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체험기

의성 근교 함부르크 옛동료를 만나고 오다

백조히프 2021. 11. 2. 01:52

의성 근교 함부르크 옛동료를 만나고 오다

 

 

작성자: 김재민

2021. 10. 30

 

지난 10/22()일 A대 법대 서교수와 그가 두달 전에 새로 뽑은 테슬라 전기차에 동승하여 의성 근교 점곡 마을을 방문했다. 80년대 중후반 함부르크 유학시절 음악(쳄발로 연주와 지휘)을 전공하며 나와도 인연을 맺었던 음악가 권영국씨가 귀국 후 활발한 연주와 지휘자 생활을 끝낸 뒤 자신의 친가가 있는 이 점곡 마을에서 유유자적하는 귀촌 은퇴생활을 한다는 전갈이 왔었기 때문이었다.

 

<권마에의 연주회 포스터와 가족 사진>

 

서교수와 함부르크에서 같은 학생기숙사에 살며 절친이었던 권마에가 서교수를 통해 나와도 교우하게 되자 내가 클래식 음악에 좀 관심이 있으며 독일가곡도 몇 개 부를 줄 안다는 사전정보를 건지고서는 자기 기숙사에 초대해 피아노 반주 넣어 줄테니까 아는 가곡 한번 불러보라고 바람 잡으며 꼬드긴 것이 우리의 첫 본격 만남이었다.

 

<권마에 연주회에 응원나온 가족>

 

처음에 고사하는 체 하다 결국은 분위기상 한 때 좀 불렀던 슈베르트의 숭어’(Die Forelle)를 유명 독일 가곡(Lied) 가수 프리츠 분더리히의 창법으로 한번 흉내내어 보았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주제에 카셋 테입만 열나게 듣고 모창한 것에 불과했는데도 이 아재는 내 목소리가 꽤 미성이라 조금만 훈련 받는다면 괜찮은 아마추어 가수로써 제법 자질이 엿보인다고 부추겼다.

 

평소에도 귀가 얇기로 유명한 김모인지라 그 다음날 권마에가 알려준 음대 지망생들이 거쳐간다는 함부르크 오토마쉔에 있는 음악학원(콘저바토리움) 성악 파트에 덜컥 수강신청을 했다. 담당 독일인 튜터와 전화통화를 통해 총 9번의 일대일 레슨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엄청 좋아한 프리츠 분더리히의 CD들에 평소 푹 빠져 있던 터라 이 기회에 한번 제대로 된 분더리히류의 발성법과 감성적 표현 테크닉을 연마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이런 결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 둘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던 와이프가 당신 미쳤수? 경영학 졸업시험(디플롬 클라주어)을 치고 있는 와중에 이 무슨 난데없는 성악 레슨을 받는다고.. 정신이 있소, 없소?!!’ 하고 방방 뜨는 바람에 성악공부는 먼 훗날로 미루기로 하고 너무나 아쉽게도 레슨 신청취소를 학원측에 통고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마추어 성악도 제자 어찌 한번 키워 자신의 존재가치를 함부르크 유학생 사회에서 증명해 보이려던 권마에도 이 철회소식에 크게 실망하며 아쉬워했다. 다음에 그 기회를 꼭 다시 살려보자고 서로 언약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학교를 함부르크가 아닌 독일 타 지역과 벨기에로까지 옮기고부터는 서로 연락이 끊긴 채 어언 30년이 흘러가 버렸다.

 

지난 여름 서교수가 김선배님, 같이 함부르크에서 지내던 권영국씨 알지요?.. 한국에 오래 전에 귀국한 뒤 음악가 생활 한참 하다 지금은 의성근교 소재 자기 본가를 전원주택으로 개조해 지역사회에 음악문화 전도사로 봉사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낸다 합디다. 선배님이 부산에서도 생활한다하니 무척이나 반가와 하고 조만간 의성에 방문해 줄 것을 요망하데요..” 하는 소식을 전해왔다.

 

<30년 만에 만난 후 연주악보 보는 권마에>

 

알려준 번호로 권마에와 통화하니 , 김재민씨 음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여전히 펄뜩거리는 에너지가 있어요.” 하고 오랜 기간 후의 연락닿음을 진심으로 반가와 해주었다. 나의 살아온 행적을 전하는 중에 속사포같은 질문들을 통해 들은 본인의 그간 행적은 독일과 벨기에에서의 음악 공부를 끝낸 뒤 한국 와서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로 생활하다 한 외국인 아마추어 합창단도 지휘하던 중 단원으로 노래하던 지금의 독일인 아내와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슬하에 딸도 3명이나 두면서..

