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카와 비엔카 장르

한류(韓流)이전 일류(日流)를 대표했던 록밴드 '엑스재팬' (1/2)

백조히프 2021. 8. 2. 14:23

지난번 요즘 과도한 한류 우월감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처럼 폄하하는 젊은 새대들의  대일본관에 대해 '세월이 이렇게 변했나' 하는 느낌조로 어느 한국 컬럼리스트가 쓴 '화려했던 ‘긴기라기니’ 시대의 일본은 끝났다'라는 글을 제가 올려서 우리 동기님들과 다양한 견해의 댓글 대담을 가졌네요.  

 

하지만 저를 비롯한 나이 든 세대는 일본은 아직 그리 손쉽게 얕볼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슴미다. 그리하여 문화란 것은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교류하며 주고 받는 속에 같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겸해서 오늘의 K-Pop 에 과거 적지않은 문화적 영감과 자양분을 보태준 8, 90년대 일본의 전설적 록밴드 '엑스 재팬'에 대해 아직 생소한 우리 동기 제위를 위해  2편의 글과 주요 연주 레퍼터리들을 2회에 나누어 소개해 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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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韓流)이전 일류(日流)를 대표했던 록밴드 '엑스재팬' 上

 

​2018년 10월 19일

작성: 홍창원 기자

▲ 엑스재팬 멤버 사진

 

한류열풍이 거세다. 단군 이래 한국 문화가 세계 전반에 이 정도로 퍼진 시기는 지금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어를 배우는 세계 곳곳의 청년들이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이 유엔에서 연설한 내용을 발췌해 교제로 활용한다고 한다. '원히트원더'였지만 싸이가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오르며 전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남미 유럽 미국의 젊은이들이 K팝(K-POP)을 들으며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 이런 일이 발생할거라 예견했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심 미래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삼성전자가 만드는 TV는 일본의 소니 등에 밀려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쓰고 창고 한쪽에 처박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에 출장을 가더라도 호텔방에서 삼성 TV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이 패권을 쥐었던 가전 시장이 완벽히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하이얼을 비롯한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 과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국산 TV 품질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아쉽지만 언젠가는 패권이 넘어갈 것이고 그 주인공은 아마도 중국이 될 것이다.

일본이 최강자였던 조선 시장은 10년 전 한국이 패권을 차지해 짭짤하게 재미를 봤다. 200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사 주가는 많게는 100배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냉정하게 말해 조선산업의 키는 중국이 쥐고 있다. 최근 한국 조선 경기가 살아나는 추세를 보이지만 과거와 같은 영화를 그대로 누릴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세상에는 큰 흐름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산업 사이클은 일본에서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K팝이 글로벌 대세가 되기 이전 한국이 문화를 수출하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 아이돌 '뉴키즈온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 내한공연 당시 소녀 팬이 안타깝게 사망한 사실은 이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의 본거지' '팝의 거점'으로 숭상되던 미국 최고 인기 아이돌이 한국을 찾아주신다는 기쁨에 관객들이 잠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 흥분한 관객들이 일거에 무대 앞으로 쏠리며 소녀 팬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

한국 영화가 뜨기 이전 할리우드 영화만큼이나 한국 관람객 눈길을 사로잡은 건 홍콩 영화였다. 저우룬파, 린칭샤, 장궈룽이 펼치는 열연에 한국민 전체가 열광했다. 사실 한국 영화가 한국 내에서 주류로 올라선 건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때 B급 영화 취급을 받던, 스크린쿼터제가 없으면 존립을 걱정해야 했던 한국영화는 이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퀄리티 무비로 진화했다. 한류 한복판에 자리할 만큼 글로벌 입맛을 사로잡는 괴물로 성장했다.

록음악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영화판이나 음악판이나 일단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물 앞에선 한 수 접고 가는 게 예의였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판에서 미국에 못지않은 인기 콘텐츠가 '메이드 인 홍콩'이었다면 음악판에서는 '메이드 인 재팬'이 그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밴드는 '메이드 인 재팬' 록밴드 중 한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록밴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한국에도 무수한 팬을 거느렸던 밴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어 넓디넓은 도쿄돔을 3일 연속 매진시켰던 전설의 밴드, '엑스재팬'이 주인공이다.

엑스재팬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쉽게 알기 위해서는 한국 아마추어들이 이들이 노래를 얼마나 카피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지금은 '부활'의 보컬이 된 김동명이 엑스재팬의 '세이 애니싱(Say Anything)'을 카피해 유튜브에서 사랑받은 것을 전후로 무수한 무림 고수들이 엑스재팬의 노래를 골라 무대에 올렸다.

