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상세분석
2025. 9. 3.
1. 개요
한국전쟁은 단순한 남북한 간의 내전을 넘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한 강국이 직간접적으로 대결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전쟁이다. 특히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국군의 참전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데뷔전이자, 미국 중심의 서구 세력에 대한 첫 번째 본격적인 도전이었다. 연병력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중국군의 투입은 한국전쟁을 장기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냉전 구조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 한국전쟁(6.25)의 진행과정
2.1. 발발 배경
한국전쟁은 해방 후 한반도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분단 체제의 산물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스탈린의 묵인과 김일성의 통일 의지, 그리고 미국의 애치슨 라인 발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9년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과 중국 공산혁명의 승리는 동아시아 냉전 질서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김일성은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를 기회로 여겨 무력통일 야심을 구체화했고, 1950년 3월과 4월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받았다. 스탈린은 미국의 직접 개입 가능성은 낮고, 설사 개입한다 하더라도 소련이 직접 연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2.2. 북한군의 기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개시했다.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공격은 준비가 미흡했던 국군을 압도했다.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불과 한 달여 만에 한반도 90% 지역을 장악하는 파죽지세를 보였다.
북한군의 성공은 철저한 사전 준비에 기반했다. 소련의 군사 고문단 지도 하에 약 2년간 공격 계획을 수립했고, T-34 탱크 242대와 야크 전투기 등 최신 소련제 무기로 무장했다. 반면 국군은 미군 철수 후 경무기 위주의 장비만 보유하고 있어 근본적으로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2.3. 한·유엔군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
트루먼 미 대통령은 즉각 한국 지원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며 한국 지원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16개국 전투부대와 5개국 의료지원단이 참전했지만, 초기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초기 참전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24사단이 급히 투입되었지만 오산과 대전에서 연달아 패배했고, 사단장 딘 소장은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했다. 8월 말까지 낙동강 방어선은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고, 부산 교두보마저 위험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2.4. 인천상륙 성공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인천과 서울을 탈환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에 나선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협공하여 38선을 돌파했다. 북한군은 궤멸적 타격을 받으며 급속히 후퇴했다.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군사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습작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인천의 지리적 특성과 북한군의 방심을 절묘하게 이용한 맥아더의 전략적 안목이 빛을 발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 주력은 남북으로 분리되어 각개격파당했고, 전쟁의 주도권이 완전히 유엔군으로 넘어갔다.
2.5. 한·유엔군 쾌속 북진
인천상륙 성공 이후 한·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는 중국 국경 근처인 압록강변까지 진출했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까지 집으로"라는 호언장담을 하며 전쟁의 조기 종료를 예상했다.
38선 돌파 결정은 미국 내에서도 신중론과 적극론이 대립했다. 트루먼 정부는 애초 38선 복원을 목표로 했으나, 북한군의 완전한 붕괴와 통일의 기회가 눈앞에 다가오자 북진을 승인했다. 하지만 중국의 개입 경고는 무시했고, 이는 곧 치명적인 전략적 오판으로 판명되었다.
2.6. 중국군 참전 후 전세 역전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초기에는 소규모 개입으로 위장했지만, 11월부터 본격적인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야간 기습전술에 유엔군은 크게 당황하며 급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국군 참전의 징후는 이미 9월부터 나타났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인도 대사를 통해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맥아더와 워싱턴은 이를 허세로 치부했다.
10월 초 첫 중국군 부대가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넜고, 11월 1일 운산 전투에서 처음으로 미군과 교전했다. 하지만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지원군"이라는 명목을 사용하며 정규군 파병을 부인했다.
2.7. 흥남부두 철수
중국군의 대공세로 동부전선의 유엔군은 고립 위기에 처했다. 특히 장진호 일대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1950년 12월 11일부터 다음 해 1월 4일까지 흥남부두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철수작전이 실행되어 약 10만 명의 유엔군과 9만 명의 피난민이 구출되었다.
