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기들과 영주 부석사 다녀오기
2019. 5. 21
4월 말부터 제주와 나주 여행 길에 이어 어제(5/19)는 부산 동기회의 상반기 문화기행 행사에 참여하여 경북 영주 무섬마을과 부석사 경전을 당일치기로 왕복하는 버스 투어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 며칠 전 부산동기회 백민호 총장이 나의 제주도 여행기를 잘 살펴봤다며 김포로 올라가서 점방 봐주는 타임이 아니라면 부산에서 떠나는 영주 여행에 참여하여 하루 간의 기행 스케치를 써줄 수 없느냐고 부탁해 왔다. 작년 요맘 때도 전라도 어딘가를 가는 여행에서 간다하고 지각으로 못 간 죄가 있어 이번에는 꼭 가겠다고 수락했다.
아침 일찍 출발행 버스에 합류하다
작년처럼 또 지각탈락 할까봐 이번에는 백총장이 새벽 5시15분에 모닝콜을 넣어왔다. 전날 밤 12시30분 잠자리에 들었지만 파블로프의 ‘조건반사하는 개’처럼 한 두어번 벨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깨어났다는 신고 음성을 전하고는 아침계산과 세면, 그리고 샤워를 하며 어리버리한 정신을 다시 모았다.
그냥 옷챙겨입고 튀어나갈까 하다 속에 뭐 좀 채워갖고 갈 만한 것은 없나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지난번 부산 내려 올 때 박점주가 챙겨준, 판매 유효기간이 넘어 폐기난 ‘비비고 야채죽’이 눈에 보였다. ‘와이고,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전자랜지에 뎁혀 김치와 함께 먹으니 참으로 든든한 꿀맛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각이 6시20분에 육박하는지라 지하철행을 포기한 채 택시로 광안대교를 타고 집결장소인 해운대 양운고 정문으로 가리라 결정했다. 6시30분 부경대 정문쪽 거리로 나오니 택시는 금방 잡혀 중후한 목소리에 흰 백발이 성성한 기사양반에게 양운고까지 6시55분까지 내려줬으면 한다고 부탁하자 무슨 레이서처럼 차를 몰았다.
<광안대교 드라이빙>
차가 광안대교에 올라타며 순간시속 100Km를 찍으며 달리자 ‘93~’95년 기간 함부르크의 주말 스페어 택시운전사로 날리던 시절 한번씩 바쁜 손님들 시간 내에 목적지로 실어주기 위해 용쓰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 한 독일 아지매가 길가에서 내 차를 황급히 잡아 올라타더니 정상적으로 30분 걸리는 함부르크 본역으로 20~25분 사이에 도달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약간 무리다 싶었지만 애타하는 것을 보니 같이 감정이입되어 좀 밟았다. 곡예운전은 아니었지만 기차 놓치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집중해 운전하다보니 한 5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푸른 신호등이 평소와는 달리 잘 떨어진데다 앞에서 개기며 어정거리는 차들도 별로 없어 그냥 추월선으로만 달리다 보니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세련된 풍모의 40대 초반 아지매가 ‘시간 내 도달하기’를 ‘샤펜’(이루어 낸)한 쪼고만 안경쟁이 아시아계 기사에게 ‘헤어 파러, 베스텐 당크, 당케 피일말스!’(기사님, 정말 최고로 고마워요) 하는 기쁨의 찬사를 보내주며 25마르크 요금에 10마르크의 팁을 더 얹혀주었다.
그런 추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백발의 아재 기사는 한 15분 만에 통과료 1,000원을 지불하며 광안대교를 건너 양운고 앞에 득달같이 도착했다. 요금은 재작년 6,500원이었던 때보다 그 사이 요금대가 올랐는지 9,400원이 나왔다. 옛날 팁받던 때가 생각 나 11,000원을 ‘거스름은 됐심다’ 하고 지불하니 아재가 입이 귀에 걸리며 ‘고맙심다!’를 연발했다.
