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체험기

욕지도·거제를 꿈처럼 다녀오다 (3/3)

백조히프 2022. 8. 8. 13:50

욕지도·거제를 꿈처럼 다녀오다 (3/3)

 

 

작성자: 김재민

2022. 8. 7

 

 

<통영에서의 둘째 날 오후: 미륵산 케이블카 장>

 

통영 서쪽 삼덕항에 내려서는 차를 몰고 미륵산 산정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갔다. 매표구에 가니 타지에서 온 듯한 다른 승객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성인 왕복 승차비가 1인당 18,000원 이었는데 경로할인을 받으니 11,000원으로 내려가 4 28,000원의 절약을 할 수 있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고령인구가 급속으로 늘어나는 한국의 인구구조에서 이제 좀 할인폭을 줄이는 방향으로 조정했으면 싶었다.

 


<미륵산 케이블카 노선 조감도>

 

노인층에도 구매력과 경제력이 있는 액티브 시니어층이 늘어나는데 이들에게도 저소득 독거노인들에게나 해당할 할인율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안 그래도 줄어드는 젊은 생산가능인구층의 납세적 부담을 점점 무겁게 만들어 복지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삭감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적지않게 우려되었다. 이 경우 할인금액을 15,000원 정도로 해도 경로적 혜택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케이블카 실제 운행 모습>

 

본 케이블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2(bi-cable) 자동순환식 곤돌라 방식으로 스위스의 최신기술을 도입해 설치되었다 했다. 그 길이도 약 2Km로 국내 일반관광객용 케이블카 중에서는 두번째로 길었다. 이렇게 긴 길이임에도 친환경적인 설계를 추구해 중간지주는 1개만 설치했기에 탑승한 우리 일행에게도 멋진 아랫조망과 저멀리 놓인 한려수도의 풍광을 신속하고 쾌적한 승차감 속에 시종일관 안정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8인승 곤돌라 47대가 연속적으로 탑승객을 운송함으로써 기다림이 거의 없는 탑승이 가능한 것도 맘에 들었다.

 


<다도해를 굽어보는 산정행 계단에서>

 

<신선대 전망대에서 보이는 다도해 전경>

 

케이블카가 미륵산 산정 아래에 도착하자 호기심 많은 권마에와 이사장은 산정으로 걸어 올라갔고, 다리가 불편한 송박이 아래에서 기다리겠다 하길래 오르막 길 오르기 싫어하는 나도 송박과 말동무하고 있겠다는 핑계로 그 근처 벤치에 앉았다. 둘이서 이번 여행의 신속한 성사와 멤버들의 마음 맞음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권과 리도 산정에 위치한 용화사까지는 올라가지 않은 채 적당한 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케이블카의 하행시 전경>

 

<다도해 비경의 끝판>

 

우리는 하산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때처럼 주위경관을 즐기면서 무사히 아래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멀리 보이는 통영 앞 한려수도 전경을 굽어보니 중3 때인 ‘69년 부산에서 충무라 불렸던 이곳에 배편으로 당일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와 비교해 항구도시 곳곳은 상전벽해처럼 바뀌었지만 다도해 바다 위에 펼쳐진 여러 섬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품은 비경처럼 아늑하면서도, 다른 한편 용틀임을 머금은 듯한 의뭉스럽고 다소곳한 화폭들의 향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해금강 가는 길>

 

혼자서 잠깐 이런 상념 속에 빠지는 중에 이사장이 모는 차는 우리 일행을 태우고 거제 해금강(海金剛) 쪽으로 넘어갔다. 오랫동안 해금강이란 지역이 무슨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인가 하고 오해를 했는데 바다 위에 있는 금강산 같은 절경 지역임을 한자 명을 보고, 이 지역에 들어오고서야 비로소 바로 이해했다.

