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체험기

몽골 탐방기-2/3

백조히프 2019. 2. 28. 09:12

몽골 탐방기-2/3

 

 

 

2019. 2. 28

 

혹한 속 수흐바타르(칭기스칸) 광장에서

 

아침 630분 경에 기상해 세면을 하고, 갖고 간 노트북으로 메일확인과 국내 매체 기사 좀 읽으니까 룸메이트 염사장도 세면을 끝내고 와 7시 반 쯤 호텔 아래 식당으로 내려 왔다. 한교수 팀도 때맞춰 내려와 약식 아침 뷔페를 같은 테이블에서 했다. 한국인이 하는 호텔이라 그런지 한식 위주 메뉴였는데 가지 수는 떨어졌지만 저렴한 여행상품에서 이런 끼니도 챙겨주네 하고 고맙게 먹었다.

 

 

같은 방문단 소속인 5, 60대 아줌마들과 6, 70대 배우자 아저씨들이 한 곳에 모여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고추장, 김치, 김 등 밑반찬을 내어놓고 왁자지끌 떠들어대며 중앙 자리를 차지한 채 식사를 했다. 나는 큰 문제 없다 여겼는데 서울 출신인 염사장과 한교수는 경상도 아줌마들의 언성 높은 속사포식 화법과 주위 배려정신이 약한 식당 매너에 쯧쯧거리며 계속 비웃는 포즈를 유지했다.

 

식사를 마치고 둘째 날 마수걸이 방문을 한 곳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별로 몰랐는데 가져 간 카메라와 폰 카메라로 좀 찍다보니 바로 손이 시려 왔다. 영하 25도 정도의 기온이라는 것이었다. 한교수가 부산 부전시장에서 사다준 한국전쟁에서의 중공군 털모자를 쓰니 훨씬 견딜 만 했다.

 


<수흐바타르 광장 앞>

 

수흐바타르 아재는 현대 몽골사에서 1921년 경 우리의 김좌진이나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갓 독립국 선언을 한 신생 몽골을 위협했던 잔류 중국군과 러시아 백군을 군사적으로 물리친 군인 영웅으로 이곳에서는 칭키스칸 다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공식장소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미리 촬영허가 티켓(1~2만원)을 끊어야 한다는데 그냥 야매로 눈치껏 주위 돌아보며 찍었다. 그러다 일행 중 유튜브 방송을 위한 드론 영상 찍는 40대의 비교적 젊은 장년팀이 있었는데 이들이 대놓고 촬영하다 몽골 경비병들에게 항의를 받고 찍은 사진 다 삭제하라는 명령에 앞 부분 몇 장 지우는 시늉을 했고 유나 가이드가 쫓아가 사정한 덕에 간신히 무마 되었다.

 

 

유나가 버스에 올라타 이 광장명이 예전 좌파당 집권시절 초기에는 수흐바타르로 불렸지만, 수흐바타르가 공산독재 체제에 비판적이자 한동안 '칭기스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그후 90년대 초 현 중도우파당이 들어서며 ‘수흐바타르'로 다시 복권되어 불린다고 했다. 이곳을 살펴본 후 버스 잠깐 타고 한 두 블록 근처에 있는 두 번째 방문코스인 몽골국립역사 박물관으로 안내되었다.

 

국립역사 박물관 관람

 

수년 전 하노이 방문 시에 봤던 역사박물관처럼 여기도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선사시대적 유물부터 칭기스칸 이전 부족장 시대의 유목민 생활상과 몽골대제국 시대의 하이라이트를 거쳐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그 특징적인 기념물들을 성심성의껏 배열해 놓았다.




<박물관 전면>






나는 화장실 다녀간다고 이곳에서도 유료촬영만 가능함을 미처 주지하지 못했기에 선사시대 진열품들부터 내놓고 찍는 데 염사장이 다가와 이러면 안된다고 몽골직원이 오기 전에 미리 주의를 주었다. 아차, 싶어 폰카메라를 바로 거두었다. 경험에 의해 여기 사진들은 웬만한 것은 인터넷에서 다 구할 수 있을거라 여겨져 그냥 눈으로 편안하게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유나에 의하면 몽골의 선사시대는 80만년 전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최초 인류(쟈바 원인)가 한 50만년 전으로 알았는데 너무 멀리 간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유나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하고 좀 아는 체 토달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도 우랄 알타이족이 시원이니 우리보다 훨씬 선사시대가 빨리 시작되었다 해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받아들였다.


<몽골대제국의 최대영역 전도>


<쿠빌라이-칭기스칸-오코타이 초상> 


유나가 신난 곳은 역시 칭기스칸 대제국의 확장무렵 유물들의 진열관에서였다. 대칸 칭기스칸(테무친)에서 그의 충성스러운 야전군 장군들, 그리고 차카타이, 오코타이, 톨루이와 그 아래 후손들인 몽케, 바투, 훌레구를 거쳐 대원제국을 세운 쿠빌라이 칸의 스토리들을 읊을 때까지였다.


