어가 부대끼다 보니 일은 적성에 맞았지만, 어느 순간 좀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하고 싶어 미국유학을 모색했고 LA를 거쳐 북쪽 시애틀에서 정보공학 공부를 시작했다 했다.

 

그러다 부친의 부름을 받아 학업을 잠정 중단하고 귀국하면서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중간단계들을 뭐라뭐라 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기억이 좀 가물거려 섣불리 묘사하기가 조심스럽기에 염사장 얘기는 나름 굴곡이 있었다는 인상만 챙기고 이쯤에서 중단하는 것이 옳겠다.

 

아무튼 이 밤도 마지막 얘기꽃에 술이 더 잘 들어가는지 나 빼고 세명이서 보드카 2병을 모두 다 시원스레 해치웠다. 그렇게 울란바토르의 세 번째 밤은 깊어갔다.

 

일행을 위한 유나의 버스내 마지막 개인기 공연

 

아침에 기상해 호텔식당에서 마지막 아침을 한 뒤 짐을 싸서 방을 떠났다. 그 전에 로비에서 유나를 보고 잠깐 얘기를 나누는데 옆에 있던 한교수가 두사람 기념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는 기특한 제의를 했다. 나도 답례로 유나와 한교수가 함께 한 한 컷을 찍어주었다.

 

<유나와의 작별 컷>

 

유나가 제법 섭섭해 하는 것 같아서 버스에 올라탔다 나 혼자 다시 내려 유나에게 아그들 과자값 하라고 달러 OO불을 전해 주었다. 몹시도 고마워 하며 몽골에 꼭 한번 더 들려달라고 했다. 그리 하겠다 하고 버스에 올라타니 다른 아줌마들도 유나에게 고마움의 금일봉들을 전하는 것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유나는 자신의 성장과정과 한국과 맺은 인연을 슬금슬금 펼쳤다. 자신은 울란바토르 근교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아빠를 일찍 여윈 채 모친과 함께 지내다 울란바토르대 한국어학과에 진학했다고 했다. 여기서 4년 졸업할 때까지는 문법 정도 밖에 모르다가 한국기업에 들어가고, 아르바이트 관광 가이드 일을 하고서야 일상적인 한국어 회화실력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나 타임 1>

 

그러다가 알게 된 몇몇 한국인들과의 인연으로 2007년도 경 전라도와 부산 지역을 각 한 두달씩 단기 방문할 기회도 있었다 했다. 이때 어느 한국인이 유나에게 접근해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KBS ‘미녀들의 수다프로에 출연 섭외를 해주겠다 해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까지 했는데, 그 친구가 체류허가와 섭외비용조로 2만불을 요구하는 바람에 한국행 출연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나름 가슴 아팠던 얘기도 전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한국인은 어쩌다가 한번 정도 만났을 뿐 다른 한국인들은 모두가 자기에게 고마운 사람들 일색이었다고 하며 잠시 무거웠던 우리 일행의 심기를 풀어주는 화술의 지혜도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령인 내몽골 얘기가 나오자 그곳 인구의 10% 밖에 안되는 몽골계 주민들의 몽골어 억양이 마치 북한사람들이 쓰는 한국어 같다고 했다. 울란바토르에도 북한 대사관과 북한 식당이 있는데 거기 가면 평양출신 도우미들이 남한 손님들을 맞아 손님, 안녕하십네까? 오신 것을 동포의 정으로 환영합네다라고 하는 억양을 여러번 들었다고 전했다.

 

<유나 타임 2>

 

노래 쇼를 할 때는 항상 초장에 시작하는 반가압쓰음네다~ 반갑쓰음네다~’ 하는 노래 억양을 그럴 듯 하게 흉내내어 우리 일행이 배를 잡고 웃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 식당 도우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왔기에 팁같은 것은 안받겠지하는 어느 남한 손님의 말을 슬쩍 듣고는 한 도우미가 음식 들고 지나가며 손나팔로 우리 식당은 고저 팁 사양 안하는 곳이야요~‘ 했다는 일화를 전할 때는 모두 , 저런 기 있노하고 유나의 발군 개인기에 포복절도를 했다.

 

공항이 가까워져 오자 유나는 일행에게 작별의 아쉬움을 한국가요 2곡으로 전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선희의 인연을 여러번 불러본 듯 아주 진정성 있게 감정 넣어 불러주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쿵 내려앉힐 정도로 말이었다.

 

사람들이 흐억 하고 있을 때 두 번째 선곡이라며 장윤정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를 뽕삘 가득 묻혀가며 간드러지게 또 열창했다. 마누라들이 옆에 있어 호감표시를 제대로 못하고 있던 아재들도 여기서는 빵 터지는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내뿜었다.