정문 앞에 정차되어 있던 버스에 승차하니 백총장을 비롯해 먼저 탑승해 있던 아는 얼굴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싱글로 왔는지라 버스 뒷좌석 쪽으로 향하는데 고2 때 같은 반 하며 제법 가까웠던 배병록 동기가 네 번째 열에 앉아 자기도 혼자 왔다며 오늘 같이 ‘일일부부’ 하자며 옆에 앉기를 권했다.
3시간 반의 고속주행 끝에 영주 ‘무섬마을’에 도착
지난 연말 동기회 송별연에서 47년만에 처음 봤던 배병록이인지라 여기서 또 만나게 되어 ‘오케이!’ 하고 바로 앉았다. 자기도 그랬을거고 나도 웬일인지 이번 영주 탐방길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일부부가 된 배병록이와>
버스는 양운고 앞을 떠나 센텀역과 동래역을 거치며 기다리고 있던 동기부부들을 태웠다. 장기남 부부, 양태종 부부가 우리 좌석 앞열 양쪽에, 유영호 전 회장이 싱글로 와서 우리 옆자리에 좌정했다. 그 밖에 현 회장인 김병호 부부와 김지언, 김대용, 방문성, 박찬석, 윤지한, 배병호, 김용섭, 강봉호, 이헌, 허한, 이형복, 이상렬, 이제룡, 전창민, 박현호, 조태화 등이 싱글이나 부부로써 탑승했다.
<버스 안 동기들>
주최측이 준비한 생수, 팥빵, 김밥 한 줄씩 보급받고 시식하는 중에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에 올라타 군위휴게소에 닿을 때까지 쌩쌩 날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놓친 아침잠을 벌충하려 좀 졸고 싶었지만 모처럼 만난 배병록이와 옛 고삐리 시절에 공유했던 추억들을 교환하며 졸업 후 어떤 인생역정을 밟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듣는다고 눈 붙일 새가 없었다.
병록이는 ‘73년 재수 시작한 지 한달도 안되어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에 기계설계과를 신설하라는 박통의 특명에 의해 만들어진 부산대 동과에 한 4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해 재수없이 4년만에 바로 졸업했다 했다. 그후 해병대에 차출병으로 뽑혀가 24개월을 포항에서 복무한 뒤 영도 소재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고 전했다.
80년대 중반 조선공사가 한진그룹에 매각되자 ‘한진맨’으로 변신한 뒤 설계 엔지니어의 캐리어를 꾸준히 쌓다 조선산업의 불황 속에 구조조정의 시기를 맞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아 한진과 현대자동차 등이 공동설립한 로템의 어느 자회사에 한진맨으로 들어갔지만 소수파의 비애를 겪다 로템의 기아출신 신임사장으로부터 내막은 잘 모른 채 스타웃 되어 로템 원가관리부에 부서장 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아마도 짐작해 보니 기아출신 정사장 역시 현대맨들이 득시글거리는 로템에서 자신의 조직장악을 위한 꼬불친 심복감으로 같은 소수파인 한진맨을 낙점하지 않았을까 여겨졌다. 아무튼 정사장이 이런 심사로 배병록이에게 힘을 팍팍 실어주니 요 때가 이 친구에게서는 직장생활 최고의 봄날이었다고 본인도 인정했다.
기계설계 전공자에게 생판 낯설은 원가관리 파트를 맡기기에 고사에 고사를 거듭했지만 정사장이 요런 자리는 자동차에서도 몽구회장이 자기 사위에게나 맡기는 자리라고 하며 설득에 나서자 그제서야 정치적 파워가 있는 곳임을 이해하고 뜻을 받들어 맡겠다고 그 제안을 수용했다.
그 뒤는 배병록이답게 죽기살기로 업무에 매달리며 자기를 알아준 주군에게 견마지로를 다하다 보니 어느 날 뇌출혈 일보 전까지 가는 고비를 맞았다고 덧붙였다. 요 장면은 나와는 발병 케이스가 달랐지만 뇌출혈 경고를 지난 2005~14년 사이 2번씩이나 받고, 이제 3회 삼진아웃 카드까지 받을 처지에 놓인 내게 묘한 동질감을 주었다.