1990년대에 학생, 고등학생 시절을 거친 록 좀 듣는다는 '록키즈'들은 엑스재팬의 요시키가 드럼을 빨리 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존재라는 둥, 엑스재팬 기타리스트 히데가 세계 몇 대 기타리스트 반열에 올랐다는 등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엑스재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세계에서 드럼을 가장 빨리 치는 사람이 누군지는 기네스북 도전을 통해 가려질 일이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번 공론화된 가짜뉴스가 감수성이 민감한 학생들 입을 거치며 더 세를 불리는 경향이 파다했다. 게다가 요시키는 재능 있는 작곡가이자 작사가였지만 드럼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던 캐릭터였다).

 

▲ 엑스재팬 전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의 연주장면.

 

엑스재팬은 K팝보다 먼저 세계로 뻗어나간 'J팝'을 상징하는 존재로 봐도 무방하다. 사실 록 분야를 봤을 때 엑스재팬보다는 라우드니스(Loudness) 쪽으로 실력에 더 무게가 쏠리는 것은 사실이다(베이시스트 타이지는 엑스재팬 탈퇴 이후 라우드니스로 넘어가기도 했다.

라우드니스는 내한 공연을 펼친 적도 있었는데, 당시 콧대 높던 서구 록 평론가들 사이에서 실력만큼은 인정받던 라우드니스를 잡겠다는 취지로 나온 게 임재범과 김도균이 뭉친 밴드 '아시아나'였다. 아시아나는 라우드니스 내한 공연 오프닝을 서는데 당시 임재범의 보컬에 놀란 일본 멤버들 사이에서 한국에 저런 보컬이 있었냐며 감탄한 바 있다). 엑스재팬이 전성기였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한국이 일본음악에 대한 문호를 열기 전이었다.

따라서 엑스재팬의 음반을 정식으로 수입할 수 없었고 빽판이라는 불법 복제음반이 암암리에 거래되곤 했다. 이 열악한 환경을 뚫고 엑스재팬은 한국에서 웬만한 서구 밴드가 누린 것 훨씬 이상의 인기를 가져갈 수 있었다(아마도 금기된 것에 더 끌리는 인간의 심리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1991년 엑스재팬 공연 당시 보컬리스트 토시.

 

왜 엑스재팬이 한국에서 이토록 인기를 끌었는지를 생각하면 크게 세 이유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음악 스타일이었다. 엑스재팬은 분명 메탈밴드였다. 요시키의 자전거를 밟는 듯한 더블베이스에 히데의 현란한 속주, 타이지의 탄탄한 베이스에 토시의 고음 보컬은 메탈밴드의 전형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멜로딕 메탈을 일본에 들여와 크게 흥행시킨 저력이 있었다.

하지만 엑스재팬이 시종일관 메탈밴드였냐면 꼭 그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한국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엑스재팬이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들의 발라드 넘버였다. 실제 이들은 밴드 커리어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발라드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리고 탄탄한 록 기반 연주에 특유의 '뽕끼'를 첨가하는 요시키의 작곡 실력은 한국인 청자에게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일본 엔카가 한국의 트로트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메탈에 뽕끼를 섞은 이들은 록발라드는 한국 사람 입장에서 듣기도, 따라 부르기도(음이 너무 높아 힘들긴 했지만)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록에 별로 관심이 없던 중·고등학생이 엑스재팬의 발라드로 록에 입문해 엑스재팬의 메탈 버전을 듣다가 본류의 미국의 록을 찾아 듣는 케이스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쉽게 말해 피가 끓는 젊은이들을 록에 세계로 입문시킬 수 있는 인도자 노릇을 한 것이다(엑스재팬의 Say Anything, 엔들리스 레인(Endless Rain), 티어스(Tears) 등 노래가 대표적이다. 엑스재팬의 발라드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한국 '더크로스'의 '돈 크라이(Don't Cry)' 같은 발라드라고 보면 된다. 이 곡 역시 엑스재팬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곡이다. 티어스는 엠씨더맥스가 '잠시만 안녕'이라는 곡으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이들의 외모였다. 이들은 밴드 키스(KISS)의 영향을 받은 듯 외모에 엄청나게 신경 쓴 밴드로 유명하다. 얼굴을 두꺼운 화장으로 가려 웬만한 여자 연예인보다 훨씬 아름답게 분장했고, 갖가지 색깔로 염색한 장발의 머리는 스프레이 등으로 딱딱하게 굳혀 하늘로 치솟게 연출했다. 일본판 글램록(Glam rock)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록을 많이 듣는 감수성이 민감한 사춘기 소년들에게 이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990년대 당시 한국의 중·고등학생은 빡빡한 두발규제에 시달려 머리가 좀 길다 싶으면 머리카락이 잘리던 수모를 겪곤 했는데, 엑스재팬이 선보이는 파격적인 패션과 화장은 대리만족을 주는 존재였다. 게다가 이들의 패션감각은 당시만 하더라도 매우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져 수많은 '워너비'를 양산하기도 했다.