 

드디어 유나 타임이 끝나고 공항에 도착했다. 모두 34일의 특가여행에 만족하며 검열대 앞에 줄을 섰는데 여기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해 준 유나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꼭 한번 여기 다시 방문해 주세요!’ 하고 손을 흔들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교수 말로는 또 다른 한국여행팀이 도착한 것 같으니까 그 사람들 가이드해 주려 바로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몽골 여행의 마무리 인상

 

생각도 하지 않다가 특가상품이 나왔다기에 친구 따라 강남가는 기분으로 서둘러 짐챙겨 떠난 여행이었다. 대충대충 준비하여 떠난 여행에서 대박을 만난다더니 이번 여행이 바로 그 짝이었다. 재작년 호치민-하노이를 다녀온 67일의 베트남 가족여행과는 달리 가성비가 엄청 쏠쏠한 여행이었기에 그 만족도가 더 컸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떠나기 전에 몽골에 대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미리 공부 좀 한 뒤 현대 몽골의 현재상을 눈으로 직접 살펴볼 수 있었던 상황이 너무 그럴 듯 했다.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진 몽골인들이라 그런지 현지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 나라)라 부르며 품고 있는 커다란 애정과 한류에 대한 동경심을 확인한 것도 참 반가왔다.

 

13C 몽골 대제국의 영화를 누리다 서서히 하강곡선을 타면서 17C 청조에 의해 200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아서 그런지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장난이 아님을 알았고, 1911년에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구소비에트의 도움으로 친소비에트적 사회주의 국가노선을 한 80년간 펼쳐왔음도 처음 제대로 확인했다.

 

1990년 구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며 이 나라도 최초의 민주적 자유선거에 의해 92년부터 제 1당인 몽골인민혁명당’(60% 지지율)의 주도 하에 한 40%에 달하는 다양한 민주 세력들과 소연정과 중연정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책공부를 통해 아울러 살필 수 있었다.

 

우리의 60년대 수준으로 보이는 1차산업(목축업)과 가내수공업 위주의 산업구조 및 수도권에 집중된 개발 인프라를 갖추었지만, 좁아터진 곳에서 복짝거리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국인들이 여러 방면에 진출해 국토 전체를 아우르는 개발노선을 강력 추진하려는 현 몽골 정부와 다양한 윈-윈 협력을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가능성을 이번 여행에서 내내 찾아보았다.

 

이러한 가능성이 발견된다면 이를 기반으로 우리 정부와 강소기업들이 좀 더 전향적으로 이 나라에 진출하는 전략을 펼친다면 베트남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역에 아주 괜찮은 경제교두보를 선점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잠재력이 충분함도 함께 확인하였다.

 

슬렁슬렁 다가갔다 몽골인의 웅혼한 역사와 문화도 살펴보고, 이들의 한국 바라기애정이 그냥 한류 때문이 아닌 이웃국 중국과 일본에 대해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 때문에 더 절실함을 확인한 이번 여행은 이래저래 당분간 내게는 적지 않은 인상으로 제법 오래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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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철 19.03.09. 02:11
주말인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박사의 몽골여행기 종편이 성의껏 올려져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특가 여행을 같이 다녀온듯한 내밀함이 느껴집니다.

일단 누구말대로.. 일빠를(?) 해놓아 봄미다. 쓸말은 많으나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만 총총..^^
 
김재민 19.03.09. 12:07
이번에는 서토가 아다리 되어 1빠로 댓글 보시해 주는구료. 그 성의에 감사하는 바임다.. 서토 우물쭈물도 흥미롭게 보는 중이니 계속 그쪽 얘기도 많이 읊어주시구랴.. 항상 든든하게 여기외다.
 
 
지흥석 19.03.09. 04:26
와..
문장 하나하나가 다 감칠맛이 있습니다. 사실과 지성과 정서가 잘 어울려 섞여있어 특별한 맛이 있습니다.
특별히 잘 쓰신 글로 생각됩니다.
제가 무슨 평론가는 아니고..ㅎㅎ
정말 알차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번 읽기는 아쉬워 또 재독, 3독 할 것 같습니다.
 
김재민 19.03.09. 12:10
나는 지박사의 LA 인상기에서 이 보다 더한 생생한 삶의 숨결을 느낌다.. 댓글 보시 항상 장전 하고 있으니 지나온 시절의 LA 얘기 계속 많이 펼쳐 주소.
 