흥남 철수는 군사적 패배를 인도주의적 승리로 전환시킨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미군은 군사 장비와 물자를 대부분 파괴하고 철수했지만, 동시에 공산군을 피해 남하한 9만여 명의 북한 주민들을 함께 구출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보여준 인도주의적 면모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2.8. 휴전선 근처 교착전
1951년 1월 중국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후, 전선은 38선 근처에서 고착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이북으로 진출했지만, 양측 모두 결정적 승부를 내지 못하는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부터 진지전 양상을 띠며 고지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이 무렵 독선적인 맥아더가 트루만과 대립 후 전격 경질되고, 후임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에 취임하자 전투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그는 맥아더식의 대규모 기동전 대신 점진적 북진 작전을 택했고, 화력의 우세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951년 3월 서울 재탈환 후 전선이 38선 근처에서 안정되면서, 양측은 더 이상 대규모 영토 변화 없는 소모전을 벌이게 되었다.
2.9. 휴전회담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2년여에 걸쳐 지리한 협상을 벌였으며, 특히 포로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3년 1개월간의 전쟁이 끝났다.
휴전회담의 길어짐은 양측의 정치적 고려가 군사적 필요성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52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루먼 정부는 '명예로운 휴전'을 추구했고, 중국과 북한도 최대한의 정치적 성과를 얻으려 했다. 결국 스탈린 사망과 아이젠하워 취임이라는 정치적 변화가 휴전 타결의 계기가 되었다.
3. 중국군의 파병 동기
3.1. 신중국의 위상 대내외 과시
1949년 10월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한국전쟁 참전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위상을 국내외에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오쩌둥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국 인민의 혁명 정신을 고양시키고, 국내 통합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책무를 다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중국 공산당은 참전을 통해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미국에 맞서고 조선을 돕는다"는 구호로 국민 결집을 도모했다.
이는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국내 통합을 강화하는 전형적인 정치적 수법이었다. 동시에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구(舊) 중국의 굴욕적 이미지를 벗고 당당한 신중국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다.
3.2.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군사방어적 동기
중국의 가장 핵심적인 참전 동기는 안보상의 우려였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의 논리에 따라, 북한의 완전한 붕괴는 미군이 압록강변까지 진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중국의 국경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대만의 장제스 정권과 연계하여 중국 본토를 위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만주지역의 공업시설 보호는 중국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만주는 중국 중공업의 심장부로서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된 산업 기반이 집중되어 있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할 경우, 미군 폭격기의 작전 반경 안에 심양, 안산, 푸순 등 핵심 공업도시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소련이 중국에 약속한 핵우산 제공과 군사 원조도 미군의 중국 국경 근접 시 축소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오쩌둥은 "조선에서 미국과 싸우는 것이 중국에서 싸우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3.3. 신생 중국의 취약점 보완
갓 건국된 중국은 내부적으로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국민당 잔존 세력의 활동, 소수민족 지역의 불안정, 경제 재건의 과제 등이 산적해 있었다. 대외적 위기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의 명분을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인민해방군의 실전 경험을 축적하고 군사력을 현대화할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특히 신장과 티베트 등 변경지역의 통제 강화를 위해서도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체제가 필요했다.
한국전쟁 참전은 이러한 내부 통합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실제로 군사조직의 현대화와 당의 군 통제력 강화에도 기여했다. 또한 소련으로부터의 군사 원조 확대를 통해 중국군의 장비와 전술을 현대화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4. 개입 초기 중국군의 성과
4.1. 은둔 매복 침투
중국군의 가장 큰 전술적 특징은 비밀스러운 침투와 은밀한 이동이었다. 주간에는 숨어 있다가 야간에 이동하고, 산악지대의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유엔군의 제공권 우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철저한 위장술을 구사했으며, 현지 주민으로 위장하여 정찰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은밀한 전술로 인해 유엔군은 중국군의 규모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중국군은 "적진깊이 침투하되 발각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행동했다.
낮에는 민가나 산림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이동했고, 요리도 연기가 나지 않는 찬 음식만 먹었다. 부대 규모도 소대나 중대 단위로 분산하여 이동함으로써 유엔군의 항공 정찰을 피했다. 이러한 전술은 중국군이 게릴라전에서 축적한 경험의 산물이었다.
