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간 제주 방문 1
2019. 4. 29
방문객 여러분, 지난 4/26(금)~4/27(토) 기간에 36년 만의 제주방문을 하고 왔네요. 48년 전인 ‘71년 고2 수학여행, 그리고 36년 전 ’83년 신혼여행 다녀 온 이래 감회 어린 추억여행을 2박3일이라는 짤막한 일정 속에 혼자서 단독으로 호떡집에 불난 듯 다부지게 다녀왔심다.
이 여행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제가 전공한 글로벌경영 학계에서 제 연세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정구현 교수 이외에 이 분야에서 또 다른 Guru 은사로 오랜 기간 흠모하며 모신 전용욱 교수(중앙대와 세종대를 거쳐 현 숙명여대 글로벌사회교육원장이자 제주국제자유도시센터 이사장)의 부름을 받아 제주에서 열린 문화관광 학술심포지움에 한 꼭지 발표자로 가게 된 데 있었네요.
<한라대 포럼장 전경>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일념에서 두 번이나 세 번에 걸쳐 이번에 내키는대로 속전속결 바쁘게 돌아다닌 여행길의 단상들을 학술포럼 참가 중간중간에 떠오른 제 감상들과 함께 버무려 소개하려 함다.
자다 떡받은 제주여행 기회가 오다
지난 3월 중순인가 내 인생 30대 이래 내게 ‘키다리 아재’ 역을 항상 흔쾌하게 해주시는 전용욱 교수로부터 불쑥 전화가 왔다. “김교수, 시간되면 4월말 제주한라대에서 개최되는 국제경영·국제관계·제주관광 관련 심포지움에 10페이지 분량의 ‘제주 짜가 들어가는’ PPT 페이퍼 하나 작성해 나도 볼 겸 참가해 줄 수 있소?” 하고.
'이 무슨 자다 받은 떡이냐!’ 싶어 “교수님, 여부가 있겠심까? 모처럼 불러 주시는데 만사 제껴놓고 버선발로 달려가겠심다” 하고 수락을 한 뒤 발표 페이퍼 테마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주최측인 한라대 국제자유센터 소장인 김신효 교수가 참가수락 감사 인사와 함께 이전 포럼 때의 발표 페이퍼들을 작성하는 데 참고 하라며 보내왔다.
살펴보니 전문학술지에 발표하는 소논문 수준의 내용이나 분량 보다 지역 언론이나 기관들에 제공하는 이슈성 타이틀의 10~15 페이지 내외 페이퍼들 묶음임을 알게 되었다. ‘제주-국제경영·국제관계’의 조합속 이슈가 뭘까 생각하니 작년 6월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인 ‘제주에 들이닥친 예멘난민’ 문제가 떠올랐다.
얄팍한 지식분야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만(특히 자연과학, 세계사, 세계지리, 철학, 사회사상사 분야에서), 타고난 엮어내기 순발력과 냅다뛰기 좋아하는 오지랖으로 국제관계와 글로벌 시사쪽에 ‘국뽕식’ 시각으로 평론하기 좋아하는 와이프 박점주에게 이 테마 어떻냐고 간을 보니 ‘이건 바로 망하는 테마다’ 하고 일언지하에 퇴짜를 놓았다.
‘왜냐?’ 하니 ‘당신 꼴상으로 봐서 보나마나 감성팔이 동정론으로 결론지을 게 뻔한데 이런 논쟁 폭발성이 높은 테마로 발표 토론장에서 현실론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당하며 깨질텐데 그러냐? 이 어리석은 인간아..’ 하는 힐난조의 반문을 해댔다.