배병록이의 인생 스토리 제공에 대한 답례로서, 나는 고교 졸업후 3수의 터널을 지난 뒤 고도근시로 군대면제 받았으며, 산업경제연구원을 거쳐 독일 유학갔다 나이 40에 쯩 하나 간신히 챙겨 귀국해서는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을 거쳐 현재 경성대 산학교수 생활을 마지막 해 하고 있다고 요약해 전했다.
이 친구가 ‘아, 니는 그랬나?’ 하고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인생살이 굴곡을 넘어 온 고삐리 친구에게 상당한 공감을 보여주는 중에 버스는 군위 휴게소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나는 내 볼 일을 보고, 병록이는 아직 금연을 못한 듯 담배 한 대 피운 뒤 승차했다. 이번에는 둘이서 이심전심으로 눈붙이는 모드에 들어가 10시30분 경 영주 ‘무섬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졸음휴식을 취했다.
‘무섬마을’에서 본 흰 모래사장과 집성촌
그동안 TV 드라마에도 자주 소개되었다는 무섬마을은, 2000년대 중반에 가본 안동 하회마을처럼 물길이 마을을 휘감으며 흐르는 전통가옥과 고택들로 어우르진 한옥마을이었다. ‘물 위에 떠있는 섬’을 의미하는 ‘물섬’에서 발음 간편화를 위해 ‘무섬’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했다.
<무섬마을 안내도>
<무섬마을 전경>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풍수지리적으로는 ‘길지(吉地) 중의 길지’라 쳐주었다.
<정취어린 외나무 다리 건너기>
<형님먼저 아우먼저를 권하는 '비껴다리'>
<물길순응적 뱀커브 형상>
특히 이 마을로 들어가는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83년에 놓을 때까지 지난 300년 동안 바깥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 지금도 관광용으로 남겨놓은 ’외나무 다리‘였다. 마을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보따리 장수 등 타지인이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마을 입구 단체 샷>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수도교를 걸어가며 무섬마을과 저 아래 하얀 백사장처럼 펼쳐져 있는 모래톱과 물길에 순응하게끔 뱀처럼 구불어진 외나무 다리를 굽어보았다. 마을 입구에서 옆에 있는 친구들과 여기 막 도착했다는 인증 샷을 찍었는데 배병록이와 몇 년 만에 모처럼 본 이재룡이가 옆에 있어 3명이 같이 찰칵했다.
<마을입구에서 제룡, 병록이와>
진회가 사는 하동 땅 한쪽 모퉁이에서 호젓하게 지낸다는 제룡이도 세월의 풍화작용에서 비켜갈 순 없었겠지만, 우리 27회 야구부의 오랜 에이스 투수다운 아우라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행 전체가 단체사진 한 방 하고는 우리 셋이는 아래로 내려가 앞서 건너가는 일행의 뒤를 좇아 외나무 다리에 올랐다.
<우리 일행 꼬랑지에서>
사람들과 길이 150미터, 폭 20센티인 이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물 아래를 좀 오래 보니 어질어질해져서 까딱하다간 중심을 놓쳐 물위로 떨어질 위험도 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앞에 있는 어느 싸모님도 그리 느꼈다고 해서 좀 위안을 받았다.
다리 중간중간 마주오는 이를 피해갈 여분의 ‘비껴다리’가 있어 예전부터 마주오는 이에게 서로 길을 양보했다는데 우리도 다른 그룹 맞은 편 사람들에 웬만하면 상식에 의거해 일부분에게 길을 양보하며 지나치게 했다.
돌아와서는 무섬마을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며 돌아다녔다. 입향조인 반남 박씨 박수가 17C 중반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뒤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씨 김대가 영조 때 다시 들어와 이 마을에 정착한 뒤 그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오늘까지 자리를 잡아온 것이었다.