빅뱅의 리더 지드래곤(GD)의 패션이 글로벌 전역에서 주목받는 것처럼 당시 엑스재팬의 파격적인 패션은 수많은 폴로어를 양산하는 구조였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엑스재팬 팬들은 어렵게 구한 공연 실황 비디오나 일본 잡지 등을 학교에서 주고받으며 엑스재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곤 했다.

세 번째는 이들이 일본 밴드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한국과 일본의 국가 간 격차가 거의 사라졌지만 일본 거품경제가 활황이던 1990년대, 두 국가 간 격차는 꽤 컸다. 일례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기 직전인 199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2500달러를 기록해 같은 시기 한국(1만2300달러)의 3배를 넘었다. 이보다 시계를 5년 뒤로 돌려 한국 1인당 GDP가 6500달러에 불과했던 시절 일본의 1인당 GDP는 2만5000달러를 넘었다.

1990년대 일본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 일본의 국운이 정점으로 뻗어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엑스재팬의 전성기는 거의 정확히 일본의 국력이 정점을 찍었을 때와 일치한다. '일본 경제 프리미엄'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 당시 많은 한국인은 '드래곤볼'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만화를 봤고 일본에서 만든 게임으로 여가를 즐겼으며, 좀 더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길 필요를 느껴 일본어를 공부하곤 했다(한국어로 정식 번역되기 이전의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경제적 영향력과 문화적 영향력은 결코 따로놀 수가 없기에 일본의 최전성기에 혜성처럼 터져나온 엑스재팬의 음악은 한국에서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 시나위 시절 서태지.

 

당시 엑스재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한국의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는 서태지의 예명 논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기 이전 한국의 '리빙 레전드'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다. 나이가 어린데도 실력이 출중해 심지어 나이를 올려 활동해야 했던 그의 본명은 잘 알려진 대로 정현철이다. 왜 서태지란 이름이 붙었는지를 놓고 신대철과 서태지의 설명이 엇갈린다.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설명은 이렇다. 엑스재팬에는 걸출한 실력을 가진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가 있었다(후술하겠지만 지금은 고인이 됐다. 엑스재팬으로 활동하던 그는 밴드 탈퇴 이후 라우드니스에 가입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라우드니스에서 나온 이후 여러 밴드를 거치던 그는 커리어가 내리막으로 떨어진 데다 이혼 등 가정사까지 겹쳐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노숙자만을 노리던 청소년 사냥에 걸려 치아가 4개나 빠지는 중상을 입은 그는 간신히 재기에 성공하지만 우울증 등이 겹쳐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다 체포됐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타이지는 많은 베이시스트의 우상이 될 정도로 빼어난 실력과 인기를 과시했는데, 타이지만큼 훌륭한 베이시스트가 되라는 의미로 서쪽의(일본 입장에서 보면 한국이 서쪽이니까) 타이지란 개념의 서태지(SEO TAIJI)란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시나위 활동 시절 서태지는 꽃미남에 머리를 길게 길러 엑스재팬을 연상시키는 외모로 활동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훗날 서태지는 이 같은 설명을 공식적으로 몇 차례나 부인했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서태지란 이름이 나왔다고 설명한다(누구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각자 판단할 몫이다. 그런데 서태지가 엑스재팬의 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타이지의 팬이라기보다는 기타리스트 히데의 팬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의 이름 출처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정도로 엑스재팬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던 셈이다. 물론 짙은 화장에 발라드나 불러대는 엑스재팬이 록밴드 축에나 낄 수 있느냐며 엑스재팬을 싫어했던 록키즈들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문화에 호의적인 마니아층 사이에서 특히 엑스재팬의 인기가 높았던 측면도 있다. 다음 편에서는 엑스재팬의 결성부터 해체, 재결성부터 밴드 멤버의 소개까지 다양한 측면을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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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재팬(X-Japan)-Endless Rain

 

 

X-JAPAN(엑스 재팬)은 1982년 치바현에서 드러머 겸 피아니스트 요시키와 보컬리스트 토시를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엑스 재팬의 결성 당시 밴드명은 X였다. 그러나 미국 밴드 X와 밴드명이 동일하여 1992년에 엑스 재팬으로 밴드 명을 바꾸었다. 엑스 재팬은 하드 록 파워 메탈(스피드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음악과 동양의 서정적 요소가 가미된 발라드 형식의 록 음악 등을 추구했다.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1997년 해체를 맞게 되었다. 10년이 지난 2007년 영화 쏘우 4의 엔딩테마인 신곡 〈I.V.〉를 발표하며 재결성하였다.