‘쓰바, 그런가?’ 하고 귀얇은 내가 말아넣으려는데 그래도 싶어 주최측 김소장께 ‘혹시 ‘제주-예멘난민’ 문제는 발표 테마로 적합할런지요?‘ 하고 카톡문으로 문의했더니 의외로 ’꽤 괜찮은 시의적절 테마로 여겨진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평소 지배주류층의 권위에 약한 박점주는 ’초청해 주는 주최측이 괜찮다면야..‘ 하고 꼬랑지를 약간 내렸다. 그러면서도 ’지나친 동정 일변도 논지로 몰아가기는 논리력이 부족한 얼치기로 보일 수 있으니 이 점 각별히 유념하며 작성해야 할꺼구먼‘ 하고 볼멘 불만 감정을 거두지 않았다.
페이퍼 작성하며 6일 연짱 가게근무 서다
‘Go’ 사인을 얻으며 제주여행 가겠다는 일념 속에 ‘제주-예멘 난민’ 테마의 발표문 작성을 시작했다. 내 네이버 블로그(blog.naver.com/corazon27)에 평소 모아둔 중도보수와 진보 저널지들에 실린 이 문제 관련 기사문들을 검색해 찬찬히 다 읽어보니 내가 엮고자 하는 내용 목차들이 서서히 그려졌다.
처음에 작성한 초고 목차들을 글을 쓰며 여러번 수정하다 마침내 ‘1. 제주-예멘 난민문제의 발생 배경과 경과, 2. 난민 대처에 대한 찬반 논쟁, 3. 독일의 난민정책 사례, 4. 우리의 허술한 대처수준과 인프라, 5. 인도적 개선방향’으로 정했다.
박점주가 지적한 감상적 동정 일변도의 논지 전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난민 반대론자들의 주장 근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수용해 소개하고. 이들의 주 근거인 ‘가짜 난민’과 ‘무슬림 혐오증’에 대한 반론으로써 ‘우리의 난민역사’, ‘제주 4·3 사태시의 제주민 박해’, 그리고 ‘이슬람의 보편성과 세계사적 기여’를 토론용으로 준비했다.
아울러 전유럽과 자국 극우세력들의 반대에도 지난 2년여 동안 150만의 시리아를 주축으로 한 중동 난민들을 받아들인 독일 주류층의 사례를 들어 ‘사회적 약자 간에 더불어 사는 글로벌 연대’와 ‘인구구조적 측면에서 외부 생산인구 수혈’이라는 키워드들을 도출했다.
이 페이퍼의 초고를 5/4 쯤 작성한 후 나머지 마무리는 페이퍼 제출일(4/15) 한 며칠 전에 남겨 놓고 하려는 요량 속에 열흘 만에 돌아오는 편의점 보충인력 근무자로 올라왔다. 그런데 최신 내용 저장 했던 USB에 최신이 저장되지 않고, 3/2 밖에 써지지 않았던 구 버전 내용만 담겨있지 않은가? 저장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듯 싶었다.
그래도 부산에 있는 노트북에 담겨 있다는 걸 기억했기에 다급한 마음에 가족을 위해 해야 하는 주말 근무도 포기한 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딱 하루 근무한 채 황급히 내려갔다. 다행히도 예상대로 최신버전이 노트북에 담겨 있어 마지막 마무리를 지은 채 발표용 원고를 마감일 전 주최측에 보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제주도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행히 4월 넷째주가 경성대 중간고사 기간이라 맡고 있는 밀착형 강의들과 취업동아리 모임이 없어 이 주에는 김포집에 1주일 간 쭉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예상외로 일찍 와서 오래 머문다 하니 박점주가 모처럼 긴 자유 시간을 부여해 줄 근무 대체재가 올라왔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자진해서 6일 간 하루 8~10시간 씩 가게 근무를 제주행이 기다린다는 희망 속에 연짱으로 수행했다. 마지막 이틀은 집에 들어오면 격무 피로감에 옷벗자마자 픽 쓰러지기 바빴다. 하지만 손님이 뜸한 11~14시 사이에 가게에서 학교 일과 여행일정 및 항공편과 렌트카 예약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3박4일을 잡았지만 숙박 및 렌트비가 만만찮아 자투리 시간까지 자주 활용하고, 내가 가려는 추억어린 지역으로만 찍어 다닌다면 2박3일 해도 될 것 같았다. 출발일도 개최일인 하루 전인 목요일(4/25) 오후에 도착한다는 생각으로 그날 오후 일정과 이 날 밤을 묵을 숙박소 확보도 에어비엔비로 해놓았다
언제 다시 가볼까 하는 제주 여행길에 오르다
드디어 목요일 아침 항공료가 가장 저렴한 티웨이 항공 13시20분 발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나처럼 싼 맛 좋아하는 승객들로 꽉 찬 비행기는 한 40분 만에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 타고 가며 ‘83년 3/19일 박애숙과 부산역 ’새마당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룬 뒤 오후 늦게 대한항공으로 제주 날아가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두 사람이 같은 열에 앉지 못하고 통행로를 사이에 둔 양열에 마주한 채 티케팅되어 떨어져 가게 되었다. 다른 승객들도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처럼 남 눈 의식하지 않고 서로 다정한 포즈 잡기도 민망하던 때라 그냥 착륙할 때까지 대화유보 시간을 갖기로 이심전심 묵계가 되었다.