 

한달 전인가 권마에가 부산 동백역 근처에 사는 서교수 아파트를 자신의 큰 딸과 방문해서는 김포에 올라와 있던 나와 통화를 하고는 지난 30년 사이에 서로 어떻게 변모했는지 알고 싶으니 겸사겸사 빠른 시일내에 서교수와 자신의 의성 본가를 방문해 달라고 진심으로 요청해왔다. 나도 함부르크에서의 레슨신청 옛 기억도 나고 해서 바로 오케이 하며 제안을 수락했다.

 

한 사나흘 전에 의성행을 통보하고는 10/22()일 서교수와 동백역에서 만나 그의 테슬라 전기차로 대구를 지나 상주와 의성을 지나 안동 가는 중간에 있는 점곡 소재 권마에 집으로 갔다. 서교수가 태슬라 차는 한 7000 한다 했는데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1800 정도를 받고 자가 구입비의 반 정도는 은행 대출로 구매했다는데 몰아보니 기름값이 들지 않아 가솔린 차의 1/10 충전비용으로 한달 평균 50씩 차량유지비 절감을 한다고 했다.

 

다만 초창기라 전기충전 인프라가 취약한게 큰 애로이긴 해도 앞으로 전기차가 대세이니 이 문제도 곧 해소될거라고 낙관했다. 제법 반자율 주행도 가능하고, 순간 가속도 포르쉐나 람보르기니 같은 스포츠카 수준으로 낼 수 있으니 그 점도 매력적이었다. 다만 풀충전 후 최대가동 거리가 480킬로 밖에 안되는데다 그것도 바깥 기후가 안좋고, 사람을 더 태우고 짐 무게가 무거우면 더 짧아진다 하니 충전소가 부산-상주 간에 딱 한 군데만 있는 현 상황에서는 주행 중에 방전될까 운전자를 항상 두렵게 만들었다.

 

점곡에 도착

 

부산을 떠난지 4시간이 넘어 권마에가 가르쳐준 주소로 내비에 입력해 점곡 마을에 들어섰다. 만나자던 지점에 도착하니 이 아재가 나와서 한 30년 만에 우리는 잊었던 옛 세월을 상기하며 감회 어리게 다시 만났다. 나를 본 첫마디가 , 김재민씨 머리 숱이 한참 빠졌네!.. 귀공자 같았던 용모도 많이 삭았고..”였다. 내쪽에서 본 그는 흘러간 세월 속에 기억 속 옛 모습은 제법 퇴색되었지만 그가 풍기는 예인적 분위기는 곰삭은 고수처럼 도도해 보였다.

 

<권마에의 점곡 본가 거실>

 

그가 사는 집으로 안내되니 제법 넓은 마당과 집벽 같은 게 없는 열린 분위기 속에 약간 개축된 시골집이 나타났다. 마당 주변은 권마에가 자기 취향대로 꾸민 목가적 풍경이 풍겨졌다. 우리가 온다고 환영연과 함께 자신의 고향 죽마고우와 지역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하우스 콘서트를 펼치려 한다고 알려줬다. 주방에서는 죽마고우 부인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위해 식사준비를 한참 하고 있었고..

 

<목관피리 연주하는 김선생> 
<아코디온도 연주하는 김선생>

 

대구에서 온 성악가 김선생은 독일유학까지 다녀온 양반인데 족보를 따져보니 나와 함부르크 시절 절친했던 조태영 박사와도 남독에서 잠깐 유학생활을 같이한 인연으로 폰연락처를 알려주니 바로 통화해 안부를 나누는 기민함과 결단력이 있었다. 테너였지만 목관피리로도 연주하고 아코디온도 다룰 줄 알아 권마에의 피아노와 함께 이중주 연주실력도 과시했다.