<90년대의 엑스 재팬>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창조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29분짜리 대곡 ART OF LIFE를 통한 세계 최초의 심포닉 파워 메탈과 시각적 예술까지 강조한 비주얼 락이 있다.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일본의 메이저 음악 시장에 올리고, 비주얼계라는 일본 록 특유의 성향을 개척했다는 점, 수많은 후배 밴드, 팔로워를 양산해내고 있는 점, 메탈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인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다.

또한,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열고 이어나가는데 크게 기여를 했기에 그 당시 일본 대중음악계에서는 충격 그 자체로 불리어졌다. 활동 당시에는 평론가들의 평가가 박하기도 했지만, 오늘에 와서는 J-헤비메탈 음악을 메이저 시장에 올려 인기를 오랜 기간 유지함으로써 수많은 후배 헤비메탈 밴드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밴드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1) 요시키 (드럼, 피아노): 본명은 하야시 요키시이며 팀의 리더. 클래식 전공자로 서정적 작곡과 편곡의 대가
2) 토시 (보컬): 본명 데야마 도시미츠. 타고난 미성으로 샤우팅 보컬 담당. 피아노와 기타도 연주
3) 파타 (기타)
4) 타이지 (베이스)
5) 스기조 (기타, 바이올린)

연주의 기​본적인 구성은 트윈 기타로 기타 솔로 부분을 두 기타가 나누어서 연주하며, 보통 파타가 백킹을 히데가 리딩 부분을 맡았다. 리더인 요시키는 작곡과 피아노, 드럼 파트를 도맡았다.

 

​<1989년 스튜디오 녹음 https://youtu.be/389rmyvS8mU>

 

Endless Rain

I'm walking in the rain
난 빗속을 걷고있어요

行くあてもなく傷ついた身體濡らし
유끄아떼모나꾸 기즈쯔이타카라다누라시
정처없이 상처받은 몸을 적시우며

絡みつく凍りのざわめき
가라미쯔꾸 고오리놋자와메끼
휘감겨붙은 얼음 부서지는 소리

殺し續けて 彷徨ういつまでも
코로시쯔즈케테 사마요오 이쯔마데모
감정을 계속 삭이며 방황해요, 언제까지라도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내가 당신 잊을 수 있는 그때까지
 


眠りは麻藥
네무리와마야끄
잠은 마약과 같이

途方にくれた心を靜かに溶かす
토호오니끄레타 고코로오 시즈카니 도카스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을 평온히 가라앉혀요

舞い上がる愛を 踊らせて
마이아가르 아이오 오도라세테
날아오를 것만 같은 사랑을 춤추게 하고

ふるえる身體を 記憶の薔薇につつむ
후루에르 카라다오 기오쿠노 바라니쯔쯔무
떨리는 몸을 기억 속 장미로 감싸줘요

I keep my love for you to myself
나만이 당신 향한 사랑을 지켜가요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고코로노기즈니
끝없는 비, 내 마음의 상처를 적시고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내게서 모든 증오와 비애를 잊게 해요

Days of joy, days of sadness slowly pass me by
As I try to hold you, you are vanishing before me
You're just an illusion
When I'm awken, my tears have dried in the sand of sleep
I'm a rose blooming in the desert

It's a dream. I'm in love with you
그것은 꿈이에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まどろみ抱きしめて
마도로미 다키시메테
꿈을 간직한 채...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고코로노기즈니
끝없는 비, 내 마음의 상처를 적시고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내게서 모든 증오와 비애를 잊게 해요

I awake from my dream
I can't find my way without you
 
The dream is over
꿈은 사라졌어요

聲にならない言葉を繰り返しても
코에니나라나이 고또바오 꾸리카에시테모
될 수없는 말을 되뇌여도

高すぎる灰色の壁は
다카스기르 하이이로노카베와
너무도 높은 잿빛 우울함의 벽은

過ぎ去った日の思いを夢に寫す
수기삿타히노 오모이오 유메니우츠스
지나간 날 느낌을 꿈처럼 그려주어요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있을 때까지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고코로노기즈니
끝없는 비, 내 마음의 상처를 적시고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내게서 모든 증오와 비애를 잊게 해요

Endless rain, let me stay evermore in your heart
Let my heart take in your tears, take in your memories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고코로노기즈니
끝없는 비, 내 마음의 상처를 적시고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내게서 모든 증오와 비애를 잊게 해요

 

(번역: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