나는 앞에 있는 신문을 펼쳤고, 박점주는 그날 하루 중 운좋게 생긴 휴식타임이라 여겼는지 눈을 붙이는 듯 했다. 우리 구역을 서빙하던 스튜디스가 신문 보던 내게 ‘커피 한잔 갖다 드릴까?’ 하고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묻는데 올려다 보니 ‘이거 근래에 보기 드문 자연산 미녀가 아닌가’..
이 문디 언니가 바로 옆에 갓 혼례식을 올리고는 피곤한 신부가 졸고있는 것을 알고서도 한 30cm 공간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오늘 장가가는 이놈을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며 배시시하게 꼬리를 치는 서빙놀이를 하는 듯 여겨졌다. 짧은 순간 ‘하, 가시나.. 진작 중매시장에 나오지 어째 여기서 뿅하고 나타나는가’ 싶었다.
<36년 만에 방문한 제주공항에서>
그때와는 달리 빈 좌석이 거의 없이 찬 이번 비행기는 그 당시보다 더 빠른 코스와 속도로 날았는지 더 일찍 닿는 것 같았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공항 바깥에 열대 수목들이 들어차 있어 마치 베트남이나 필리핀 같은 아열대 지역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게이트를 지나 주차구역으로 가니 예약한 OK렌트카의 셔틀봉고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5분 달려 렌트카 사무소에서 3만5천Km 달린 기아 K3를 50시간 빌린 뒤 렌트비 6만7천원과 일반자차보험비 4만2천원 해서 총 11여만원에 차를 넘겨받았다. 공항에서 한 30분 떨어진 봉개동에 소재한 민박집에 가기 전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서쪽 애월을 지나 신창 해안도로를 타고 수월봉까지 갔다 민박 숙소로 가면 첫날은 잘 소화할 듯 했다.
흐렸지만 호젓했던 홀로 드라이빙 코스
드디어 하얀색의 기아 K3 차로 옮겨타고는 제주에서 서쪽인 신창해안도로 쪽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시키는 대로 가니 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복잡한 공항과 시내를 한 15분 지나니 바로 호젓한 교외도로가 나타났다. 조금 더 달리니 표지판에 애월과 곽지해수욕장 지명이 보였다.
원래 제주 서해안 쪽 일몰광경이 절경이라 해서 이곳을 첫 드라이빙 코스로 잡았는데 날씨가 흐려 해지는 장면보기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흐린 날씨에 보이는 바다풍경도 고즈넉한 운치면에서 나그네를 끌어들이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곽지해수욕장 근처에 이르자 무슨 지남철에 끌리듯 방향을 틀어 들어가게 되었다.