<몽골 기병단의 지휘관>

 

내가 읽어본 몽골역사 책들에서 나온 내용들을 다 포함하면서도 새로운 야사적 얘기들이 나오길래 어디서 들은거냐 하니 자기를 비롯한 몽골인들은 우리의 삼국유사 같은 몽골비사를 통해 좀 더 인사이드적인 내용을 습득한다고 답했다. 그 몽골비사 책 한국어로도 출판되어 있느냐 하니 아마도 그럴거라 했다 (찾아보니 유원수의 2004년 발간 번역본이 있었다).

 

몽골이 이 시절(13C) 고려를 침공해 접수한 뒤 여몽 연합군을 구성해 일본까지 정벌하러 갔다가 가미카제 태풍에 의해 2번이나 실패한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 부분도 대충은 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내가 유나와 좀 오래 독점적으로 인터뷰 하는 듯 여겼는지 중학선배인 정전무가 다가와 김교수, 추가 질문은 나중에 따로 돈내고 하소하며 농담어린 타박을 하자 또 아차 하며 질문공세를 멈췄다.


<청에서 독립한 입헌군주제 시절의 복드 칸 부처>


<근대 몽골시절의 전통남녀 복식> 

 

유목민들의 일상사를 보여주는 구역에서는 몽골인들과 유목민들의 가죽구두코가 왜 위를 향해 솟아오른 모양인지에 대해서는 가축들이 먹어야 할 목초들을 조심스레 밟기 위한 배려라고 했다. 그리고 복식에 있어 소매가 특별히 긴 것은 추운 날씨에 장갑의 역할을 하고, 게르에서 뜨거운 주전자 등의 물건을 잡을 때도 유용한 생활의 지혜라 했다.

 

아니, 장갑을 고안해 착용했으면 더 그럴 듯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레 설명하는 유나의 소개 말에 불경한 토를 다는 데다, 정전무에게서 흑심 품은 사소한 질문한다고 또 쫑코 먹을까봐 입을 꾹 닫았다.

 

국립공원 테를지 가는 길과 도착해 말타기

 

역사박물관을 나와서는 오후의 주 방문소인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가기 전 근처 대형마트 방문 타임이 있었다. 가보니 우리네 마트들과 거의 같은 규모의 시설 속에 한국 제품들과 유럽수입 제품들로 주류를 이루었다. 유나 말대로 중국인들을 싫어해서인지 전세계를 휩쓰는 중국산 제품들이 희안하게도 그리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유럽산 주류, 소시지 및 유류제품, 커피, 과자 등은 한국에 나와 있는 같은 상표들보다 훨씬 싸게 가격이 매겨져 있어 유럽여행 많이 다닌 빠꼼이 한교수는 횡재한 듯이 쓸어담았다. 난 없을 줄 알았던 독일산 무알콜 캔맥주들이 있기에 반갑게 몇 캔 샀다.

 

드디어 울란바토르에서 북동쪽으로 한 70여킬로 떨어져 있다는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떠났다. 도시를 벗어나는데 전날처럼 교통체증과 미세먼지 공기에 좀 짜증이 났지만, 그럭저럭 도시를 벗어나니 드디어 고대하던 몽골다운 초원의 풍경들이 펼쳐졌다.



<테를지 입구 산세 전경>


비록 겨울이라 저 푸른 초원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약간 눈발어린 산세와 조화를 이루며 고저넉하게 누워있는 겨울의 평원들이 아주 그럴 듯해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라는 곡의 멜로디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멀리서 풀 뜯던 가축들이 자주 보인다 했더니 오늘의 첫 번째 옵션인 말타기 체험장에 다다랐다. 그 전날 아줌마들 대부분과 몇몇 남자 일행들도 허리 다칠 지도 몰라 승마 체험은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유나에게 전했다. 그래서 유나가 부산 인터파크사에 이런 상황을 전했더니 이번 염가 상품에서 가이드와 버스기사 수입 차지는 3가지 기본 옵션(승마, 마사지, 캐시미어 제품 구매)을 통해 나온다는 연락이 왔다 했다.

 

유나 대신, 동참한 여행사 한국인 직원이 나서서 좀 읍소하는 식으로 말타기 포기를 재고해 달라고 하니 그래도 인정 많은 한국인들이라 허리가 진짜 좋지 않다는 아재 한 두사람 빼고는 겁많은 아줌마들도 한번 타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혹시 낙마사고라도 나지 않게끔 말오르기와 말내리기, 고삐 잡고 마상에서 중심 잡는 요령들을 버스 내에서 열심히 주지시켜 주었다.




<승마장 도착 풍경> 



<승마장에서 본 원경>

 

몽골말은 제주도 조랑말보다는 크지만 아랍산이나 유럽산 말들에 비해서는 높이가 눈에 띄게 낮다고 했다. 그래도 지구력은 엄청 세어 이 말들 타고 몽골 전사들이 저 멀리 원정 가 신출귀몰한 출현 속도로 아랍인과 유럽인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했다.