 

<베이스 이선생>
<연주 후 3인 음악가>

 

 

조금 있으니 또 다른 성악가 한 양반이 도착했는데 로마음악원에서 조수미와 같은 시절 유학한 기간이 있었다는 베이스 이선생이었다. 권마에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몇 곡을 울림이 큰 전설의 베이스 표토르 살리아핀의 음색으로 능숙하게 들려주었다. 근자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현역 음대교수직은 내려놓았지만 지역사회에 문화적 재능을 선사하는 기분으로 이번에 이 집에서 펼쳐지는 작은 하우스 콘서트에 기꺼이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콘서트 전반부가 끝나고 준비된 저녁식사를 모인 사람 모두가 같이 했는데 그 분위기가 마치 수년전 인기를 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쌍문동 동네공동체 분위기처럼 사람들 간의 유대와 연대감이 끈끈한 지역정서를 연출해 내었다. 권마에가 평소 지역에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자산을 별다른 대가없이 제공한 덕분인지 이런 유사시에 우렁각시 역할을 해주는 죽마고우 신사장과 동네사람들이 많아 보여 이 아재가 제대로 살아온 체취가 흠뻑 풍겨왔다.

 

<양고기국과 큼직한 치즈가 별미였던 첫 저녁 만찬>

 

식사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이 지역 문화원 원장이라는 전직 교원 출신의 김원장 부부도 내방했다. 권마에가 지역사람들에게 오늘 부산에서 자신과 독일에서 같은 유학시절을 보낸 경영학과 법학의 박사짜들이 동방박사처럼 자신의 누거를 방문한다고 홍보를 한참 한 덕분인지 지역 문화계 인사들이 총출동한 상황이 되었다. 우리와도 수인사를 하고 환담 속에 식사를 마치고는 콘서트 2부가 다시 개최되었다.

 

<테너 김선생과 감상하는 베이스 이선생>

 

원장 부부는 이런 촌구석에서 생각지도 않은 유럽식의 하우스 콘서트가 펼쳐지는 게 못내 감개무량한 듯 진심으로 이 분위기를 음미하듯 집중해서 클래식 소품음악 연주들에 빠져주었다. 이번에는 테너 김선생이 베토벤의 이히 리베 디히를 비롯한 몇 개의 독일 가곡과 민요곡을, 이선생이 우리 가곡들을 들려주었다. 마지막에 권마에가 모차르트의 즉흥곡을 솔로로 피아노 연주한 뒤 기억이 나지 않는 소품 곡 한 두 개를 앙코르에 답해 연주해 주었다.

 

손님들이 다 가고 서교수를 비롯한 우리 세명은 식탁에 앉아 함부르크 시절을 복기하는 방담을 한참 나누었다. 쎄봉(서교수)이 우리집에 초대받아 방문한 날이면 기숙사에 돌아와 이웃 방에 있는 권마에에게 그렇게나 자랑하더란 얘기와 자기는 그때 왜 같이 불러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원망감도 데카메론 소설 속 고백 분위기처럼 거침없이 내뿜어졌다.

 

아차, 싶었지만 함부르크 시절 권마에는 성악 레슨 사건 외에는 전공도 다르고, 내가 교회도 다니지 않아 그리 자주 엮일 계기가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소홀히 대했다고 변명했다. 다른 한편 와이프 박모가 저그 남편에게 쓸데없는 바람을 잡아 성악레슨 신청하게 한 장본인이라 탐탁해 하지 않아하는 권마에에 대한 이미지를 쎄봉이 미리 읽고는 박모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권마에의 동반초대를 알아서 차단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슬쩍 지나갔다.

 

아무튼 그 밥 한끼 초대 추억이 뭐라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섭섭함을 간직한 권마에의 솔직하고도 소탈한 뒤끝 심정토로에서 그 당시 독신 유학생들의 팍팍했을 생활여정이 미루어 짐작되었다. 어쩐지 불우이웃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불찰에 적지 않은 자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다음번 서울쪽에서 만나면 우리 와이프와 함께 식사대접 한번 하겠다고 사죄의 제안을 했다. 지금 독일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한국 중앙대에 교환학생으로 나와있는 큰 딸도 대동하고 나오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독일 와이프와 만난 스토리도 들어보니 주서울 독일대사관의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이 여인이 권마에를 합창단에서 보고는 첫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앞뒤 안가리고 전격적으로 결혼까지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부인과 성장한 딸 세 명이 나와 있는 사진을 보니 그럴 듯 하기는 해도 어쩐지 권마에가 가족 구성원에서 좀 외톨이가 된 듯한 틈새 분위기가 소설적 상상력이 여전한 내게 슬쩍 비춰졌다. 딸 셋 중 하나는 한국인 사위를 어떻게든 보게 하겠다는 내심을 토로하는 것을 봐서도..