 


<바다 쪽에서 본 해금강 전경>

 

해금강을 보는 입구에 들어서자 관광지 횟집거리가 나타났다. 코로나와 평일이기 때문인지 시즌인데도 생각보다 방문객이 그리 붐비지 않아 어떤 곳에서는 한산한 느낌까지 들었다. ‘96년 여름인가 한국 들어와서 처음으로 우리 가족과 이 지역에 휴가로 며칠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편으로 해금강 해역으로 들어가 비교적 소상하게 절경들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3시가 마지막 편인 유람선을 4시 반에 도착함으로써 놓쳐 유람선 관람 코스를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돌틈이 해변에서 수영하고>

 

그 대신 해금강 입구지역에 들어서자 돌틈이 해수욕장이 보이길래 사람도 별로 없는 황량한 곳에서 바다 수영하기를 싫어하는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인증 샷이라도 남기겠다는 의도 속에 물만난 고기같은 권마에를 따라했다. 그가 하는대로 웃통 벗고 준비해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바다 속에 뛰어들어 한참이나 해수욕 기분을 제법 내었다. 30여분 후 다음 장소로 떠나야 했기에 떠날 채비를 하는 그 아재들에게 해안가 기념 사진 한 컷을 박아주었다. 푸른 바다와 육지에서 본 해금강의 한 컷을 후면 배경으로 삼아..

 

 


<멀리 해금강을 뒤에 두고>

 


<해금강을 옆 배경으로>

 


<위에서 본 해금강 십자동굴>

 

옷을 챙겨 입고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해금강을 뒤로 한 기념사진도 몇장 더 찍었다. 이번에는 접근해서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만 ‘96년에 우리 가족들과 유람선 타고 바다 쪽에서 세세히 살펴본 해금강 전경과 십자동굴 등을 떠올리며 이번에 가까이서 못 본 아쉬움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지세포 형제장어집에서>

 

이제 오늘의 숙박지가 있는 지세포로 들어갔다. 예약한 스미르 하우스에 들어가기 전 인터넷에서 찾아놓은 형제장어집을 찾아갔다. 가성비가 아주 좋다는 방문 후기들이 우리 눈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노련한 이사장이 네비 도움을 조금만 받고도 큰 문제 없이 쉽게 가게를 찾아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어제 시식한 고등어회에 이어 두 번째의 특산음식 시시시간이었다. 가격표를 보니 바다장어 1인분이 23000, 장어탕이 12000원으로 매겨져 있었다.

 


<지세포 형제장어집>

 


<불판에 올린 바다장어>

 

우리는 바다장어 4인분, 장어탕 2, 소주 1, 공기밥 4개를 시켰다. 가게측 도우미 아줌마가 주문 음식을 갖고와 능숙한 솜씨로 불판에 올려 구워주기 시작했다. 바다장어는 민물장어보다 덩치가 커서 먹을 게 많았다.

 


<먹음직한 장어탕>

 

小食파 이사장이 있는데다 남은 세 명도 그리 걸신들린 식탐을 보이는 이가 없어 아주 편안하게 먹고 싶은 만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집어 먹었다. 거기다 2개 시킨 장어탕도 가게측에서 미리 4인분으로 나누어 갖다주는 센스로 장어집에서 모처럼 가성비 좋게 푸짐한 한 끼를 갖게 되어 모두 만족해 했다.

 

<스미르 하우스와 이디야 카페에서>

 

장어 저녁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숙박소인 스미르 하우스를 찾아갔다. 비슷한 동년배로 보이는 호탕한 여주인이 우리를 맞아주며 펜션 방으로 인도했다. 욕지도 방과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지만 하루 숙박료는 며칠 전 예약할 때 10만원을 지불했다. 남자 4명이 하룻밤을 의탁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공간과 취사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스미르 하우스의 전경>

 


<호젓한 호수 그림같은 지세포 내항>

 

특히 맘에 든 것은 창을 통해 호수같이 그윽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머금은 지세포 항의 그림 같은 뷰를 바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시쳇 말로 무슨 그림엽서 속에 들어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현대중공업에 다니던 12년 전 쯤 경영기획팀의 동종사 간 업무교류 모임을 위해 경쟁사인 삼성중공업(고현)과 대우조선해양(옥포)을 방문한다고 거제를 두 서너번 찾아왔었지만 이곳 지세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세포라는 지명은 장승포와 함께 낯설지 않았다.

 


<소설-소주클럽의 책 표지>

 


<‘소주클럽에서 묘사된 지세포의 이미지>

 

고교동기이자 거제 출신이며 소설문학 전공자인 강호교수가 작년 여름 동기 홈피에 거제문학을 소개하며 이 지역에 살아본 적이 있는 미국작가 팀 피츠가 쓴 소주클럽이란 소설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장소적 배경이 지세포와 장승포였는데 중반까지는 전자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었기에 이곳을 소설 속에서나마 제법 자주 거닐어 보았기에 어째 많이 아는 지역 같았다.