<처음 올라타 본 몽골 마상> 


우리 태워줄 말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니 몽골 마부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탄 어느 여인네가 올라가자 마자 옴마야, 우야꼬! 와 이리 이 말은 밸시리 흔들어댈꼬오.. ’ 하고 고함을 질러대는 중에 마부 하나가 내게도 다가와 자기가 권하는 말에 오르라고 하지 않은가. 시키는대로 왼쪽에서 올라탔는데 다행히 말이 얌전히 있어 떨어질 염려는 적었다. 마부들이 자기 말에 올라탄 채 두 사람씩 한 조를 지어 자기가 고삐 각 한쪽을 잡고 앞에서 당기며 에스코트하는 식이었다.


<유나의 말타기> 

 

옴마야 하고 비명 지르던 아줌마와 한 조가 되었는데, 처음과는 달리 말이 몇 발짝 걸어가자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몸 리듬을 타며 제법 잘 적응하는 것이었다. 도리어 내가 몸 중심을 잃어 말똥들 위에 낙마하는 망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아줌마가 다른 조에 있던 친구들과 대화하는 여유까지 부리며,‘괘안나?’ 하는 친구 물음에 우리 아재보다 젊은 양반하고 같이 타니 훨씬 맴이 놓인다하고 너스레까지 떨 정도였다.

 

20불이라는 승마체험비에 걸맞게 제법 긴 거리를 모두가 말타고 왕복했다. 대부분이 안떨어지려 긴장하며 몸 중심잡기 바쁜데 유나가 시범조교처럼 안정된 자세로 말타고 우리 곁을 지나 휙 달려가는 게 아닌가. , 하고 말로만 듣던 말 잘타는 몽골여인이 참 멋있어 보였다. 우리 일행 모두가 다 그리 느꼈다.


 

말은 사람이 올라타면 이 친구가 타본 사람인지 안타본 사람인지를 단박에 알아챈다 했다. 그래서 초짜인 줄 알면 비웃듯이 흔들어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에 같이 말타고 가는 현지인 기수가 한손으로 우리 고삐 한쪽씩 쥐고 말 심리를 파악하며 죄었다 풀었다 컨트롤하는 거라 여겨졌다. 하이틴 같아 보이는 우리 기수가 뒤를 보지 않으면서도 우리 말들이 순한 양처럼 따라가게 만드는 몰이 기술이 대단했다.



<막 승마 끝내고> 


또가또각 빨리 걸어가는 경보 속도의 말 위에 올라타니 말 움직임에 맞는 일체적 리듬 감각을 달릴 때보다 도리어 습득하기가 어려워 아래 치골이 아파오고 꼬롬한 말 체취가 점점 강하게 감지되는 무렵에야 한 40여분의 말타기가 끝났다. 교육 받은대로 왼쪽으로 내려 오려는데 왼발이 빠져 버렸다. 기수가 먼저 내려 발을 다시 넣어주는 도움을 받고서야 내릴 수 있었다. 내부규정대로 1불을 주며 감사함을 표했다.


 

게르에서 첫 현지인 양 바베큐 맛보기

 

말타기가 끝나자 몽골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현지음식 체험시간을 맞이했다. 큰 텐트같은 게르 내에서 몽골인들도 명절 등 특별한 날에만 먹는다는 허르헉이라 불리는 양 바베큐 요리였다. 양젖을 데워 만든 수태차, 삶은 감자와 함께 양갈비와 등짝 부분이 팀마다 커다란 접시 위에 수북하게 담겨져 나왔다.


<게르 내 식당>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비교적 많이 사라지게 조리되었지만 스테이크 소스 같은 것이 없이 그냥 불 위에서 소금 뿌려 굽기만 한 기름진 고기를 감자와 부실해 보이는 야채 살라드 만으로 먹으려 하니 시장기가 있었지만 그리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허르헉'-양고기 바베큐 요리>



식성 좋은 한교수는 아주 맛있다며 커다란 고기조각 몇 덩이나 해치웠지만, 나는 화장실도 시원찮을 초원에서 많이 먹어 설사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두어 조각만 챙겨 먹었다. 옆 식탁에 있던 마음씨 좋은 아줌마가 갖고 온 김치를 나누어 주길래 그 닝닝한 맛의 양고기 요리를 그나마 조금 편하게 시식할 수 있었다.

 

수도승 명상 사원 길을 오르다

 

식사를 끝내고 게르를 나오니 방문객들이 먹다남은 양고기를 많이 던져줘서인지 덩치가 튼실한 몽골견 두 마리가 앞으로 다가와 몸을 뒹구르는 동작으로 고기 좀 내놔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한 놈은 중국황실에서 키웠다는 사자처럼 생긴 티벳견과 비슷한 풍모를 보였다.