 

<밤길에 만난 동네 문화관 건물>
<교교하게 비춰지는 보안등 불빛>

 

방담을 마치고 권마에의 제의에 따라 밤길의 동네 순방 산책이 이루어졌다. 한 밤중 교교한 달빛과 골목을 드문드문 비추는 보안등 속에 나타난 시골의 정취가 제법 은은하였다. 분위가가 괜찮아 좀 더 탐행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오른 쪽 허벅지 근육이 좀 오래 걸으면 당겨오는 내 통증 때문에 아쉽게도 한 30분 정도만 걷다 돌아와야만 했다.

 

돌아와서 서교수는 권마에와 같은 방에서, 나는 따로 떨어진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권마에가 그림 그리기도 좋아해 방에는 자신이 틈틈히 그린 추상화도 몇 점 걸려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이웃들로부터 얻은 단호박 등 여러 수확물들이 용기에 담겨져 있었다. 나는 얼른 잠이 들었지만 한 밤중에 몇 번인가 마당에 나가 소피를 보더라도 바로 잠이 드는 좋은 습관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날 일정

 

아침에 두서너번인가 꼬끼요! 하는 닭우는 소리를 듣고서는 일어날 채비를 했다. 옆 방에서는 아직 둘 다 일어날 기색을 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욕실에서 세면과 모닝 계산을 하고 나오니 김재민씨, 벌써 일어났능교?“ 하는 권마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일어났다하니 얼마 안있어 자기도 일어났다면서 피아노가 있는 거실 방에서 내게 예전에 불렀던 슈베르트의 숭어와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중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 반주해 줄테니 악보보고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프리츠 분더리히-시인의 사랑 전곡>

(1번: 0:04~1:24, 7번: 7:15~8:30, 12번: 14:34~17:01)

 

나는 1이 아름다운 5월에7나 그대 원망하지 않으리’, 12새벽 빛 밝아 오는 여름 아침에를 부를 수 있다 하니 바로 반주가 들어왔다. 가장 자신있는 곡은 7번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곡은 12번이었다. 하지만 마수걸이로 부른 1번 곡조차도 하도 오랜 기간 따로 불러본 적이 없는데다 목청도 아침이라 아직 잠겨있어 내가 들어도 꽤 버벅거린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시원찮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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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Im wunderschoenen Monat mai  

 

Im wunderschönen Monat Mai,   이 아름다운 5월

als alle Knospen sprangen,  온 꽃몽우리들이 터졌을 때

da ist in meinem Herzen  내 가슴에는

die Liebe aufgegangen  사랑이 피어올랐네  

 

Im wunderschönen Monat Mai,  이 아름다운 5월

als alle Vögel sangen, 모든 새들이 노랠 불렀을 때

da hab' ich ihr gestanden  그녀에게 고백했네

mein Sehnen und Verlangen  내 그리움과 열망을

 

(독어 번역: 김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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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칠 점을 발견하기 위해 독일시절 같이 연습해 본 7번곡 역시 멜로디, 박자, 발음 등이 엉망인데다 내 특기였던 고음 파트도 제대로 내질러지지 않는 최악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권마에가 30년 전 자신이 들었던 내 미성과 자신있던 발성이 다 어디로 갔소? 하고 짐짓 한탄하고서는 자신의 역할이 발견되자, 나 역시 이 기회에 제대로 된 교습을 받아 독일가곡 부르기 몇 곡이라도 건져가자 하는 꿍심이 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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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Ich Grolle Nicht 

 

Ich grolle nicht,   나 원망하지 않으리

und wenn das Herz auch bricht, 심장이 찢어진다 해도

Ewig verlor'nes Lieb!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Ewig verlor'nes Lieb!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Ich grolle nicht. 나 원망 않으리

Ich grolle nicht. 원망 않으리

 

Wie du auch strahlst 그대가 다이어먼드 광채 속에

in Diamantenpracht, 빛난다 하더라도

Es fällt kein Strahl  그대 마음 속 밤에는

in deines Herzens Nacht.  어떠한 빛도 떨어지지 않네 

Das weiß ich längst. 나 오래 전에 알고 있었다네

 