<고즈넉한 운치가 촘촘한 곽지 해변>
마침 관광버스로 수도권 고교에서 온 여고생과 또 다른 타지에서 온 아줌마 그룹과 함께 섞여 양복 차림으로 바다와 맞닿은 백사장 곁과 해안도로를 거닐었다. 정경이 전체적으로 참 정갈하며 소박하게 느껴졌다. 저멀리 둑에서는 30대로 보이는 연인 한쌍이 사랑에 겨워 죽겠다는 듯이 마주 보며 껴안기도 하며 ‘우리 둘 좀 봐주소’ 하는 듯한 오버스러운 포즈들을 계속 연출했다.
한 30분 쯤 머물다 다시 차에 올라타 신창해안도로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예상외로 제주도내 지역 간 거리는 우리 같은 60대도 차몰고 집중하기 딱좋은 1시간대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K3 렌트카가 주는 이동의 자유로움에 감사하며 아직도 ‘살아있네’ 싶은 내 몸속 여행순례자의 DNA가 다시 한번 경이롭게 여겨졌다.
<'황야의 늑대'인 양 홀로 드라이빙 하는 왕년의 함부르크 택시 운쨩 출신 아재>
유명하다는 금능해수욕장도 지나치며 한 40분여 달리니 신창이 표지판에 나타났다. 제주 서해안에서도 최고의 일몰 정경을 보인다는 신창 해안에서 흐린 날씨로 그 절경은 놓쳤지만, 뿌우연 연무 속 거인의 실루엣처럼 보이는 해상풍력발전의 거대한 풍차 프로펠러들이 눈에 띄었다. 아, 여기가 유명한 신창 풍차 해안로임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건진 신창의 석양 풍차>
<흐린 날씨로 나는 못본 신창 해안의 일몰 전경 (3월에 다녀온 큰 아들이 보내줌)>
<생태공원 뻘 공간을 앞에 둔 풍경화 속 그림 같은 독특한 양식의 서구식 가옥건물>
<안개 속 다리 옆 풍력 프로펠러 탑과 해상 돌섬 위 '알 수 없는 그 무엇'>
<해녀 전용 샤워 탈의실인가?>
주위와 후면을 두리번거리니 인적이 별로 없어 에드워드 호퍼 그림에 자주 나오는 비현실적 공간 같은 호젓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많은 드라마나 영화, CF 광고 장소로 각광받아왔다는 사실도 인터넷에서 소개되었는데 직접 와보니 뻥튀김이 아니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며 여기까지 축지법을 쓰듯 한달음에 인도해준 K3 렌트카에 한번 더 경외심을 표했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뷔겔란' 조각공원 같은 분위기>
<어디서나 여체 좋아하는 눈 찌그러진 아재>
이제 오늘 우선적으로 살펴보리라 마음먹은 선택목표 코스는 달성했는데도 해가 길어져 있어 조금 더 내려가 수월봉까지 보고가도 될 듯 싶었다. 18,000년 전 해저 지하에서 올라오던 마그마가 물과 만나 강력한 폭발을 하며 발생한 화산재와 모래가 퇴적된 화산체가 수월봉이라는 사실은 현장 표지판을 통해서야 알았다.
<수월봉의 풍화된 '화산재+모래' 퇴적 화산체 단면>
<혼자 사진찍기 너무 아까운 오솔길 굽이 절경>
<대서양을 마주보는 프랑스나 지중해쪽 스페인 해안에서 자주 본 듯한 해변 산능성이>
<안개 속 저멀리서 침공함대가 곧장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
시간이 남아 추가 땜빵으로 들린 곳이 망외의 방문성과를 선사해준 곳이었다. 지질학적으로도 세계문화유산이 될 정도로 진귀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바다를 앞에 두고 길게 늘어진 서안 절벽의 정경에서 모네와 달리 등이 즐겨 그렸던 그림 속 바다절벽 형상 이미지들이 떠올려졌다.
나그네의 하룻밤 의탁을 편안하게 받아준 민박집
이곳을 마지막으로 오늘 묵을 민박소로 찾아가는 길은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 속에서 펼쳐졌다. 돌아보고 싶은 곳들과 예기치 않았던 멋진 장소까지 살펴본 뒤라 마음은 편안한 충족감에 젖었다.