<먹다남은 양고기 기다리는 몽골견>

 

이놈들과 좀 놀다 우리 일행은 언덕 길 위쪽에 라마교 수도승들이 명상장소로 세웠다는 사원을 찾아 올라가는 트랙킹 코스에 들어섰다. 올라가는 길에 옛 고승들이 읊었다는 짧은 경귀문들이 티벳어와 몽골어, 그리고 영문으로 판넬같은 팻말에 줄지워져 씌여 있었다. 몇 개 해석하며 올라가다 입장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코스가 경사져 난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명상사원 입구>


<명상사원 올라가는 계단> 


사원은 저 위에 아득하게 놓여 있었고, 발걸음이 날랜 선두그룹 사람들은 2, 3백미터 앞에서 열심히 가는 중이었다. 나는 사원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만 가기로 내심 결정하고 천천히 경관들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뒤처진 채 따라갔다. 한번씩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니 그 경관이 장난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산세와 평원, 그리고 하늘이 웅혼하게 서로 어울려 한 폭의 산천화가 돌아볼 때마다 새롭게 펼쳐졌다.


드디어 마지막 흔들다리를 건너 아득해 보이던 명상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입구까지 꼴찌로 도착했다. 여기까지 와서 높게 펼쳐진 계단을 타고 올라갈까 말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먼저 올라가 머물던 선두그룹이 내려오기 시작해 예라, 올라가면 뭐하냐 헛된 욕망을 줄여야제 하며 같이 따라 하산하는 코스에 합류했다.



<명상사원 내려오는 길에 본 방목 말 3마리> 


버스 가까이 내려오는 마지막 비탈 길에서 고갱과 마그리트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말 몇 마리가 저물어가는 석양을 맞으며 인적없이 저희끼리만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풀을 고개박고 찾는 비현실적으로 호젓한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게르 캠프 가는 길


 

버스 타고 이제 오늘의 숙박지인 게르 캠프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차창으로 펼쳐진 겨울의 초원과 산세가 회색 빛으로 스산하게도 비춰졌지만, 그래도 사람 손 많이 타지 않은 몽골의 대자연이 고고한 자태로 우리에게 언뜻언뜻 자신의 본질적 내면 실체를 보여주며 지나갔다.


가면서 유나가 가르키는 산 위를 보니 무슨 책읽는 사람 같은 형상을 한 자연 바위들이 사람이 깎아서 조각한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비슷한 실루엣으로 놓여있었다. 이런 곳들을 몇 군데 더 지나치다가 유나가 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모두들 나가서 증명 사진들 찍으라고 안내했다.


<딱 봐도 돌거북 상> 



내려서 보니 누가 봐도 딱 돌거북이임을 바로 감지할 수 있는 자연바위상이 놓여있지 않은가. 참으로 우연스러운 자연의 오묘한 작품 앞에서 찰스 다아윈의 현대판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반대측 창조론자들의 새로운 학설적 무기인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려 저술한 진화주의적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책 내용들이 얼핏 떠올려졌다.

 

창조론자들이 이 을 여기서 봤다면, “, 봐라! 이런 특별히 격리된 공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거북이 바위상을 눈 앞에서 보고서도 이걸 만든 신과 같은 조물주가 없다고 하냐?”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도킨스가 이번에도 신이 아닌, 수십억년에 걸쳐 진행되는 진화과정 속에서는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방방 떠며 반박한다 해도 여기서는 도킨스를 지지하는 나조차 긴가민가 헷갈릴 듯 했다.

 

게르 캠프에서 둘째 날 회포 풀며 숙박하기

 

거북이 바위상에서 중명사진들을 찍은 뒤 마침내 게르 캠프촌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부터 유나는 게르 내 구조와 캠프 내 공동시설물을 설명했고, 내려서는 2~4인용의 게르 크기에 따라 일행에게 게르 숙박 배치를 했다. 우리 일행 4명은 우리쪽 구역내 16개 게르 중 12번의 4인용 게르를 할당받았다.


<게르 밖 초원>


<유숙할 게르 촌>


<우리 게르 입구> 


<저물어가는 게르 야외>


내부로 들어가니 침대 4개가 둥근 벽을 따라 놓여 있었고, 한 복판에는 장작 때는 난로가 활활거리며 놓여 있었다. 온도 조절이 되지 않아 바깥은 영하의 날씨인데도 내부는 찜질방 같아 입구문은 잠시 열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각자 적당히 맘에 드는 침대 앞에 가 찜을 하고 그 옆에 영역표시를 위한 캐리어를 풀었다.



<게르 안에서 짐풀기> 


 

<게르 안에서 술판 갓 차려놓고>


게르촌 아래에 식당과 공동화장실 및 샤워실이 비치된 별동 건물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식빵 토스트와 쌀밥, 달걀 후라이, 무슨 야채들이 각 테이블마다 접시들 몇 개위에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 4명은 그냥 귀한 한끼 때운다는 기분으로 고맙게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노부부가 챙겨온 양념 깻잎들을 인심 좋게 건네주기에 밥을 좀 더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게르에 가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 하려 했는데 물끓일 주전자도 없고 해서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용량 보온병은 식당 소속인데다 대여섯개 밖에 없어 임의로 그냥 가져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저멀리 주방 근처에서 주방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유나를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유나가 눈을 찡긋거리며 모두에게 다 가져갈 수는 없으니 자신이 나중에 하나를 옷 속에 꼬불쳐 8시경 12번 게르에 몰래 갔다주겠다 했다. 챙겨주는 가상한 마음에 답례로 한국에서 비상식으로 가져온 신상품 오뚜기 미역라면 5봉지를 비롯해 튀김우동, 믹스커피, 캔 원두커피, 양반김, 모나카 등 모두를 답례로 주겠다고 하니 뭐 꼭 안 그래도 되는데 그리해 주면 더 고맙제..’ 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그림 분위기를 보이는 어둑해진 야경>