Ich grolle nicht,  나 원망하지 않으리

und wenn das Herz auch bricht,  심장이 찢어진다 해도

Ich sah dich ja im Traume, 그대를 꿈속에서 보았네

Und sah die Nacht  그대 심장 한 곳에서

in deines Herzens Raume,  어둔 밤도 보았네

Und sah die Schlang',  그리고 뱀도 보았네

die dir am Herzen frißt, 그대 심장 먹어치우는

Ich sah, mein Lieb, 내 사랑

wie sehr du elend bist. 그대가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도 보았네

 

Ich grolle nicht,  나 원망하지 않으리

Ich grolle nicht,  원망하지 않으리

 

(독어 번역: 김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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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에 있는 음표들과 표현문귀들을 권마에가 수신호 하는대로 살펴보고 선창 시범대로 따라부르니 이런 페이스로 조금만 더 연습하고 교정하면 독일시절의 발성과 음감은 어쩌면 되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앗싸 하고 본격 몰두 타임에 들어가려는 중에 권마에의 죽마고우인 신사장이 집에서 준비해온 전복 추어탕을 커다란 냄비에 들고 들어왔다. 귀한 아침걸이가 배송되었기에 좋은 성악교습 타임을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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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Am leuchtenden Sommermorgen

 

Am leuchtenden Sommermorgen    새벽 빛 밝아오는 여름 아침에

geh' ich im Garten herum.     나 정원을 돌아다니네

Es flüstern und sprechen die Blumen,    꽃들은 속삭이며 말을 걸지만

ich aber wandle stumm.   나 아무 말 없이 거닐기만 하네

 Es flüstern und sprechen die Blumen   꽃들은 속삭이며 말을 걸다

und schau'n mitleidig mich an:  안된 듯 나를 쳐다보네 

Sei unserer Schwester nicht böse,  우리 자매 우울해 하지 말아요

du trauriger blasser Mann!  그대 슬프고도 창백한 남자여! 

 

(독어 번역: 김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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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장이 권마에의 면을 세워주려 서프라이즈 아침을 자기 어부인에게 부탁해 준비해 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이 동네는 타임머쉰을 6, 70년대로 돌려타고 갔는지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외부손님 식사대접 정신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다 떡받은 듯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옹골찬 식사를 하고 나니 세상만사 뭐 크게 부러울 게 없었다. 식사가 끝나 커피 한잔씩 하며 신사장께 고마움을 표시하는 환담을 나누는 중에 웬 30대 청년이 기타를 하나 들고 자기 삼촌과 함께 권마에에게 인사차 집안으로 들어왔다.

 

소개를 듣고 보니 삼촌은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며 어제 밤 이 집에서 펼쳐진 하우스 콘서트 소문을 들었는지 클래식 기타연주학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7년 간이나 수학했다는 조카를 권마에에게 눈도장 찍게 하려 오디션 연주를 자청하러 온 것이었다. 나야 땡큐라 여기며 감상 자세에 돌입했다. 과묵하면서도 묵직한 풍모를 지닌 청년은 알폰소 무하의 그림에 나오는 거리의 악사같은 포즈로 로드리고의 아랑페즈 협주곡 중 기타 독주 파트를 마수걸이로 감정 풍부하게 연주해 주었다.

 

같이 들은 서교수가 답례 앙코르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요청하자 상용으로 가는 코스인 양 바로 한 기타뜯기를 펼쳐주었다. 아주 안정적인 주법 속에서 서정성을 물씬 풍기게 연주했다. 큰 박수를 보내며 나는 기왕지사 이리된 것 비발디의 화성의 영감이나 줄리아니의 기타 협주곡 A장조에 나오는 기타 독주 부분도 부탁할까 했으나 악보도 없고, 받쳐주는 오케스트라도 없는 판에 너무 속보이는 연주 요구 같아서 그만 두었다.

 

권마에는 자신의 눈에 바로 든 듯 이 장소에서 행할 이번 크리스마스 하우스 콘서트에 기타청년을 연주자로 꼭 초대하고 싶다하니 청년도 바로 오케이 하며 수락하였다. 나도 그에게 내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건네주었다. 아마도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는 나와 서교수도 이곳에서 한번 더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다가왔다.