4.2.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중국군이 거둔 가장 인상적인 승리 중 하나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중국 제9병단 15만 명이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을 포위 공격했다. 중국군은 인해전술과 야간 기습을 통해 유엔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결국 유엔군의 흥남 철수를 강요하는 데 성공했다.

쑹스룬이 지휘하는 중국 제9병단은 산동성에서 급파된 부대로, 한국의 혹독한 추위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면화 군복을 입고 참전한 중국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동상에 걸렸지만, 이들은 "얼어 죽더라도 후퇴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싸웠다.
중국군은 밤마다 나팔과 꽹과리, 호각 소리를 내며 심리전을 펼쳤고, 미군은 이를 "중국군의 공포 음향"이라고 불렀다. 결국 미 제1해병사단은 "공격하면서 후퇴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패주나 다름없는 철수를 해야 했다.
4.3. 군우리 전투
1950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군우리 전투는 중국군 참전의 충격을 여실히 보여준 한·유엔군의 치욕적인 패배였다.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중국 제39군과 제40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특히 국군 제8연대는 거의 전멸 수준의 피해를 당했으며, 이 전투를 통해 중국군의 본격적 참전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유엔군 수뇌부는 중국군 참전 징후를 포착하고도 이를 과소평가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은 기껏해야 5-6만 명 정도의 의용군"이라고 판단했고, 워커 제8군 사령관도 중국군의 전투 능력을 얕보았다.
하지만 중국 제39군 제116사단과 제117사단이 운산과 군우리에서 보여준 전술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밤에 산악지대를 통해 침투하여 유엔군의 측후방을 공격했고, 나팔과 총성으로 혼란을 야기한 뒤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국군 제8연대는 하루 만에 70%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미군도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으며 급히 후퇴해야 했다.
4.4. 서울 재점령
1950년 12월 31일 중국군은 제2차 공세를 개시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했다. 이는 한국전쟁사상 서울이 네 번째로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은 야간 공격과 침투 전술을 통해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유엔군은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은 심리적 충격이 컸다. 불과 3개월 전 압록강변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이 다시 37도선 이남으로 밀려난 것이다. 중국군은 이 공세에서 약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특히 서부전선에서 집중 돌파를 시도했다.
유엔군은 한강선 방어를 포기하고 급히 남쪽으로 후퇴했으며, 서울 시민들은 1.4 후퇴라는 또 다른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5. 중국군의 2~5차 공세와 유엔군의 반격
5.1. 제2차 공세와 서울 재점령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국군의 제2차 공세는 가장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였다. 중국 제13병단과 북한군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유엔군을 37도선 이남까지 밀어냈다. 이 공세로 서울이 다시 공산군 손에 넘어갔으며, 유엔군은 전면적인 재편을 해야 했다.
이 공세에서 중국군은 기존의 인해전술에 더해 집중 공격의 전술을 구사했다. 주공격 방향을 서부전선으로 정하고 약 3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도 견제 공격을 가했다. 특히 임진강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와 벨기에군이 중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유엔군 전체의 후퇴로 이어졌다.