식당을 나와 어둑해진 몽골의 초원과 접한 하늘을 보니 둥근 보름달과 함께 희뿌옇게 반짝거리던 별들이 시간이 가며 함초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몽골여행의 하이라이트 같은 순간이었다. 이 장면을 맞이하려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싶었다. 같이 온 김선생이 별자리에 밝아 초등시절에 배웠던 북극성, 샛별 금성을 가리키다 카시오페아며 안드로메다 자리 같은 것을 알려주니 어린 시절 별자리 보며 별헤던 기억도 동시에 떠올랐다.

 

게르 안에 들어와 테이블을 정리하며 전날 밤처럼 사가지고 온 칭기스칸 보드카와 내 몫의 알콜프리 맥주를 꺼내놓고 잔을 몇 순배 돌리는데 약속대로 유나가 큰 보온병에 물을 채워갖고 우리 게르를 방문했다. 모두 다 반색을 하고 환영했다. 내가 미리 싸놓은 제법 빵빵한 선물 봉지를 건네주자 유나도 잘 먹겠다며 반색을 했다.

 

유나가 떠나간 뒤 염사장이 아이고, 이 형 난리났네 난리났어. 아예 집문서라도 있으면 바로 던져줄 기세구만..” 하고 나의 노골적인 선물공세에 너스레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면서 모두 유나에 대한 방담을 서로 펼쳤다. “이 친구가 있는 그대로의 태생적인 맑은 심성으로 관광단을 대하는 것인지, 밝은 인상을 무기로 노회한 프로페셔널리즘을 발휘해 우리를 들고놓았다 하는 건지 둘 중 하나다.”라는 주제에 대해서였다.

 

나는 또 예의 진실은 대척점들의 어느 중간에 있다라는 지론 속에 처음에는 어리버리 했을 전자가 맞고, 가이드 구력이 늘어나며 어느 지점에서 관광단이 까빡 죽는 가를 알고난 뒤 그 지점 공략에 주력 집중을 했겠지만, 그럼에도 노골적인 몰고가기는 하지 않는 중용적인 금도를 지킬 줄 아는 현명한 여인일거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유나 테마가 지나간 뒤는 한교수와 김선생 간에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기화로 맺어진 인연 얘기가 펼쳐졌다. 김선생도 독문학을 전공하여 인문계 사립고교에서 오랜 독어교사 생활을 했으나 2000년대 초부터 독어 대신 일본어 전공 전환자가 아니면 퇴직해야 하는 사태를 맞이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늦깎기 일본어 내공쌓기에 돌입하게 된 수련과정의 시기를 입이 딱 벌어지게 읊어주었다.

 

이 얘기에 뒤질세라 한교수 역시 자기도 대학에서 독일어과가 없어진 그 시절에 앞이 캄캄했지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교육심리학 쪽으로 전공을 바꿔 십수년간 쌓아온 독어과 정규직 교수의 자부심을 뒤로 하고, 50줄이 넘은 나이에 새파란 젊은 교수에게 석사과정생으로 들어가 교육심리학 분야 석사쯩을 다시 따던 시절을 옛얘기 하듯 스르르 풀었다.


<방뇨하며 본 한밤중 몽골의 보름달>


밤은 점점 이슥해 가고 한번씩 몽골초원에 노상방뇨하려 게르 밖으로 나가며 밤하늘을 보니 처연한 달빛 속에 별빛은 최고조로 총총해 있었다. 사람들이 던져준 먹이들을 많이 받아먹어 살이 왕창 찐 괭이들이 내 옆을 휙휙 지나가며 이야아옹하는 소리가 이 지역에 한번씩 출몰한다던 늑대들의 하울링 소리처럼도 들렸다.


<하도 더워 난닝구 바람으로>


보드카 술도 점점 비워져가고 방안의 난로는 무슨 페치카처럼 버얼건 불을 내보이며 실내를 지나치게 덥혀주었다. 염사장과 내 얘기는 마지막 날 저녁으로 미루고 내일 일정을 위해 초저녁 잠 많은 내가 먼저 염치불구하고 침상에 몸을 눕혔다. 다른 세사람은 여전히 아쉬웠는지 좀 더 얘기를 나누다 형광등 불을 꺼고서도 어둠 속에 각자 침대에 누워 두런두런 궁시렁거리며 마지막 에필로그 정리를 하는 듯 했다. 이렇게 둘째날 밤도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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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인 19.02.28. 17:38
몽골에서...엘에이에서....살맛난다 ㅎㅎ
시애틀 머하요