제주 봉개동에 있다는 민박집을 내비게이션이 이끄는 대로 가면 되는 길이라 제주의 야경을 제법 음미하며 느긋하게 달릴 수 있는게 꽤 맘에 들었다. 지난 수년 간 박점주가 모는 차만 얻어타다 보니 거의 퇴색된 줄 알았던 드라이빙 DNA가 내 몸속에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도 가는 내내 대견스레 여겨졌다.
한 40여분 달렸을까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안내음성이 울렸다. 시내에서는 좀 떨어진 한적한 동네 같았다. 차 문을 열고 내려서니 자그마한 언덕길에 ‘Bong Stay’라는 게스트하우스 건물이 눈에 띄게 서있었다. 트렁크에서 짐을 빼내어 주인장이 가르쳐준 현관 비번으로 입장하니 공동거실에 먼저 와 있던 남자손님이 목례를 건네주었다.
<19,000원에 먼 길 달려온 나그네를 하룻밤 맞이해 준 제주 봉개동 3호실>
방은 모두 10개가 있었는데 내 방은 3호실이었다. 들어가니 무슨 캡슐모텔 방에 들어온 것 같았지만 침대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욕실은 아담하면서도 정결했다. 호퍼 그림 중 ‘Hotel’을 연상하며 짐을 풀고는 늦은 요기를 하기 위해 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음식점들은 모두 닫혀있어 불켜진 S 편의점을 찾아 들어갔다.
무슨 컵라면을 하나 사서 뜨거운 물 부어먹으며 우리 연배의 주인장 부부와 가벼운 대화를 시도했다. 나도 수도권에서 C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주남편이라 하니 동병상련의 업주마음으로, 주위에 경쟁업체들이 많이 생겨 장사경기가 한참 떨어졌지만 로또품목이 그나마 제법 되어 그럭저럭 버틴다고 자영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짐 푼 상태>
<노트북 내려놓고 인터넷할 태세 완비>
방에 들어와서는 들고 온 노트북을 펼친 채 인터넷이 되도록 하고는 오후내내 놓친 뉴스들을 챙겨보며 내일 일정을 점검했다. 아침 일찍 짐챙겨 체크아웃한 뒤 바로 성산일출봉을 둘러보고는 제주한라대로 돌아와 1시에 열리는 심포지움에 참가하리라 하고 머리에 되새겼다.
바로 잠이 오지 않아 갖고 온 외장 하드 속에 넣어 온, 벨기에 다르넬 형제 감독이 90년대 후반 연출한 영화 문제작인 ‘로제타’ 하편을 한 30분 여 마저 본 뒤에야 적당한 피로감과 함께 첫 밤의 숙면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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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호 19.04.29. 18:50
물론 무고한 민간인 피해자가 있었겠지만, 민간인 피해자가 있었다고 사건을 미화 할 수는 없습니다.
빨갱이들이 끼여 들면 사건이 다 피로 벌겋게 물듭니다.
워낙 빡세게 황망 중에 돌아다녔는지라 항몽유적지도 놓쳤고, 4.3 유적지도 어디 있는지 몰랐네요.
난민 문제는 인권 문제에 앞서서 우리 나라에 부담을 주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다면 받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나라이고 그 나라의 출입국 관리의 규정이 있는데,우리 나라는 좀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말 하는 조선족 문제를 보면 참 어지럽습니다. 그들의 우리 나라는 중국을 얘기하던군요.
필리핀에 영주권을 얻으려면 옛날에는 75,000불 은행에 예치하면 본인 포함 3인까지,추가로 일인당 15,000불을 예치해야 합니다.지금은 2만불이라고 하던군요.
민박료가 20불 정도라는 내용이 공연히 눈에 쑥 들어오는군요.