5.2. 제3차 공세와 한계 노출
1951년 2월 11일 중국군은 제3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이전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엔군이 중국군의 전술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화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 방어전을 펼쳤다. 중국군은 보급선 연장과 피로 누적으로 인해 공세 지속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리지웨이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밀어붙이기(Operation Killer)" 작전으로 불린 이 전술은 영토 점령보다는 적군 병력 소모에 중점을 두었다. 집중 화력으로 중국군을 소모시킨 후 점진적으로 북진하는 방식이었다. 중국군은 이러한 화력전에 취약함을 드러냈고,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5.3. 지평리 전투 (1951년 2월 13-15일)
지평리 전투는 중국군의 인해전술이 유엔군의 화력 우세에 부딪혀 좌절된 대표적 사례다.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 국군 제1사단이 중국군 제39군과 제40군의 집중 공격을 막아냈다. 유엔군은 포병과 항공 지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중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유엔군의 집중 포화에 막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특히 밤새 계속된 중국군의 공격을 유엔군이 조명탄과 집중 포격으로 막아낸 것은 중국군 전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후 중국군은 정면 공격보다는 우회 기동을 선호하게 되었고, 대규모 인해전술의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5.4. 제4차 공세의 실패와 유엔군 반격
1951년 3월 7일부터 시작된 중국군의 제4차 공세는 이전 공세들과 달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엔군은 중국군의 전술에 완전히 적응했고, 공중 화력과 포병 지원을 극대화한 방어전을 구사했다.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고 후퇴해야 했으며, 이후 유엔군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특히 "썬더볼트(Operation Thunderbolt)" 작전과 "킬러(Operation Killer)"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중국군을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1951년 3월 14일 서울이 재탈환되었고, 중국군은 38선 이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군의 공세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전쟁의 주도권이 다시 유엔군으로 넘어갔다.
5.5. 제5차 공세와 현리 전투 (1951년 5월 16-22일)
현리 전투는 중국군 제5차 공세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투로, 한국군에게는 또 다른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중국 제3병단과 제9병단이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을 집중 공격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특히 한국군 제5사단 15연대는 거의 전멸 수준의 피해를 당했으며, 이 전투로 중부전선에 큰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이 5차 공세는 중국군에게도 마지막 대규모 공세가 되었다. 유엔군의 신속한 반격으로 중국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보급선의 과도한 연장으로 더 이상 지속적인 공세를 펼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중국군은 방어 위주의 작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6. 지리한 휴전회담 과정
6.1. 휴전회담의 시작과 주요 쟁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회담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이었다. 주요 쟁점은 군사분계선 설정, 정치적 해결방안, 포로송환 문제, 그리고 휴전 후 한반도 문제 등이었다. 특히 포로송환 문제는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떠올랐다.
유엔군 측은 '자유송환 원칙'을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전원강제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가리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중국군은 많은 수의 포로들이 공산주의 체제로의 송환을 거부할 경우 체면상 큰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다.
6.2.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과 협상 중단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포로들의 폭동과 수용소장 도트 준장의 납치 사건은 휴전회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친공 포로들과 반공 포로들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수용소 내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공산군 측에게 포로송환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할 명분을 제공했다.
중국과 북한은 이 사건을 빌미로 유엔군의 포로 관리 능력을 문제 삼았고, 휴전회담은 수개월간 중단되었다. 특히 중국군은 이 사건을 통해 국제 여론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했으며, 실제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6.3. 스탈린 사망과 협상 재개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은 휴전회담에 전환점을 제공했다. 후르시초프를 중심으로 한 소련 신지도부는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에게도 한국전쟁의 조기 종료를 압박했다. 마오쩌둥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국내 재건 지연을 우려하여 휴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취임도 협상 재개에 기여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공약으로 한국전쟁의 조기 종료를 내세웠고, 취임 후 실제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암시하며 중국을 압박했다. 이러한 국제 정치적 변화가 맞물리면서 휴전협정 체결의 동력이 생겨났다.
6.4. 최종 합의와 휴전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군사분계선은 실질적 전선을 기준으로 설정되었고, 포로송환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중재 하에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정치적 문제는 휴전 후 별도의 정치회담에서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중국군에게 이 휴전협정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확보한 성과였다. 북한의 붕괴를 막고 중국의 안보 이익을 확보했으며, 미군과 직접 대결하여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 비록 통일된 조선의 건설이라는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현상유지를 통해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했다.
7. 중국군과 한·유엔군 측의 득실
7.1. 중국군의 성과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여러 측면에서 전략적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북한 정권의 붕괴를 막고 완충지대를 유지함으로써 중국의 국경 안보를 확보했다. 둘째,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 대결에서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음을 입증하여 신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셋째,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군사 원조를 받아 중국군의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항미원조"라는 구호 하에 국민 통합을 강화했고, 혁명 정신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인민해방군도 실전 경험을 통해 현대전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특히 야간 전투와 산악전에서 독특한 전술을 개발했다.