 
김재민 19.03.01. 08:44
수인공이 소생의 잡문에도 항상 과한 격려 반응을 보여주니 글쓰는 에너지가 그래도 쉬엄없이 충전되는 것 같구려. 고맙소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구휼사업에 여념없을 서토는 왜 또 바람잡으며 찝쩍거리능교?..  
                                              
 
김수인 19.02.28. 17:48
김박이 유나에게 완전 끌렸네. 아니 꼴렸네 ㅋㅋ 충분히 그럴만한 미모...
10년전 동기중 점잖기 이를데 없는 하창우가 부부 동반으로 모스크바 갔는데...
미인들이 워낙 많이 지나다녀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던 우리의 하변! 마눌에게 엄청 바가지 긁혔다고 ㅎㅎ     
 
김재민 19.03.01. 09:01
유나는 참 매력있는 친구입디다. 나만이 아닌 모든 일행들이 다 그랬심다. 마누라가 옆에 있는 아재들은 와이프에게 깨지지 않으려 내심 좋아하면서도 호감표시를 억제하는 장면들이 역력하게 보여집디다.

사실 와이프들도 대단한 며느리감 봤다고 내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습디다. 가시나, 이번에 사람들에게서 여왕벌처럼 떠받들려졌으니 지도 한국인 상대로 가이드 하는 보람 팍팍 느꼈을것임다.       
                                           
 
김재섭 19.02.28. 18:03
나도 7~8년 전에 몽골에 가보았습니다.
위 글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잊어 버리고 있던 추억들이 새롬새롬 하게 뜨 오르네요.
내가 간 것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갔었기 때문에 여행 분위기 자체가 조금 틀립니다.
나는 아주 오지들만 골라서 다녔고 마지막날 테를지에서 하루를 쉬었을 뿐입니다.
물론 다니는 중에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말 위에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다음 탐방기도 기다려 집니다 
                           
 
김재민 19.03.01. 08:59
김작가, 그저께 부산 동기회 모임에서 만나 반가왔네요. 밀정 모자 밑에 번쩍이던 안광이 역시 보통 양반이 아니다 싶습디다. 예술과 풍류를 좋아햇던 무슨무슨 화백이나 시인들 같은 풍모가 그대로 배여 있더만요. 계속 멋진 사진들 소개와 배경글을 소생도 기대함다.                                                
 
 
지흥석 19.02.28. 18:10
허걱.. '허르헉'... 요리 이름이 끝내줍니다.. 절대 안잊어버릴듯..ㅋ
                          
 
김재민 19.03.01. 09:10
지박사도 양고기 요리 즐기는 편인교? LA에도 몽골인들 제법 되지요? LA 2편 얘기 잘 보고 있심다. 오래 살아본 터줏대감이 소개하는 인상기이니 더 권위가 있고 흥미가 있습디다. 내가 가봤던 샌프란시스코가 엘에이보다 약간 더 격이 있는 도시라는 거도 처음 알았네요.                                                
 
 
이길영 19.03.01. 11:00
드디어 몽고의 달밤을...
게르 안은 아주 보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잘 때는 양가죽 이불을 덮고 자는데, 여인은 부끄러워서 알몸으로
이불 안속 밑에서 기어서 까꿍하며 사내의 폼에 안기지요...
아~! 아! 신라의 달밤이 아니라,몽골의 달밤이요~~~      
                          
 
김재민 19.03.01. 09:19
길영공의 상상력은 에로틱한 몽환성에 집중되어 있어 우리 늑다리 아재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소, 길영공 입심은 시간이 갈수록 세월을 더 세게 거스르는 힘을 장전하고 있구료..
                                          
 
이길영 19.03.01. 13:22
김재민 상상력이 아니라 같은 유목민인 청나라의 황실에서도 경호상의 이유로 여자들은 일체의 장식을 허용하지 않고
알몸의 여인을 환관이 포대자루에 넣어서 황제의 침대 아래쪽에 내려 놓으면 알몸의 여인이 이불 안으로 살살 기어서 황제에게로 다가 갑니다. 이때 긴장하여 거꾸로 똥궁디부터 들이대고 올라가면 ... 난 그래도 괜찮은데
황제 마음은 어떨란가 나도 모르지...      
                          
 
 
이길영 19.02.28. 18:23
특식 중에 하나가 물을 넣은 양의 위에 뜨겁게 구운 돌을 넣으면 지글 지글 물이 끓어면서 익게 됩니다.
북미의 인디언에게도 비슷한 요리가 있습니다.

"몽골의 드넓은 초원에서 방목되어 길러진 건강한 말 들은 몽골인들에게는 중요하고 건강한 양식을 제공하는데요 몽골인들은 한 시간당 10리터씩 받은 말젖으로 요구르트 원유를 넣고 살짝 데워 요구르트를 만들고, 우유에 소금과 차를 넣어 수태차이를 만들기도 하며 말젖을 발효하여 만든 술인 마유주는 특히나 유명합니다. 몽골에서 마유주는'아이락'이라고 부르는데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馬乳酒는 몽골의 칭기즈칸 시대에는 귀족만의 특권이었습니다.
                           