<김광옥의 마당넓은 집>
<김담의 사당모심 집>
<김담의 종택>
<김정규의 고택>
<김태길의 가옥>
<까치구멍 집>
<농당 고택>
<농당 고택의 마당>
<만죽재 고택>
<박정우와 박덕우의 가옥>
<섬계 고택>
<오헌 고택>
<주실 고택>
100여년 유지되어 온 전체 48가구 중 38동이 초가집 전통가옥이고, 16동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고택이라 ‘전주 한옥마을’처럼 보존할 가치가 높아 국가나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했다.
<마을 내부 전경>
<해우당 고택>
<마을 전망대 정퇴정>
<정퇴정에서 본 해우당>
나는 눈에 띄는대로 이곳 가옥촌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백총장이 어디선가 나타나 하루 대여료 1,000원에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다기에 같이 가서 한 대를 빌렸다. 그런데 수 십년 만에 타보는 자전거라 옛날 날렵하던 시절 생각만 하다 중심을 빨리 못잡아 하마터면 지나가는 차앞으로 자진해서 달려가 부딪힐 뻔도 몇 번 했다.
<유영호, 강봉호와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빌린 지 30분도 안되어 자전거를 반납할 수 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시큰둥한 기분 속에 마을 쪽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이 주민들이 운영하는 무섬주막이라는 곳에서 생막걸리와 소맥을 시켜놓고 마시며 환담을 하길래 중간에 엉거주춤 끼어 막걸리 한모금을 얻어마셨다.
약선당에서의 점심과 부석사로의 이동
버스에 모두 올라탄 뒤 오늘의 점심 장소인 이 지역 전통음식 지정업소라는 약선당으로 향했다. 회장단이 23,000원짜리 약선정식을 한 테이블에 4명씩 앉게 하여 식사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앉다 보니 우리 테이블에는 강봉호, 이헌, 나, 방문성이 함께 했다. 내 옆 테이블에는 김병호 회장과 김용섭, 이재룡 등이 눈에 띄었다.
<약선당에서의 점심>
봉호는 여전히 건강한 얼굴로 박점주의 편의점 안부를 물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럭저럭 버티며 위약금 덜 물기 위해 올 11월까지만 더 하기로 했다고 답해주며, 2000년대 초 24회와의 기별야구 결승전을 치루기 위해 울산에서 합류해 봉호가 몰던 카니발 차로 배기용, 황귀양, 김현수 등과 같이 올라가던 인연을 환기시켜 주었다.
울산 동기회에서도 가끔씩 만나는 이헌이가 그의 새부인이 이번 모임을 위해 특별 제조해왔다는 경주법주 같은 맛의 밀주를 두병이나 뿌듯하게 돌리기에 한잔 얻어마셨는데 그 풍미가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었다. 봉호가 연방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자기도 하도 잘 마시기에 나중에는 내가 반이나 남긴 밀주 잔까지 챙겨줘야 할 정도였다.
<남녀 7세 부동석>
우리 동기회에서는 여전히 전통으로 자라잡은 듯 부인네와 남자들이 따로 모여앉는 습관이 대세처럼 여겨져, 나이 먹어가면서는 서로 내외하지말고 섞여 앉아 대화하는 분위기 정착이 아쉬웠다. 그러던 중 우리 쪽에서 밀주가 떨어지자 재룡이가 주당들끼리 모여있는 테이블로 슬그머니 옮겨가는게 봉호의 예리한 매 눈에 포착되기도 했다.
드디어 화기애애했던 점심시간도 파하고, 이제 오늘 오후의 하이라이트인 부석사 경내와 그 안에서도 화룡점정 격인 무량수전을 탐방하려 버스에 또 올라탔다.
부석사 경내로 올라가는 길과 허명이 아닌 무량수전
영주여행 1번지로 꼽히는 부석사(浮石寺)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적 산사 리스트에 등재되어있는 데다, 국보 제 18호로 지정될 만큼 국내외적으로 그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길에서부터 설레임이 빵빵했다.