7.2. 중국군의 손실과 대가
하지만 중국이 치른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중국군의 사상자는 약 18만 명에 달했지만, 실제로는 4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주석 마오쩌뚱의 아들 마오안잉과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아들 펑안화를 비롯하여 많은 고급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경제적 부담도 심각했다. 전쟁 비용으로 중국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지출해야 했고, 이는 경제 재건과 산업화를 크게 지연시켰다. 또한 미국과의 대립 격화로 서방 세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특히 대만 문제 해결이 장기화되면서 중국의 통일 대업에도 차질이 생겼다.
7.3. 한·유엔군 측의 성과
한·유엔군 측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으며,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막아 동아시아에서 공산화의 도미노 현상을 차단했다. 또한 한미동맹과 한일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마련했고, 유엔의 집단안보 체제의 실효성을 입증했다.
군사적으로도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고, 제공권과 화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 현대전 수행 능력을 향상시켰다. 특히 다국적군의 합동작전 경험을 축적한 것은 이후 냉전 체제 하에서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7.4. 한·유엔군 측의 손실
반면 한·유엔군 측의 손실도 막대했다. 한국군의 사상자만 22만 명에 달했고, 유엔군도 1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특히 미군은 3만 6천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하여 약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제적 피해도 천문학적이었다. 한국의 산업시설과 사회간접자본이 거의 전부 파괴되었고, 전쟁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렸다. 분단의 고착화로 이산가족의 아픔이 지속되었고, 남북 간의 적대감이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도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출해야 했고, 맥아더 경질 등으로 국내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8.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8.1. 냉전체제 형성에 미친 영향
한국전쟁은 단순한 지역전을 넘어 냉전체제의 성격을 결정지은 분수령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과 소련·중국으로 대표되는 양 진영의 대립 구조가 확고해졌고, 특히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최전선이 한반도에 형성되었다. 중국의 참전은 공산진영의 결속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쟁 이후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한일동맹, 한미동맹 등을 통해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했다. 중국도 소련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서방세계와 대립하는 구도가 고착되었다. 이러한 냉전 구조는 197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까지 지속되었다.
8.2. 중국의 국제적 지위 변화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변화시켰다. 신생 공산국가였던 중국이 미군과 직접 대결하여 대등하게 맞서 싸운 것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방세계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유엔에서 중국의 대표권 문제가 20여 년간 지연되었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1970년대까지 미뤄졌다. 이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국제사회 참여에 상당한 제약 요인이 되었다.
8.3. 군사전략 수행능력의 발전
한국전쟁은 현대 군사사에서 여러 교훈을 제공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야간 침투 전술, 유엔군의 화력 중심 전술과 공중지원 전술 등이 서로 경쟁하며 발전했다. 특히 제한전쟁의 개념이 확립되었고, 핵무기 시대에도 재래식 전쟁이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군은 이 전쟁을 통해 현대전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특히 열악한 장비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독특한 전술을 개발했다. 이는 이후 베트남전쟁 등에서 공산군이 사용한 전술의 원형이 되었다.
8.4.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한국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였다. 전쟁 이전의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분단이 제도화되었고, 이는 70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중국의 참전은 북한 체제를 유지시켜 통일의 기회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분단의 고착화는 한민족에게 이산가족의 아픔과 분단비용 등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 또한 남북한이 각각 다른 체제로 발전하면서 통일의 난이도가 더욱 높아졌다. 중국은 현재까지도 북한의 가장 중요한 후원국 역할을 하며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자로 남아있다.