 
김재민 19.03.01. 09:22
진짜 모르는 것이 없는 무불통지의 경지외다. 잡학대사전 하나 써소.                                                  
 
 
이길영 19.02.28. 18:43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던 처 조부가 해삼위에서 소식이 끊어져서 처조모가 어린 처 삼촌은 걸리고 장인은 업혀서 얼어 붙은 두만강을 건너 물어 물어 남편을 찾아 갔는데, 아주 예쁘고 예쁜 러시아 처자와 살림을 살고 있더라네..
멱살 잡혀 함경도로 끌려 온 처조부는 몇 해를 못 살고 시름 시름 앓더니만 그만 저 세상으로..
처조모는 차라리 그냥 둘을 살게 할 것 하고 후회하였다는데..

러시아 여인들이 젊었을 때는 하얀 피부가 얆아서 그런지 복숭아처럼 뽀얐습니다.
그때의 처삼촌, 장인, 그리고 귀환 후 태어난 작은 처삼촌은 이제 다 돌아 가셨지요..
초량에서 러시아 처자들과 자주 잠자리를 한 모 선배는 러시아 여인이 기냥 죽여준다고
                           
 
김재민 19.03.01. 14:09
러시아 여인들이 색보시에 관대하다는 것은 많은 책의 일화들에서 나도 자주 보고 들었네요. 초량 텍사스 거리에 어슬령거려볼 동기부여가 불현듯 생기외다. 그런데 길영공은 어느 나라 여인들과 연애 좀 해봤는지 그 족보 한번 읊어줄 수 있겠능교?                                                  
 
 
백민호 19.03.01. 06:54
게르에서 자면서 난닝구 차림이니 게르안은 난방이 잘되나 봅니다.
화장실이 미비하니 불편할것 같습니다.
한국의 휴게소 화장실에
비교 해서는 아니되겠지요.
재민박사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나 아가씨 사진은 없나요? 또 혼날까봐 ?
사진이라도 함 봅시다.
ㅎㅎ
                          
 
김재민 19.03.01. 09:33
화장실은 좌변기가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건물에 3개밖에 없어 항상 만원이라 많이 불편했심다. 응가 한번 하려 새벽 5시에 눈뜨자마자 갔는데 금방 다른 아재들도 몰려와 노크질 해쌌습디다.

유나 사진은 1편 글에 잘 나와 있고, 3편 글에도 소개할금다.
                                          
 
이길영 19.03.01. 10:54
김재민 겨울에 몽고에 가서 outdoor 응가를 하려면 복장을 좀 달리 해야 합니다.
개구멍받이 속옷을 입든가 아니면 기저귀 같은 훈도시를 입고 옆으로 살짝 까고 퍼뜩 급똥을 딱 끊어서 누고 말아야지 길게 끌면 이미 나온 부분은 얼어 붙기 때문에 손도끼로 날려야 합니다.이때 불알이 오그라들어 있어도 터지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고...
                           
 
김의철 19.03.01. 16:39
이길영 "부랄이 오그라든다" 는 류의 글은, 서토가 기 특허를 내어논 문장이라..
굳이 활용하려면 다문 얼마라도 사용료를 쫌 내놔야 되지 싶슴미다만-^^
                          
 
이길영 19.03.01. 17:41
김의철 갑자기 부랄 논쟁을 하는 것입니까?
서토는 부랄이고 난 불알입니다.그래서 나온 파생어가 알불스럽다-(겉으로는 좀 거시기 하게 좋아 보여도)
알고 보면 不常(불쌍)하다는 뚯이 있습니다.서토의부랄은 랄불스럽다가 되면 두음법칙에도 어긋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서토가 그린백을 좀 내어 놓으시지요...

 
이길영 19.03.01. 16:58
이길영 우리끼리 불알 논쟁을 하면 여러 동무들이 "그래! 너거 불알 짝불알이다.",너거 불알 주름많다","너거 불알 크다.." 등등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그래서 불알 논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지흥석 19.03.01. 17:47
이길영 철원인지 근처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들 말에 겨울에 화장실에 가면 망치 (해머 or 도끼??)를 놔 두었느데 하도 날씨가 추우니 배설물이 떨어지자마자 꽁꽁 얼기때문에 뾰족한 산처럼 점점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일볼때마다 윗부분을 깨어야 된다는데.. 말로만 들었슴다..

이길영 19.03.01. 17:51
지흥석 분뇨 제거 작업을 하려면 뽀쪽하게 올라오는 똥고드름을 곡괭이와 삽으로 날려야 합니다.
잘못하면 파편이 튀깁니다.그래서 영창에 수감 중인 병사들에게 이 작업을 시킵니다.
                           