제주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다녀온 뒤로는 한 번도 가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아버님이 제주도에서 마지막 3년 근무로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시게 되었기에
다른 형제들은 모두 제주도를 아주 편안히 잘 구경하고 즐길 여건이 주어졌었는데
저는 그 때 이미 미국에 나가있었기에..결국 제주와는 별 인연이 없게 되버립디다.^^
서토 부친께서 3년이나 제주생활을 하셨다니 미국만 있지 않았더라도 제주는 제법 들릴 기회가 많았던가배요. 놓친게 아쉬웠겠심다. 요즘은 저가항공 덕에 제주는 4~5만원 선에 부산이든 서울에서든 편도편을 티케팅 할 수 있습디다. 나처럼 민박하고, 저가차 렌트하면 나물먹고 물마시며 혼자서라도 그럭저럭 다녀오겠데요.
미군정의 실정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가 주된 이슈였습니다. 빨갱이들은 소수에 불과 하였습니다. 제주도민의 항쟁을 토벌하기 위해 여수 순천에 주둔했던 군대를 출동시켰지만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여 여수 순천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군이 지리산 공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무수한 양민 학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백교장님께서는 왜 자꾸 그게 아니라 하시는 검미까.
당시 빨갱이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의한 학살로 간주하고 대충 넘어 가십시다요.^^^
양민 학살이니 하는 다소 과장된 여론 몰이가 우리 나라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5.18이 그렇고 세월호에 편승한 불순한 정치 세력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거 부모가 죽어도 49제를 지나면 탈상을 하는데 무슨 5년이 지나도록 울거 먹으니 곰국도 삼탕이면 다 솥을 새로 씻는데 말입니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내 가슴에 칼을 힘차게 꽂으세요!
아름다운 꽃채 만들어, 길영공 가슴에 부드럽게 쓸어 내리고자 함미다.^^
'48년 제주에서 열린 3.1절 행사장에서 기마경찰이 어느 젊은 부인의 아이를 치안유지 한다하다 크게 다치게 했고,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서 참석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자 바로 발포를 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던 것임다. 불만에 찬 민초들을 제대로 자극했지요.
백교장 말대로 6년5개월이나 지속되었지만 '49년부터는 3만명에 이르는 양민 희생의 85%가 연대급 국군토벌대와 핏빨 선 서청자경대에 의해 자행된 일방적인 학살극이었지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때까지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반국가적인 금기 사안이었심다. 현기영(제주출신)의 '순이삼촌' 같은 소설로서나 조금 알려졌을 뿐이었지요..
꼭 역사적 사건에 인간적인 면을 붙여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면 안 됩니디.반란은 반란이고 반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양민 학살이 발생하였습니다.양민 학살 사건을 확대하여 빨갱이들의 만행에 정당성을 주면 안됩니다.
우리 나라의 문제는 모두 종속적인 사건을 부각 시켜서 사건을 전말을 흐리게 하는 것이 빨갱이들의 고전적인 전술입니다.
"제주-예멘 난민문제 발생의 배경과 경과" 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여체를 보다 눈이 찌그러지신 게 아니라.. 난민문제 PPT 급히 작성하느라 그리되었겠지요.^^
나중에 김박사가 설명하는 해당 내용을 읽고나서 좀 더 개인적 의견을 내어보도록 할게요.
해당 사안에 저는 여러모로 공연한 의구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김박사의 제주도 여행 활동기와 더불은, 학술포럼 파일내용 고대합니다.
이번 셀카 사진을 보니 내 왼쪽눈은 한참 찌그러져 감겨있더만요. 오른 쪽 입술꼬리는 80년대부터 아래로 처져 비대칭 입모양새를 계속 유지해 왔심다. 마 생긴대로 살아야지요.
수인행님께서는 지금부터라도, 간간이 김박사네 가게를 때로 맡아 보아낼 수 있도록
틈나시는 대로 매출 등록기 사용방법 등을 좀 익혀두도록 하십시요.
두 분이 움직이게 될 때 행님께서 맡아주어.. 김박사네에 도움도 되고, 수인행님 수입도 되고-^^
검은 모래 사장도 있고
마라도에가서 짜장면도 한그릇 하시고
제주에는 볼곳도 많고
맛있는 음식집도 많이 있습니다.