9. 마무리 결언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의 참전은 단순한 군사적 개입을 넘어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질서를 결정지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했고,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 순망치한의 논리에 따른 안보상의 필요와 신중국의 위상 과시라는 정치적 동기가 결합되어 대규모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중국군의 은밀한 침투매복 및 인해전술은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유엔군이 적응하며 그 효과는 점차 감소했다. 장진호 전투와 서울 재점령 등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평리 전투 등에서 드러난 것처럼 화력전에서는 근본적 한계를 보였다. 결국 중국군도 대규모 공세 능력을 상실하고 방어 위주의 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2년여에 걸친 지리한 휴전회담 과정에서 중국은 포로송환 문제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지만, 결국 현상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스탈린 사망과 국내 재건의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휴전을 수용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의 참전은 북한 체제 유지라는 최소 목표는 달성했지만,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과 서방세계와의 관계 악화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또한 이 전쟁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분단 체제의 원인을 제공했다.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동아시아 냉전체제 형성의 결정적 계기였다. 이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의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 경험으로 남아있다.
특히 중국이 여전히 북한의 핵심 후원국으로서 한반도 문제의 주요 당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 마닐라공
- 25.09.09 07:32
- 첫댓글 1945년 8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4년간의 국공내전은 홍군의 승리로 끝나지요.
- 그런데 중일전쟁은 국부군과 일본군과의 싸움이었고,홍군은 한발짝 물러나 있었습니다.
- 말은 국부군이 200만이었는데,반하여 일본군은 25만으로 수적으로는 국부군이 우세였지만,
- 장병들의 훈련,화력이나 군수품 조달에 있어서는 재정이 열악한 국부군은 일본군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 우선 국부군은 90% 이상이 문맹에 시골 출신이 80% 이상으로 지방의 사투리로 명령 전달이나 작전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 이들은 배가 고파서 입대하였습니다.무장도 총이 부족하여 연월도 차고 일본군에 맞섰는데,즉 대가리수로 병력을 갈아 넣는 것이 나중에 한국전쟁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 장교나 하사관의 수준도 일본군에 비하여 형편이 없었습니다.일본은 문재해독에 연산 가능한 병사는 97% 였습니다.
- 중학교 이상이 1/3이란 통계도 있습니다.
- 국부군은 포병도 일본군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고 ,병력이동 수단으로 차량은 거의 없었습니다.
- 거기다 국부군의 구성 성분도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병력은 1/5인 40만명 정도 이고,나머지는 지방의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로 충성도도 떨어졌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09 08:36
-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주로 대적한 것은 중국군의 주류를 이루었던 국부군이 맞네요. 병력이 적고, 활동 무대가 농촌과 산악지대였던 홍군은 일본군 주력과 크게 부딪힐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병력 온존 기회가 더 많았심다. 큰 전투가 벌어질 때는 물론 국부군과 연합하는 전투원으로 참전했지만 나름 독립성을 유지했기에 큰 매는 국부군이 거의 다 맞았네요.
- 국부군이 일본군 주력을 막는 동안 홍군은 농촌과 산악지역에서 주특기인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 병참부대들을 괴롭히는 역할을 했었심다. 마오식 대민친화 정책을 펼쳐 농촌주민들을 홍군에 많이 끌여들여 일본이 패망했을 무렵에는 120만 대군으로 훌쩍 커져 있었네요. 어찌보면 국부군이 큰 형으로 더 많은 희생을 당하는 동안 홍군은 실속을 차리며 힘을 키우는 형국이 되었심다.
- 하지만 마공 말대로 국부군은 일본군에 비해 질적 전력이 많이 떨어져 일본군에 항상 두들겨맞으며 맷집이 저하되는 형세였네요. '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대패 후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이 미군에 크게 몰렸지만, 이 시기에도 대륙내에서는 중국군에 대해 여전히 일정한 전력 우위를 유지했심다.
-
- 마닐라공25.09.08 21:02
- 장개석은 국부군을 독일의 바이마르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정예화를 꾀하였지만
- 개전초기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본군과의 1937년 상하이 전투에서 그나마 없는 돈에 마련한 독일식 편제 병력 27만을 다 잃어버립니다.
- 그리고 병사들의 대부분이 아편중독자이고 군화가 아닌 짚신을 싣는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 그러나 아편 기운때문인지 용감했다고 합니다.