 
김재섭 19.03.09. 05:55
몽골 여행의 마감을 아주 재미있게 잘 하셨네요
재미있습니다
내가 갔을 때에는 가이드가 그져 돈만따지는 가이드였던걸로 기억되어 좋지 못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김재민 19.03.09. 12:33
김작가가 같은 장소를 봐도 크게 있어보이는 전문가적 안목의 그림 포착력이 있네요. 참 좋심다.
 
 
이길영 19.03.09. 07:44
유나가 있는 몽고 방문기이군요.가만히 보면 두고 온 유나가 눈에 밟혀서 거시기 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군요..
유난히 유나는 가수 유이와 닮은 것 같습니다.
흐미 창가는 스위스의 요들송 그리고 호주 원주민의 연주를 연상시킵니다. 아마 가축을 모는 소리에서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재민 19.03.09. 12:38
길영공도 유나같은 친구 만났으면 나 못지 않은 '호감+연심'을 품었을낌다. 그러나 항상 거기까지지요. 더 들어가면 우리네 삶의 컴컴한 부분도 불가피하게 만나야 될 건데 이 정도 떨어져서 상상력으로만 마구 날아가는 게 그냥 딱이라 여김다.
 
이길영 19.03.10. 23:01
김재민 가다가 그만 두면 아니간 만 못하다는 것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끝까지 가보는 것이 불능이며
설사 무리하면 핑크빛의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직전에 돌아서는 절제도 멋있습니다,.
간혹 달 밝은 밤이며 저 달도 그녀도 쳐다 보고 있겠지 하고 술잔을 기우는 것도 괜찮습니다...
사랑은 첫사랑이요 바람은 늦바람이 제맛이라 했지만.
장마는 늦 장마가 바람은 늦 바람이 무섭다고 합니다.
 
 
강성보 19.03.09. 10:10
그동안 용마 편집하느라 바빠 김박사 여행기 읽기를 미뤄놨었는데,
오늘에사 벼락공부하듯 3편을 몰아서 다 읽었네.
댓글이 엄청 많이 달려 그것까지 모두 정독하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네.
몽골은 나도 재작년 다녀온 적이 있다네. 우리는 국경선 넘어 러시아 이르쿠츠크까지 넘어갔다네.
몽골 초원에서 말달리기 체험은 안했나? 우리는 그땐 여름이라 우리 일행은 마치 칭기스칸의 군사들처럼
초원을 신나게 달렸는데, 가을의 전설에 나오는 브래드피트 처럼 멋진 폼을 잡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지. 10살이 채 안되어보이는 견마잡이가 고삐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네.
솔직히 신나게 달린 것은 아니고. 질질 끌려다녔지.
 
김재민 19.03.09. 12:43
오, 강주필이 모처럼 바쁜 중에도 왕림했네. 용마지 편집장 하는 일이 만만찮은 작업일거라 미루어 짐작하고 있스이. 이미 몽골을 넘어 이르쿠츠크까지 다녀왔다니 그 발빠른 행마술에 우리는 근처에도 못가겠구만.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르쿠츠크에 대한 동경심을 항상 갖고 있스이. 때되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한번 들리리라 벼르고 있는 중이야.
 
 
강성보 19.03.09. 10:12
그래도 승마체험은 제법 좋았다네.
그건 그렇고 몽골 여행기 엄청 재미있는데, 이거 무단전재해도 되겠나? 시빅뉴스에 말일세.
3편으로 나눠 실을까 하네. 다양한 사진도 함게 싣겠네.
<경성대 교수 칭기스칸의 땅 몽골을 달리다>제목으로..
 
이원익 19.03.09. 10:34
강력 추천합니다. 우리만 보기 아깝습니다.
 
이길영 19.03.09. 11:06
이원익 재청이요!
 
김재민 19.03.09. 12:47
이원익 법사도 졸고 봐주셨는갑소. 항상 그 드높은 지성과 인간미에 경외감을 품고 있소이다
 
김재민 19.03.09. 12:48
시빅뉴스지에 실어준다면 나야 영광이지. 얼마든지 편집해 올려주게. 우리도 조만간 학교에서 한번 만나고. 주필 덕에 들어간 경성대도 올해가 마지막 해라 하니 감회가 새롭고도 스산하이..
 