이중섭거리 도 있고
우리동기 강형구 화백의 멋진 작업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대절해 다녀 보니까 별 재미도 없고, 그냥 불편해 서귀포까지 가 위로금 좀 주고 돌려보냈네요. 그 다음날은 신혼부부 패키지에 묻혀 버스 여행을 다녔는데 그게 훨씬 맘 편하고 활기찹디다. 은연 중 다른 신부들과 박점주를 비교해 보기도 했고요(와이프도 그리 했겠지요). 박양이 제일 낫습디다
박점주는 소생이 그때부터 값싼 여관방 좋아하는 짠돌이에다 중고품을 특히 선호하는 인간인 줄 알아봤어야 했다고 지금도 쪼싸쌌네요. 그래도 내 기억에는 제주 호텔에서의 첫밤보다는 서귀포 여관방에서 제대로 부부의 일합을 뿌듯하게 나눈 것 같아 지금도 서귀포를 못잊겠심다.
한 이틀 쉬었더니 그 새 이런 걸작이 또 시작 되었군요..
이런 명작이 $$$로 쫌 연결이 되면 좋겠는디 말임다..
신혼여행때 스튜어디스 얘기가 우찌 내 경험과 비스름한지 모르겠슴다..
아마..
임자가 있다는 빵빵한 여유가 남성의 외모와 분위기에 충만하여 다른 여성들에게도 매력을 풍기게 된다는 머 그런 이론이 성립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즉 임자가 있다 --> 다른 여성이 이 사람을 선택했다 --> 이 남성은 매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또는 뺐고 싶다??
눈치 빠른 박점주가 한번은 슬 떠보듯이 '재민씨, 우리 결혼에 뭔가 아쉬움이 많다면 지금이라도 없던 얘기가 될 수 있어요' 하는게 아임니까. 내면을 들켜 앗 뜨거라 싶어 '아이, 아이네..아무렴 내가 의리없이 그랄라꼬?' 하고 눙치기는 했지만요. 고 기분을 스튜어디스 박모가 표정에서 읽고 파고든 듯 함다. 사탄같이 고얀 것
우찌보면 일부다처제가 일부일처제보다 더 합리적인 것 같심다.. 지금도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않십니까..
우린 다만 능력부족일 따름이지요..ㅠ
좌우파의 대립같은 인상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모두들, 이 나이되면, 나름대로 뚜렷한 역사관이나 사회관들이 정립되어 있는 분들이니
이런 이바구들은 역사 발표회이나 개인적으로 투고나, 끼리끼리토론회서나, 의미가 있지 싶은데.
여짜서는 그런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글이나 댓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미까?
나, 살아 아직 있다는 의미?
그냥 재미삼아 훑터 보고 지나간다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생각이 틀린 부분을 댓글로 답글로 주장(?)하고들 있으니...
시국만 해도, 개판오분전인 데,
특히, 이런 논란스런 것을 여기서도 봐야되나 싶어 짜증이(?)..
아무튼 옥자의 지적대로 강성 표현은 최대한 중립화하여 누그려뜨리겠네요. 그럼에도 혹시 잠깐 중용의 선을 넘어가더라도 대가다운 관용을 바람다.
중화권의 대학자로 중국의 전통학문과 불교의 부흥에 크게 이바지하여 대만과 중국에서 국사(나라의 스승)라 불린 남회근(南懷瑾 Nan Huai Chin) 선생의 유명한 시이지요.
한국에도 그렇고 중화권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단한 석학입니다. 선생은 2012년에 95살로 눈을 감았습니다.
하늘노릇
하늘노릇 어렵다지만 사월만 하랴
누에는 따뜻하기를 보리는 춥길 바라고
나그네는 맑은 날씨 농부는 비를 바라는데
뽕잎 따는 아가씨는 흐린 날을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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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방문기 1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연재 될것 같아 기대 됩니다. 제주 간 김에 4.3.항쟁 유적지도 한번 가 보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