- 이는 한국 전쟁에서 고량주 먹고 술에 취헤서 밀려드는 인해전술이 재현됩니다.
- 중국의 지상과제는 대만을 무력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년 5월 1일 린뱌오(林彪) 휘하 중공군 40군과 43군은 당시 국민당 치하였던 하이난섬을 침공 5일 만에 점령했습니다.
- 그리고 미의 에치슨라인의 발표로곧바로 대만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 김일성은 홍군이 대만을 침공하면 남침은 물 건너 간다 판단하고,
- 모텍동에게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기습 남침을 하였습니다.
- 대만이 적화되면 미군이 한반도 적화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 판단을 하였지요.
- 6·25가 터지자 중국의 대만 침공은 제동이 걸렸다. 필리핀에 있던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하였지요.
- 이에 모택동의 대만침공은 좌절되었습니다.
-
- 김재민작성자 25.09.10 06:33
- 장제스의 정예 근위군은 당시 유럽 최강으로 여겨졌던 독일식 군대 편제와 무기 운용 시스템을 받아 들였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선빵 날린 일본군에 상하이 전투 등에서 기선을 빼앗기고 수세에 몰려 탈탈 털리기 시작했네요. 하지만 이는 실전경험 많은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질적 차이와 무기장비면에서의 차이에 기인한 바가 컸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아편중독자라서 그랬다는 마공의 묘사는 좀 오바했다고 보여짐다.
- 신중국 건설 후 홍군은 북베트남에 인접한 국부군 치하의 하이난 섬을 린바오군을 동원해 전격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대만의 관문인 금문도를 함락하는데는 대실패하자 그간 망연자실해 있던 미국이 7함대를 신속히 동원해 대만해협을 방어하는 타임을 만들어줘 버렸심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바로 터져 대만 공략은 후일사로 미루게 되었지요.
- 마닐라공
- 25.09.08 18:38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황이 바뀌자
- 중공지도부는 김일성의 파병 요청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모택동과 팽덕회 외에는 건국 초기의 불안정으로 반대를 하였습니다.
- 당시 만주국의 병력을 고스란히 물러 받은 만주의 실력자이던 가오강(高崗) 제4야전군 사령관도 결사적으로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 전쟁에 중공군을 투입한다면 자신 휘하의 만주 병력이 가장 먼저 총대를 멜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그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터뜨리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였지만,
- 모택동으로서는 파병이 또 하나의 정적을 무너뜨리는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 毛가 파병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순망치한(脣亡齒寒),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태롭다는 논리였습니다.
- 두 번째 이유는 가오강의 세력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는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만주의 제4야전군은 중공군 중 가장 대규모 최정예 병력이었습니다.
- 2차대전 당시 만주는 일본이 대륙 침략기지 삼아 산업화시켰던 곳으로 만주는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업화된 지역이었습니다.
- 소련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무기들도 모두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습니다.
- 김재민작성자 25.09.10 07:06
- 마오가 정황상 미군의 인천상륙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일성에게 대비하라는 경고를 주었건만 낙동강 전선 돌파에 모든 것을 걸었던 북한군은 여기에 대처할 군사적 여력이 거의 없었네요. 알고도 맥아더에 당했다 할 수 있겠심다.
- 이 때를 기점으로 서울을 수복한 한미군과 낙동강 전선에서 치고 올라온 워커의 미8군 및 한국군 사단들은 북한군을 토끼몰이하듯 포위하여 섬멸하기 시작했지요. 서울수복후 보름도 안되어 38선을 돌파해 10월 중순에 빠른 한국군 사단은 혜산진까지 도달하는 기세를 올렸심다.
- 하지만 5000분의 1 성공확률의 인천상륙 도박에서 상대방의 똥플레이로 정말 운 좋게 군사적 성공을 쟁취한 맥아더는 자신을 무슨 군신으로 여기는 오만한 자아도취 속에 '성공의 저주'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기회에 만주까지 점령하겠다는 힘자랑을 자주 해 미국 조야와 트루만을 너무 불안케 해 적전 해임의 씨앗을 스스로 잉태하게 했지요.