 

펜션 방에 여장을 풀고 세면과 샤워를 각자 한 후 우리는 이 동네거리를 마실 돌아다니듯이 거닐기 시작했다. 걷다가 커피샵 같은 곳이 눈에 뜨면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 들며 여행 둘째날 밤이자 마지막 밤의 대담 회포를 풀자고 했다. 걸어다니며 살펴본 지세포의 밤바다는 소담스러움을 넘어 이국적이기까지 해 모처럼 찾아온 여행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펜션 여주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걸어가니 휘황한 불빛 아래 이디야 커피샵이 나타났다. ‘소주클럽 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로즈버드 다방이 눈에 띄었으면 더 반가왔을텐데.. 약간 아쉬웠다.

 


<지세포 이디야 카페 내부>

 

이디야 안으로 들어가니 넓찍한 공간이 놓여있었다. 커피값을 공금으로 지불하는가 했는데 웬 일로 권마에가 오기 전 울릉도 공연에서 개런티를 좀 받아왔으니 이 계산은 자기가 쏘겠다고 하며 귀여운 호기를 피우는 것이었다. 모두 가상하다는 치사를 해주며 권마에가 선사한 커피잔들을 부여잡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로 초면인 이사장과 송박사도 여행 이틀째가 되니 많이 편해진 듯 대화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다가 내가 권마에에게 와이프가 한국에 부임하는 날이 결정되었느냐고 물었다. 8월 초에 세 딸 모두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베를린 집은 독일로 피난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지낼 공간으로 내어주고, 가족들은 독일 외무부가 용산 쪽에 제공한다는 전임자 사택에 임기 동안 머물거라 했다. 자신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물려준 점곡(의성) 시골 집을 별장 삼아 머물며 서울로 왔다갔다 하는 생활 패턴을 지킬거라 밝혔다.

 

 


<수년 전 한국 거리를 거니는 권마에 가족(첫째, 부인, 셋째, 둘째)>

 

아니, 이 음악 밖에 모르는 어름한 군이 부랄 두 쪽 갖고 무슨 용빼는 재주를 가졌기에 집안 좋은 독일 와이프를 운좋게 낚아 국위선양도 하며 중노년 호사를 누리는가 싶어 배도 약간 아팠다. 다른 한편 겉보기와는 달리 권마에가 동서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에 의해 내면적으로는 좀 언밸런스한 가정을 유지해 오며 적지 않은 내면적 갈등도 겪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쳐졌다. 왜냐하면 3년 전부터 혼자서 독일생활을 접고 점곡 땅으로 내려와 수구지심의 노년 정서를 펼치는 것 자체가 아마도 내가 짐작하는 바와 제법 아귀가 맞는 것 같았다.

 

권마에의 결혼생활을 독일에서 지켜봤던 이사장이 한국에 단신 귀국할 무렵 이 아재의 우울증이 장난이 아니었다며 한 마디 거드니 이제 그 우울증의 원인분석에 들어가 내 생각을 펼치며 질문을 해대었다. 권마에는 부인을 한국에서 만나 딸을 세 명이나 두는 결혼생활을 하다 부인의 부임기간이 종료되어 다시 독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크라이나 키에프로 임지를 발령 받아 그곳에도 따라가 수년 간 생활하게 되었다 했다.

 

이 시기에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외교관 부인의 공직생활을 외조하고, 어린 딸들의 양육을 도맡아 한 권마에는 통상적인 생활에 치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에 적지 않은 내면적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일상에서 자주 드러나 부딪히는 사소한 성격차이와 문화적 사고방식 차이의 간극들이 우울증으로 연결될 만큼 누적되자 결국은 혼자 한국에 들어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리워하던 한국적 전원생활을 택했다. 고향에 돌아와 주위에 음악적 재능을 보시하는 지역예술가의 삶을 한동안 살다보니 그제야 한때 왜소화되었던 예술가적 자아를 회복해 우울증을 극복할 만큼 자신에 대한 치유의 자긍심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지세포 밤바다>

 

 

얘기가 자못 고조되는 중에 장소를 제공해준 이디야 측이 영업 종료시간이라 해서 남은 스토리는 스미르 펜션 방으로 가서 맥주 한잔 씩 하며 이어가기로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살펴 본 지세포 항과 밤바다는 여행객의 감흥을 한껏 높여주었다. 소설 소주클럽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이 공간무대에서 같이 움직였겠구나 생각하니 이곳이 내게는 더 특별하게 여겨졌다.