 

이제 밝은 낮에 동네 산책 길에 들어서는데 기타 청년을 데리고 왔다 같이 헤어진 이웃 양반으로부터 자기 집에서 점심 식사대접 준비를 해놨으니 부디 들려달라는 전갈을 해왔다. 이웃들로부터 끊이지 않은 식사자리 초대에 권마에의 가오가 살아오른 듯 짐짓 우리와 산보 선약이 있어 곤란한 척 한번 튕기다가 약식코스로 얼른 다녀오겠다고 대접을 수락하였다. 서교수와 내가 이 동네에서 누리는 권마에의 확고한 문화권력을 치세워주자 이 아재가 기분이 좋아 계속 킁킁 해대었다.

 

<즐겁게 가진 기타 청년집 점심초대 자리>

 

기타 청년도 함께 실외에서 가진 점심자리 역시 정성을 다한 음식차림과 신사장의 재담 등이 적절하게 어울려 아주 푸근했다. 기타 청년의 연주력을 치하하며 7년간이나 보냈다는 스페인 마드리드 생활에 대한 인상기를 물었다. 스페인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한국에서 인기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탤런트 서예지에 대해 그녀가 마드리드 대학에서 수학했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청년은 그녀를 마드리드 시내에서 본 것은 확실하나 대학교 내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확인해 주었다.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은 서예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아 그녀를 뜨게 한 드라마 사이코라도 괜찮아의 작품성과 힛트성에 대해 한번 더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청년만 한껏 리액션을 보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랬나 하는 정도로만 반응했다.

 

주인에게 밥값하고, 청년이 보낸 스페인 생활을 통해 얻었을 그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도 확인할 겸해서 스페인의 이슬람과의 관계에서부터 스페인의 예술계와 영화계, 그리고 스페인 내전사 및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앙숙관계 등에 대해 서로 제법 오래 이바구를 주고 받았다. 권마에, 서교수, 신사장, 주인장 모두 무던하게 경청해 주었지만 어느 순간 식탁 화제를 너무 독점하는 것 같아 아차 하고 스스로 청년과의 대담을 기특스레 거두었다.

 

권마에가 김재민씨는 뭐 그리 아는 게 많소? 어제 밤은 쎄봉이 법학에 대해 오만 썰을 다 풀더니만 오늘은 이 양반이 바톤터치하며 이빨타선이 폭발하는구먼..’ 하고 야지성 쫑코를 놓았다. 여기에 대해 이 김모가 경영학에서도 글로벌경영 분야를 전공했기에 스페인 뿐만 아니라 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동남아, 북미, 중남미,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방석만 깔아주면 아는 체 할 썰을 얼마든지 풀 수 있소하고 냅다 뛰듯 되받았다. , 익은 벼처럼 고개 숙이지 못하는 요노무 촐랑거림이여.. 그냥 날씨 화창한 초가을 실외 식탁 분위기 탓으로 밖에 돌릴 수 없었다.

 

<고은사 전경>
<고은사 대웅전>
<대웅전 내 불상>

 

이제 부산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코스로 이 마을 근처에 있다는 고은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신라 때 당나라 유학관료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라 했다. 권마에의 소나타 차를 타고 절 입구에 내리니 사찰 전체가 상당히 짜임새 있게 가꾸어져 있었다. 주민 수도 얼마 안되는 조그마한 마을에 이런 사찰을 비롯해 군데군데 문화시설물이 갖춰져 있는 걸 보니 아, 우리나라가 요즘 뜨기는 뜨는 나라가 되었구나 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경내에서 서교수, 권마에, 김모>
<마루에 걸터앉은 김모, 권마에, 신사장>
<경내 전경 속 권마에와>
<작별을 앞둔 3인>
<작별을 앞둔 함부르크 3인방>

 

대웅전에 들어가 절도 하고 권마에의 권고에 따라 시주도 상징적으로 좀 했다. 나와서는 경내를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사진찍기 괜찮은 장소에서 서로 찍사를 바꿔가며 추억사진들을 찍었다. 이 또한 흘러간 과거가 되리라는 생각을 언뜻 떠올리며..

 

고은사 탐방까지 끝내고 우리는 마을로 다시 돌아와 드디어 작별의 타임을 맞이했다. 서교수와 나는 신사장이 챙겨준 친환경 비누 한 케이스 씩 받고는 이틀 동안 잊어버린 공동체적 품앗이 삶과 외부손님에 대한 최고급 환대에 대해 두 양반에게 치하하고는 조만간 또 방문할 것을 약속하며 포옹을 나눈 뒤 테슬라 차에 올랐다. 짠하고도 기대이상의 흐뭇했던 짧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