<부석사 안내도>
입구에 놓여있는 전체 조망도를 보니 경내가 산세 기슭에 기대어 수직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본당 격인 무량수전은 주인공답게 경내 맨 윗단에 위치해 있었다. 사찰건물들을 경사진 산세를 최대한 활용하며 종적·수직적인 ‘가람배치’란 걸 했기에 기존 산사들에서의 전각들 배치와는 다른 독특함이 풍겼다.
<부석사 올라가는 길>
<일주문>
<천왕문>
<안양루 전경>
<안양루 내부>
무량수전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일렬로 된 오르막 속에 서있는 ‘일주문->천왕문->범종루->안양루->무량수전’의 계단길 코스를 밟아야 되어 우리처럼 기본체력이 아주 저렴한 6학년들에게는 상당한 고행을 요구했다. 좌우가 은행나무로 둘러싸인 꽤 멋들어진 초입길을 지나자마자 헉헉 소리가 나오는 돌계단 길이 줄줄이 나타났다.
아, 이 무슨 늙으막 ‘도장깨기’ 수행길이란 말인가.. 2000년대 초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 올라갈 때 한 30분간 뺑이치며 올라갔더니 그 위에서 펼쳐진 묵향 안개에 싸인 듯한 초당을 보고서야 ‘와이고, 결국에는 잘 올라왔네’ 하며 흡족해 했던 그런 기대감으로 무량수전 알현의 대가를 지불하리라 나름 마인드 컨트롤 하며 남이 보면 같잖을 마지막 힘을 모았다.
<무량수전 전경>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근접해서 본 배흘림 기둥>
<무량수전 근처 경내>
<부석사 창건 초기의 삼층석탑 부근>
드디어 범종루와 안양루를 통과하니 무량수전 아재가 한국 목조건축미의 최고봉을 자랑하면서도 고수의 소탈한 위용을 풍기며 소생을 맞아주었다. 먼저 도달한 사람들이 본당 안팍을 드나들며 합장 절도 하고 끼리끼리 사진도 찍으며 각자가 올라온 노고에 스스로가 치하하는 망중한을 즐기는 듯 했다.
이 글 쓰면서 무량수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느낀 소감들을 종합해 보니 이곳은 안동 봉정사의 극락천과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이 목조의 정수라는 ‘배흘림’ 기둥과 고려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양식, 그리고 ‘팔각’지붕으로 인해 가히 목조건축미의 끝판왕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법당 내 소로여래좌상>
<소로여래좌상의 안내문>>
법당 안을 들여다 보니 아미타 부처인 ‘소조여래좌상’이 좌정해 있었는데 그 위치가 정면 중앙에 있지 않고, 왼쪽 면에 위치해 있는 게 독실한 불자가 아닌 김모에게는 요 부분도 뭔가 ‘파격의 도’를 다루지 않았나 싶었다(우리 LA 원익법사에게 질문거리로 남겨 놓으며..).
<안양루 측면에서 본 소백산맥 전경 1>
<소백산맥 전경 2>
<소백산맥 전경 3>
<소백산맥 전경 4>
<소백산맥 배경으로 이름모를 그녀와(허한공이 찍어 줌)>
아래 있는 안양루의 목조 양식도 멋있었지만 그 옆으로 막 개이기 시작하는 날씨 속에 펼쳐진 소백산맥의 오월 중순 녹음기에 접어든 아득한 전경도 참으로 고아해 보였다. 그 공간 속에 들어서는 수도승들이나 방문객들에게는 길영공이나 옥도사처럼 시심이 자동뻥으로 솟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량수전의 왼쪽 뒤편에는 이 사찰의 명칭을 이룬 ‘뜬 돌’이라는 부석이 놓여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 돌들이 받쳐주고 있어 떠있는 형태를 띄고 있지만, ‘뜬 바위’라고 부르는 스토리텔링 감도 하나 준비된 듯 했다.