 

방에 들어와서는 이사장과 권마에가 먼저 샤워를 한 뒤 나와 송박이 샤워할 동안 참외와 스낵칩 안주를 접시에 담으며 테라 맥주 큰 병으로 남은 이야기를 전개할 술상을 봤다. 멤버들이 다 모이자 이번 여행이 각자에게 끼친 의의와 소감을 말했다.

 


<과일 깎는 권마에와 이사장>

 


<다른 방향에서 찍은 우리 방>

 

먼저 이사장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옛 독일시절의 유학동료들을 통해 그 시절의 흔적냄새 정도를 맡으려 동행했는데, 의외로 호흡이 잘 맞는 동년배들과 늘그막에 하는 이 짧은 여행이 아주 그럴 듯 했다며 앞으로 정기화할 것을 제안했다. 송박도 이사장과 100% 동감이라는 자신의 소감을 전하며 불편했던 다리가 낮에 방문한 돌틈이 해수욕장에서의 수영으로 인해 많이 치유된 것 같다며 이런 여행에 크게 만족한다는 호평의 이유를 하나 더 내어놓았다.

 

남은 시간은 아까 하다 만 권마에의 의미있는 결혼생활 유지에 대한 방법론 찾기에 대한 얘기로 펼쳐졌다.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은 하이케 지벤아이혀(Siebeneicher, 일곱 도토리)라고 했다. 지금은 남편 성을 따라 대외적으로 프라우 Kwon(크본)’으로 불리고, 이 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했다. 와이프가 집안 좋은 보수적 가문에서 고급 교육을 받고 성장한 탓인지 심성이 거칠거나 막되지 않고, 독일 여인치고는 동양적 절제와 배우자에 대한 기본적 예의 정도는 확실히 지켜주는 고아한 품격을 갖췄다고 권은 그새 마누라에 대한 틈새 자랑질을 해댔다.

 

하지만 처가쪽에서 장모가 아시아에 대한 일천한 지식으로 인한 편견 때문에 어디서 굴러먹던 족보없는 음악하는 한국계 사위에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외교관으로 한국 파견갔다 콩깍지가 씌여 전격결혼을 한데 대한 탐탁치 못함을 여과없이 자주 쏟아내었다 했다. 결국 한국에 혼자 들어오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크게 말다툼을 했을 때 평소 쌓였던 권마에도 지지않고 강력한 댓거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때 끝까지 현장을 지켜봤던 와이프가 나중에 자기가 모친의 인종차별성을 넘나드는 모욕에 대신 크게 사과한다는 말을 해줌으로써 최소한 부부 간의 의리는 지켰음을 확인해 주었다.

 

 


<독일대학에서 의학, 무용(밸리댄스),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세 딸>

 

자신이 평생을 음악에만 몰두하다 일상생활에서 아금받지 못하고, 생활 독일어도 대충 구사하며, 누구처럼 인문학적 잡학지식에도 밝지 못해 고급 공무원인 와이프나 독일에서 교육받고 장성한 딸들로부터 이 부분에서 허술한 인정을 받지만, 그래도 다정다감한 감성과 예리한 예술성, 그리고 심성 깨끗한 인간성은 그녀들도 확실히 알아준다고 흠흠거렸다. 거기다 50대 초반의 와이프는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남성성을 좋아한다고 다른 일행의 기를 죽이는 같잖은 오버성 발언도 자기 딴에는 자랑삼아 쓸데없이 보태었다.

 

아무튼 서울 부임을 한번 더 관철시킨 부인의 신공과 최근 전세계적으로 뜨는 K-, K-영화/드라마, K-푸드, K-뷰티에 제대로 빠져버렸을 세 딸이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로 함께 한국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크게 올라간 한국의 문화적 위상에 걸맞게 모두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한국어가 확실한 가족 공용어로 부상할 것이고, 권마에의 가족 내 위상도 많이 회복될 것이라 전망해 주었다. 부인이 그동안 딸들과 구축한 모계중심 가족권에 허수룩하게 흡수당하지 말고, ‘황야의 늑대처럼 고고한 점곡 생활권을 최대한 유지하며 상호호혜의 원칙 속에 가족구성원들이 양쪽을 왔다갔다 하는 생활패턴을 구축하라는 권고의 말도 곁들였다.