 
지흥석 19.03.02. 08:12
                          
 
이길영 19.03.02. 10:07
지흥석 실화 인 것 같습니다. 지 박사는 어디서 이런 이바구를...똥통에 빠진 병사에게 똥통에 빠지면 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똥독도 오르고..
앞으로 똥칸에서 죽는다고 하는 얘기에 그 병사는 집에 연락하여 떡을 해 왔습니다.
임신 중에 힘을 주다 그만 애가 나와서 똥통에 빠진 것을 주워서 시켰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애기는 커가면서 여자 엉덩이만 쫓아 다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길영 19.03.02. 08:42
이길영 여자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 하듯이 옛날에는 화장실에 우비와 우산을 쓰고 여자들이 엉덩이를 까고..

남버원, 남바투를 하는 것을 보다가 뭔가 이상해서 여자가 밑을 쳐다보다 눈동자가 마주쳤는데..
그것이 달걀 귀신의 원조가 아닌지...
그리고 "일본 화장실"로 검색을 해보면...

 
김의철 19.03.01. 17:03
3박짜리의 짧은 여행임에도.. 상당히 긴 여로인듯한 착각을 주는 여행기로 다가오네요.
정황 묘사가 세부적인데다, 사진까지 다양히 더해져서인지..현장에 같이 있는듯한 느낌도 듭니다.

숙소인 천막 안과 야경의 묘사에서는..말내음과 더불은 현장의 후덥하고 차가운 기온의
느낌마저 앉아서 동감될 정돕니다.

안그래도 근자 테마여행기로 세계 곳곳을 찬찬이 보고 있는데..김박사 여행기까지 더해지니
더욱 여행하는 맛에 젖어들게 되는군요.

이제 하나 밖에 안남았지만..계속 같은 분위기로 갑시다.^^      
                          
 
 
이원익 19.03.02. 14:55
게르에 들어가면 주인이 앉는 자리, 손님 자리, 여자 자리, 애들 자리 등이 정해져 있다는데 관광객용 시설에는 그런 게 없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이길영 19.03.02. 18:20
(중략)게르의 기둥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하나의 축선 역할을 한다. 또 하늘과 주인집을 맺어주는 또 하나의 통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몽골 부모들은 자녀에게 기둥을 함부로 만지거나 기둥에 기대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땅에 박히지 않는 기둥이 흔들리면 게르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금기시하는 것이다. (중략)

(게르를 짓기 위해) 터를 잡을 때는 터너의 위치를 먼저 잡는다. 터너가 놓이는 곳이 게르의 중심이며 바로 아래 난로가 있어 음식을 만들고 난방도 한다. 난로는 세 개의 받침돌 위에 놓여 있다. 받침돌은 주인과 안주인 그리고 며느리를 상징한다.       
                          
 
 
이길영 19.03.02. 18:21
며느리는 상속자의 어머니를 뜻하므로 중요하다. 난로가 집안의 중심에 놓이듯 며느리가 집안의 번영을 책임지는 구심점이 된다는 것이다.난로는 게르 중앙에 자리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도 한다. 게르 터를 잡으면 가장 먼저 바닥 가운데 난로자리를 정한다. 난로를 기준으로 물건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난로 위 천장에 뚫린 구멍이 하늘과 연결된다는 상징성도 꽤 중요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몽골인은 난로 연통을 게르 안의 자신들과 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긴다. 몽골 신화에는 연통으로 들어온 신과의 교류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길영 19.03.02. 18:22
밝음과 따사로움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난로 부근이기에 그런 믿음이 생겼나 보다. (중략)

몽골인이 난로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불을 곧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버지만큼 귀한 존재로 떠받들고 믿고 따르라는 가르침으로 난로를 '아버지의 불'이라 부른다. 찢어지게 가난해도 신주와 족보를 모시는 우리의 전통처럼 몽골인은 아버지의 불을 소중히 다룬다. 이런 연유에선지 몽골인은 난롯불이 꺼지면 가문이 기울고 가족에게 재앙이 다가온다며 불씨를 늘 살려두어야 하다고 강조한다. 일부러 불씨를 꺼뜨리는 행위는 결투 신청을 뜻한다. 이 때의 결투는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가문 대 가문의 싸움으로, 지는 쪽은 멸문을 의미한다      
                          
 
 
이길영 19.03.02. 18:23
이처럼 난롯불에는 가문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식을 존중하려면 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난로에 쓰레기나 부스러기를 넣어 태우지 말라. 난로에 물을 붓거나 침을 뱉어서는 곤란하다. 불을 헤집어 불씨를 일찍 사그라지게 하는 행위도 금해야 할 일이다. (중략)

게르 안은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좁은 공간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을 찾기란 불가능하지만 몽골인은 남녀유별을 강조하며 엄격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 지킬 줄 안다. 모든 몽골인은 게르에 들어갈 때 자기가 어느 곳에 앉아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이길영 19.03.02. 18:23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곧바로 왼쪽으로 가고 여성은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구역은 태양이 보살피기 때문이다. (중략)
신성구역은 정문의 맞은 편 북쪽이다. 이곳에는 가문의 최고 연장자가 사용하는 무기와 모린호르, 말재갈 등을 놓아둔다. 옷이나 중요한 물건을 넣어두는 아브다르도 이곳에 자리한다. 밝은 오렌지색의 아브다르 위에는 가족사진이 잘 보이게 놓아 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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