<부석-떠 있는 돌>
이 사찰의 창건자인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수련할 때 그 모습을 흠모한 당나라녀 선묘낭자가 대사의 갑작스런 귀국에 상사병을 얻어 죽은 후 용으로 환생한 다음 평생을 의상의 수호천사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상아재가 부석사를 지을 때 요괴같은 이교도들이 쳐들어왔었는데, 이때 선묘언니가 용의 형상으로 나타나 돌을 집어던져 요놈들을 다 깨박살 내었다는 그 바윗돌의 스토리가 ‘부석’이라는 물증으로 살아나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량수전 앞 단체 샷>
<허한과 단체 싸모>
아무튼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나름 신실하게 알현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돌계단 길을 다시 조심조심 내려왔다. 내려오기 전 무량수전 앞에서 단체 인증 샷을 찍었고, 찍사 허한공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부인네 꽃밭 사진 속 한 귀퉁이에 좌정시켜준 인증 샷을 나와 백총장이 동시에 폰카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과 해운대에서의 재첩국 송별연
오후 4시 경 버스에 모두 탑승해 부산행 하행길에 올랐다. 날씨도 하늘이 도왔는지 하루종일 개어있다 요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졸음의 휴식길에 들어섰다. 군위 휴게실에 다다를 때까지 모두 잠 속에 빠진 듯 했다. 여기서 바깥공기 한번 마시고서야 눈들이 다시 뜨졌다.
내 좌측 뒤에 앉은 윤지한이의 입담과 차내 TV에서 방영되는 한국여자 골프시합을 보며 유망주 여자선수 계보를 꿰뚫는 전문지식에 골프계 문외한인 나로서는 귀동냥을 참 야무지게 할 수 있었다. 자기는 오늘 하루 집에서 설거지를 안해도 되었다는 게 너무 기뻤다는 이번 여행의 성과소감을 늘어놓아 많은 동기들의 공감을 받았다.
고속도로 노선에 대해서도 어찌나 해박한지 어데서 무슨 도로를 타다 어디서 갈아타면 가장 단거리로 최단시간에 주파한다는 길지식을 무슨 T-맵처럼 읊어대는데 평생을 길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는 그저 전인미답의 최고수 경지 같았다.
옆에 앉은 병록이는 로템에서 잘 나가다 뇌출혈 예방차원에서의 입원생활 후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던 정사장이 2002년도던가 ‘현대 왕자의 난’ 파동 때 몽구아재가 이방원이 됨으로써 공신인 정모를 현대자동차 사장을 거쳐 로템사장으로 보내자 회사를 떠나게 되었고, 자기도 같이 엮여 사직할 수 밖에 없었다는 스토리를 전해 주었다.
현대경제연구원 부원장 출신인 정모는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처세술로 연구원 시절 나를 비롯한 야당들에게는 적지않은 밉상이었다. 하지만 몽구회장의 쿠데타 때 모사 브레인 역할을 좀 해 자동차 사장까지 했는데 결국 1년 정도 하다 능력이 뽀록나 떠나게 하는 자리인 로템 사장으로 가게된 것이었다.
아무튼 배병록이가 요런 사정 속에 로템을 하직하고는 중소기업 중역으로 재작년 퇴직할 때까지 그럭저럭 무난하게 살아왔다는 얘기를 듣다보니 버스는 부산 톨게이트를 지나 우리의 마지막 저녁자리인 해운대 ‘섬진강 재첩국’ 음식점에 도착했다. 마침 내 테이블에서는 윤지한이가 옆에 있어 좋아하는 재첩국 시식과 함께 번쩍거리는 유머감각을 즐길 수 있었다.