 

이사장과 송박의 추임새에 힘입어 권마에의 그럴 듯한 향후 결혼생활 컨설팅에 열을 좀 올리다 보니 어느 듯 지세포의 밤이 깊었다. 내일 아침과 오전의 여정을 위해 적당한 시간에 이르렀다 여겨지자 모두 알아서 취침의 자리에 들었다.

    

 

<거제에서의 마지막 한나절: 포로수용소와 가자미 미역국집 탐방 후 해산>

 

잠 없는 노친네들이라 늦게 잤음에도 아침 6시 반에서 7시경에 모두 일어났다. 세면과 샤워를 하는 중에 권마에와 이사장은 라면을 주식으로 한 아침 준비를 했다. 얼른 샤워를 마친 나는 햇반 4개를 들고 공동 사용 전자렌지가 있는 곳에 내려가 밥을 데워 왔다. 권마에가 갖고 있던 파와 소세지들을 라면에 집어넣어 걸쭉한 라면을 만들어내었고 종가집 김치도 내어 놓으니 밥과 함께 아침 끼니 해결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오늘은 고현 쪽으로 가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지 공원을 방문하고, 나와서는 살펴봐둔 가자미 미역국집을 방문해 마지막 점심을 하고 통영버스 터미널로 가 나와 송박은 부산행과 대전행 버스를 타고 귀가하며, 이사장은 권마에 집인 점곡까지 차로 달려가 본인도 하룻 밤 거기서 자고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올 예정이라 했다.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재된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전경>

 


<당시의 포로수용소 전경>

 


<경비초소에서 본 당시 수용소 전경>

 

스미르 하우스 주차장에서 연 이틀 간 운전대를 잡은 이사장을 위해 내가 모처럼 핸들을 물려 받았다. 나이와 함께 시야도 좁아져 스무스한 운전은 못하지만 그래도 한 때 함부르크의 택시운쨩이었던 경력을 믿고 포로수용소 자리가 있는 거제 고현 쪽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운전석에 안고 보니 차 핸들이 어찌나 뻑뻑하던지 이사장은 그동안 이런 차를 어떻게 그리 여유있게 몰았을까 경탄할 정도였다.

 

후진시 후방을 비쳐주는 카메라가 없는 것은 차치하고 차가 운행 중에야 백미러 조정이 되어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몰던 우리집 차가 아니어서 달리면서 조작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송박이 보조석에 앉아 가는 길을 구두로 야무지게 알려주는 덕에 네비까지 봐야하는 수고를 생략하며 거의 앞만 보고 달려 간신히 포로수용소 공원에 도착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대해서는 강호교수 소개로 알게 된 거제출신 작가 손영목의 소설 거제도와 황해도 안악 출신이자 인민군 포로로써 수용소 생활 체험이 있는 작가 강용준의 소설 철조망을 통해 어느 정도 역사적 간접체험은 이미 해본 터였다.

 

 


<강용준 소설-철조망 책 표지>

 

후자인 철조망에서는 인민군 출신이지만 북송을 거부하는 주인공이 친공 포로수용소동에서 뜻을 같이 하는 반공포로들과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공모자들을 끝까지 불지 않는 극한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 한 밤중에 만신창이의 몸으로 탈출하지만 막혀있는 감시 철조망을 보고 일순간 좌절하는 듯하다 동료배신을 피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정신을 꿈꾸며 감시병들에게 총을 쏘아달라는 듯 철조망을 기어오르다 사살 당하는 엔딩 장면이 묵직한 울컥함과 감동을 주는 소설이었다.

 


<손영목 소설-거제도 책 표지>

 

반면 손영목의 거제도에서는 전쟁포로 뿐만 아니라 거제도를 생활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거주민, 그리고 흥남철수를 통해 부산과 이곳으로 유입된 북한 피난민이 이 수용소를 접점으로 거제섬 전체에 ‘51-’53년 기간 총 43여만 명(포로 17, 감시병 1, 현지인 10, 피난민 15)이 운집해 복짝거리며 다양한 서사들을 만들었는데, 각 개체들이 집단적으로 생존의 동아줄을 잡아가는 과정을 좀 더 확대된 시선으로 묘사한 대서사시같은 내용들이 펼쳐졌다.