 
백민호 19.03.09. 14:08
커페에 실린 글들이 대외로 나가게 되니 대단한 내용의 글들이 많이 실려져 있는걸 느끼게 됩니다.
재민박사글 흥석공의 글
수인대기자 길영공 서토의 글들이 모두 귀하게 여겨 집니다.
많은
동기들의 좋은 소재들을 많이 갖고 있지요.
원익법사의 소설들도
카페를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고 재섭공의 사진 작품도 너무 좋고 ,
우리 친구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김재민 19.03.10. 08:26
백교장,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조만간 몽골 서부 내륙쪽 탐사를 계획한다니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능교? 항상 동기회 모임 대소사 챙긴다고 바쁜 와중에도 이런 격려사까지 계속 날려주는 성의에 그저 고마울 뿐임다.
 
 
김의철 19.03.09. 20:11
강주필이 주간하는 시빅뉴스에 실리는 계기를 기화로.. 만년의 김박사가 간간이 흥미있는
여행기나 수필로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인기있는 작가가 되었으면 바래봅니다.

강주필 덕에 경성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얻어졌었다니..
또다시 그의 덕분에 인기 작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니겟슴미까.^^

지박사 말슴대로..김박사가 글 속에 자연스레 버무려 내는 인문학적 소재와 개인적
일화로 인하여 여행기조차 한 편의 소설적인 흥미진진함이 만들어 지는듯 합디다.

암튼 좋은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김재민 19.03.10. 08:32
서토의 댓글로 사람 띄우는 공력은 시간이 지나도 녹스는 법이 없는 것 같구려. 강주필에게 너무 압박감 주지 마소. 경성대 한 타임만 해도 충분한 신세를 졌다 여김다. 내쪽에서도 뭐 답례를 할만한 반대급부 제공능력이 있어야 할낀데.. 계속 고민해 보겠심다.
 
 
김수인 19.03.09. 21:27
와, 정말 아쉽다. 앵콜로 다른 이바구 엮어보셔. 편의점 후속 이야기도 좋고...근데 박점주님, 요새 손님도 뜸한데 글 좀 올리소.
3.11까지 안올리면 내가 쳐들어 갈꺼요!^^
 
김재민 19.03.11. 08:10
박점주가 가게경영의 중압에서 벗어나지 못해 알바가 그만 둬도 그 시간을 자기가 메꾸지 재채용을 하지 않아 여기 들어올 여력이 많이 없는 듯 합디다. 또 어쩌다 들어오면 서방이란게 그저 몽골녀 타령이나 해쌌는 주책 글이나 올려 우리 친구들에게 쪽도 팔리고 심장도 상해 정신건강상 요즘은 스스로 입장자제를 하는 것 같네요.. 그저 소생이 쥐길놈임다.
 
이길영 19.03.10. 08:45
김재민 그래도 김 박사는 팔릴 쪽이라도 있으니 다행입니다. 글 올리는 김 박사가 쪽 팔리는 것이 아니고
올리지도 못하는 동무들이 쪽 팔리는 것이지요...
 
김의철 19.03.10. 15:17
이길영
김박사의 무소와 같은 거침없고 자유분망한 글쓰기를..다른 동무들의 쪽팔림에
비유시키며 찬양하는 길영공의 기막힌 은유가 아주 신선하게 느껴지는군요.

김박사, 길영공 두 분 모두..새삼, 참으로 범상치않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김수인 19.03.10. 15:37
김재민 참으로 꿋꿋한 김박!^^ 나도 마눌이 알면 집안 뒤집어지는 글들 올리는데 작가 정신은 누구도 못말려요 ㅎㅎ
 
김재민 19.03.11. 08:12
김수인 내가 예전에는 어쩌다 연애사에 좀 휘말리기도 했지만, 6학년이 되고부터는 입만 저러지 실행력이 없다는 걸 감지하고 여자 얘기로 약간 깝죽거려도, '길면 다친다!'하는 정도의 눈만 부라리고 심각한 태클은 걸지 않으니 쪼끔씩 눈치보며 살랑살랑 쓰는 것임다. '표현의 자유'와 '독자를 위한 글의 서사성 확보'를 위해 우짜고저짜고 하면서 말이네요.
 
이길영 19.03.11. 10:26
김재민 골키퍼 없는 공은 넣으나 마나...
손맛 볼 라고 낚시 줄을 을어 뜨리지 고기만 많이 잡으려면 배 띄워서 그물치지...
 
 
김수인 19.03.10. 15:43
어제 밤 11시40분부터 1시간 40분 KBS에서 방영한 "91회 아카데미상 특별 다큐멘터리 수상작"을 침 꼴깍거리며 봤는데...
알렉스라는 암벽을 도움없이 오르는 프리 라이더는 언제나 죽음을 불사하는 사투를 벌이지만 이짓은 중독성없이는 못한다고...
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칸티?라는 큰 바위산을 3시간56분만에 맨몸으로 오르더라고...보는 이가 더 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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