<'섬진상 재첩국' 집에서의 마지막 만찬>
내리던 빗발도 부산 들어오자 다시 그쳐 백총장이 오늘 여행길을 위해 날씨조차 마음껏 주무르는 조화술을 부린다는 칭송을 들으며 아침 7시에 떠난 영주 여행길은 그 대미가 저녁 9시 무렵 종료되었다. 제법 긴 하루였지만 내게는 종군여행기를 기록해 달라는 과외의 숙제가 떨어져 수행하느라 하루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낑낑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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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 안 들으니까 기적을 부려(바위를 공중에 뜨게 하여) 겁을 줘서 쫓아 내었다는 얘기고 거기엔 대개 용의 전설이 서려 있고요, 용은 물하고 관계가 있고, 대개 늪이나 못을 메워 절을 지으면 이런 전설이 생긴다지요. 부석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못을 메운 자리지요.
무량수전은 무량수 즉, 나이가 없는(죽지 않는) 아미타('아'는 부정의 뜻, '미타'는 나이, 목숨, 수명)불을 모신 전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란 죽음이 없는 편안한 곳으로 서방에 있다고 하지요. 무량수전은 극락전, 마타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며 당연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지요.
우리가 불교를 잘 믿으면 죽어서 갈 수 있다는 극락은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의 정토이므로 무량수전의 소조아미타불은 동쪽을 향해 앉고 우리는 서쪽을 향해 경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무량수전 전각이 지형상 남향이니 그렇게 앉힐 수밖에 없었겠지요. 아이고, 주저리주저리 좀 아는 척을 했네요.
무량수전 네 귀퉁이의 가는 받침 기둥은 배흘림기둥이 아니라 본래 없던 건데 약간 들리며 길게 빠져나온 처마 네 귀가 세월따라 조금씩 쳐지므로 무너져내리지 않게 받쳐놓은 보기 흉한 임시 방편입니다. 중국 건축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마가 긴 한국 기와집의 해결 못한 건축 약점입니다. 비가 많은 일본 기와 탑은 처마가 상대적으로 더 긴데 네귀의 서까래를 더 안쪽으로 길게 뻗쳐 구조적으로 해결한 것 같습니다.
법사도 무섬마을을 비롯해 부석사는 많이 섭렵하셨는갑소. 벌써 아래 댓글들을 접하려는데 그 해박한 설명들을 들을 염에 가슴이 콩닥콩닥하는구려.. 선묘에 대한 큰 글도 아래 댓글들 접대하고 살펴보리다,
난 처음에 이름도 희귀한 배흘림 기둥이 뭣에 쓸려고 저리 눈에 좀 거추장스럽게 세웠는지 적지아니 의아했심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구만요. 법사는 건축 쪽에도 웬만한 것은 다 꿰뚫고 있는 무불통지의 양반 같소이다. 대단하요..
부석사의 본존불로 모신 아미타불의 모습을 보고는 아미타불의 모습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니의 모습을 하고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항마지인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습을보고 일부 학자들이 그렇게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만.
원익법사의 설명을 들으니 아이타불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재민박사의 글에 원익법사의 해설까지 더해서 풍성하게 차려진..
어제 아침에는 울산에서 함부르크 시절 옛애인이 저그 아들 병무청 문제로 갑자기 부산 찾아와 또 다른 한 친구와 접대한다꼬 해운대서 대구뽈찜 먹으며 한나절을 보냈기에 이 작업이 더 늦어져 부렀소. 백교장이 여행기 완성본을 초조하게 기다릴꺼라 생각하니 하루 더 끌 수 없어 오늘 새벽 2시반에서야 마무리짓게 되었구료. 아무튼 속시원함다.
재민박사에게 감사드립니다.
재민박사님 가을에도 문화기행에 참여해 주시기 바라며 그땐엔 특별 게스트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재민박사와 함께 칙힌 이름모를 여인은 김용섭동기 부인인 김경숙 여사님
입니다. 작년 동기회 송년회때 가요열창대회에서 현미의 밤안개를 불러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60 이 넘어서도 여전히 미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찍는 허한공은 알았겠지만 나는 몰랐던 등 뒤의 부인이 김용섭공의 어부인이란 말인교? 참 6학년 답지 않은 분위기가 팍팍 풍기데요. 용섭이 아재는 처복이 잇빠이인 것 같심다.. 현미 밤안개 노래는 나도 그 당시 현장에서 들어봤네요. 무대에 좀 많이 서보신 느낌입디다.