 


<친공포로들의 폭동>

 

이 소설에서는 친공포로들의 잦은 폭동주도와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반공포로들의 본보기 처형으로부터 나오는 극악함과 잔혹함 뿐만 아니라 반공포로들 역시 악에는 악으로 갚는다는 대항논리에 걸맞게 야차같은 폭력을 서슴치 않고 행사한 인간성 상실의 극한상황들을 가감없이 기술한 점이 그 현실감을 더했다. 국가에 의해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졸지에 1,100만평의 농지와 임야를 강제수용 당한 현지인의 애환, 이북 피난민과 어쩔 수 없는 생존경쟁을 하면서도 그들을 절벽으로는 몰지 않는 인간적 연민 등이 또 다른 이야기 축으로써 도도하게 그려졌다.

 

 


<포로들의 취사장>

 


<오물통 운반하는 포로들>

 

아마도 이런 류의 소설세계를 알지 못한 채 1997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명명되며 재탄생해 거제의 관광명소가 된 본 수용소 탐방객들에게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대로 그 시대를 재현하려 애쓴 여러 장소내 미니에이처 시설들(수용소 전경, 취사장, 용변공간, 교육장 등)에서 그곳 생활자들의 아주 복잡했을 흔적들은 포착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거라 여겨졌다.

 

 


<포로수용소 입구 기념탑>

 


<포로수용소 입구에서>

 

하지만 상기 두 소설의 내용들 뿐만 아니라 독일 나치스의 아우슈비츠, 다카우 같은 절멸수용소 세계에도 제법 관심을 보였던 내게는 거제 수용소 곳곳을 살펴보는 내내 포로들이 독일 수용소처럼 혹독한 노동과 기아에 시달리다 독가스 처형장이 기다리던 곳이 아니었단 점에서 안도의 숨이 내씌어졌다. 다만 양 진영의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시범 케이스로 걸려 잔혹한 린치의 대상이 되는 운명만 피할 수 있었다면..

 

아무튼 본 수용소 방문은 바로 우리 앞 세대 한국인들에게 참으로 가혹한 고초들이 강요되었던 시대적 통증을 간접적으로 한번 더 체험하고, 전쟁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의 행운을 가일층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졌다. 우리 일행은 본 수용소의 탐방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의 공식 마침표를 찍고, 차를 몰고 나와 가자미 미역국 메뉴로 유명하다는 집을 찾아 점심을 하며 이번 여행을 결산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마지막 식사였던 가자미 미역국’ 메뉴>

 

미역국에 소고기 대신 가자미를 넣는 음식을 부산 출신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접해왔고, 그 맛이 또 다른 별미라는 걸 잘 알았지만, 다른 세 명은 처음 시식해 보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이 메뉴가 처음 대할 때 크게 거부감을 주는 재료배합의 음식은 아닐 것이라 여겨진데다, 시장기도 적당히 도는 타임이라 모두 한 그릇씩 뚝딱 잘 해치워 주었다.

 

마지막 식사비를 치루려니 우리가 개인당 20만원씩 거둔 80만원에서 한 30,000원 정도 마이너스가 발생했음을 알았다. 눈치빠른 송박이 우리 둘이서 2만원씩 갹출해 마무리짓자고 내게 제안했다. 차를 제공하고 커피샵에서 한번 쏜 권마에와 회계관리 및 이틀간 차운전을 전담해준 이사장은 갹출에서 열외시켜 주는게 너무도 당연해 바로 오케이 했다. 당사자 두 사람도 송박의 순발력 있는 정무적 감각에 흡족해 하며 이번 여행단 멤버들의 인생 짠밥에서 오는 상호 배려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쟁으로 다 털려 가난해진 나라의 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까지 겪고 이제는 K-문화강국으로 도약한 한국까지 경험하면서 남은 여생을 의미있게 마치고자 꿈꾸는 나와 우리 일행에게 이번 통영-욕지-거제 여행은 상당히 의미있는 힐링의 탐방길이었다. 숨겨진 비경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노년들의 자유로움과 느긋함을 만끽하면서도 발전된 우리나라 곳곳의 인프라를 4, 50년 전 옛 추억과 오버랩시키며 살펴가는 맛이 적지않게 흐뭇하고 쏠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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