미노샘, 원고료를 주든지 아님 연말 최우수 동기상을 주셔 ㅎㅎ
가을 기행은 남쪽이라 못갈거 같은데 내년엔 경부선 중간쯤 다시 기획하면 굴러서라도 가야지^^
미노샘 수십명 이끄느라 정말 수고하셨고 김박 기행문은 더 수고...법사의 해설은 더할나위없고 ㅎㅎ
그럼에도 주어진 환경 속에 (하우스 푸어 상황이 타개될 때까지) 잠깐 있을 고난의 시절을 파이팅 하며 헤쳐 나갑시다. 옆과 뒤에는 비슷한 동병상련의 친구들이 득시글 하니 서로 의지함시롱 말임다.
어릴 때는 눈에 여자만 보였지 경치고 뭐고 아무것도 안보였던 것 같심다..
그렇다고 서토처럼 건수가 많았던 것도 아닌데
그럴줄 알았으면 이곳 저곳 명승지나 잘 돌아다녀볼 걸
웬 허송세월만...
그땐 철이없어서 영원히 젊을줄 알았지요..
미국에도 앨라바마주 살다가 평생 다른 스테이트 못가고 죽은 사람이 50% 넘는다던데...
안가본 곳이 많은게 아니고 가 본 곳이 거의 없슴...
심지어는 설악산도 못가봤다가 작년인지 재작년에 처음 가봤슴...
하여간 지금이라도 부지런을 쫌 떠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음..
늙으막에 단신으로 배낭여행?? ㅋㅋ
여행할 때마다 같이 늙어가는 여인네들이 옆에 있어 (좀 젊은 축이면 말할 것도 없고) 살가운 토크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 늙은 젊음도 꽤 갈 수 있으리라 여김다. 마누라 1번, 새 파트너 3번 비율을 지킴시롱..(꿈도 야무지다)..
드론 전문가를 비롯..수명의 촬영팀이 큰돈을 들여 만드는 동영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글의 전개를 보며, 역시 김박사의 글빨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네요.
덕분에..교과서에서 늘 들어오던 영주군 부석사 무량수전이 어떤 목조건물인지 이제야 알게되는군요.
원익법사의 세밀한 댓글까지 조화되니..마치 3D 로 다가오는듯 합니다.
나성 있을 때는..지박사가 주동이 되어 배낚시 등 그나마 이런 기회들을 귀하게 몇차례 가질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여건도 되지못해.. 죄없는 세월만 죽이고 있슴미다.
비록 당일치기일 지언정 같이 참여하여 동행할 수 있는 동기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대학 동문회 등이 있긴 하지만..역시 고교동기들과 함께하는 여행만 한 것이 어디 또 있겠슴미까.
백교장님 등 집행부 동기들의 수고가 많았을 것으로 또한 사료되는군요.
언젠가 같이 참여하게 되면..빨갱이라며(?) 공연히 백안시 하지마시고.. 쫌 잘 봐 주십시요.^^
서토가 스스로를 빨갱이로 자처하며 잘봐달라고 응석부리는 내면은, 프랑스의 유명 극작가 몰리에르가 자기 희곡의 연극상연시 관람석 맨 앞에서 '저런 유치한 장면 대본을 누가 썼나' 하고 온갖 비판적 언사를 날리면 다른 관객들이 '그 x도 모르며 떠들지 말라" 할 때 최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심정 같구료. 아래처럼 친구들이 '니는 최소 노랭이다' 하기를.. 문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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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의 기와지붕이라든지 에스자형 외나무다리가 얼핏 보기에 낡음이나 군더더기가 너무 없어 다소 요새 와서 만든 것 같은 인상은 주지만 이만치라도 보존되고 있어 다행이라 여깁니다. 부석사에 대해선 물어 보신 것도 있고 해서 몇 마디 덧붙일랍니다. 선묘 이야기는 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 댓글로는 좀 그렇고 따로 올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