- 맥아더의 호전적인 무력시위는 결국 마오에게 조선파병이라는 명분도 줘버립니다. 펑더화이가 지휘한 중국군 30만이 10월24일 한반도에 이미 잠입했지만 맥아더는 그럴리 없다고 스스로와 전세계에 부인하며 위험을 더 키웠네요.
-
- 마닐라공25.09.08 21:04
- 가오강은 자신의 세력과 스탈린의 뒷배를 믿고 마오의 리더십을 위협했습니다.
- 가오강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스탈린이었습니다. 동북의 모든 건물에 자신과 스탈린의 사진만 나란히 걸어 놓게 했습니다.
- 가오강 만세는 불러도 마오쩌둥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모택동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 毛는 6·25를 통해 이런 가오강을 제거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전쟁이 끝난 후 제4야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가오강의 세력 약화는 피할 수 없었다.
- 중공군은 가장 대규모인 145만여 명이 파병돼 60만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는 등 통일을 눈앞에 두고 우리의 통일은 물날라갔습니다.
- 우리는 모택동이때문에 통일이 날라갔고
- 모택동이는 김일성 때문에 대만흡수로 통일을 이루는 꿈이 날라갔습니다.
- 진평이가 대만을 먹을려고 하는데 그게 참.. 또 하나의 국제전이 벌어지겠습니다.
-
- 김재민작성자 25.09.09 11:11
- 가오강이 동북지역에서 소련군의 비호를 받아 지역 강자로 떠올랐지만, 마오를 적대적 경쟁자로 삼지 않고 공산당 지도부의 협력 파트너로 받아들여 마오에게는 아주 충직하게 대했네요. 마오 역시 그를 믿을만한 협력자로 여겨 서로 좋아하는 브로맨스 관계를 꽤 오래 유지했심다.
- 특히 한국전쟁 파병결정시 린바오 등 반대의견이 더 많았지만 펑더화이와 함께 마오의 파병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마오의 수호자 역할을 확실히 하며 실질적인 2인자 위치를 당내에서 굳혔지요. 하지만 매사 그렇듯이 이런 절정에서 나락으로 가는 길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함다. 한국전쟁 후에도 2인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기세등등해진 가오강을 견제하는 다른 경쟁자들의 음해 공작이 발동하지요.
- 태생적으로 의심이 많은 마오가 다른 이들의 가오강에 대한 설레발에 흔들리기 시작해 가오강에 대한 믿음을 거두면서 두 사람 관계는 소원해지고, 당 지도부회의에서 마오의 묵인 속에 공개비판에 처한 가오강이 격분해 권총자살 시도로 거친 항의를 함미다. 미수에 그친 자살시도는 더 큰 화를 초래해 사면초가에 빠진 가오강은 결국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칩니다. 14년 후 라이벌 린바오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지요.
-
- 마닐라공25.09.08 16:46
- 사실 전쟁이라는 것이 독소전처럼 전선에서 처절하게 박이 터지도록 싸우는 것보다
- 勢에 의해서 들어갔다가 나갔다하면서 전기를 마련하는 것인데
-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冬將軍에게 나가 떨어졌듯이
- 한국전쟁에서는 미군이 한국의 추위에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 보급이 미약한 중공군도 추위에 많이 얼어 죽었습니다.
- 심지어 필리핀군들은 전사자보다 동사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고지를 마주하고 중공군 저격병들에 의한 사망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 나중에는 아군도 이에 맞섰다고 합니다만,휴전협정을 앞두고는 한국전은 미군과 국군과의 싸움이 되고
- 북한군은 한발짝 물러나있었습니다.
- 전쟁 중에는 고집피우는 김일성은 팽덕회한테 볼테기도 얻어 맞았습니다.
-
- 김재민작성자 25.09.10 06:55
- 기세등등하게 북진하던 한미군은 은밀하게 침투해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의 포위망에 걸쳐 50년 11월 초부터 크게 패배하기 시작했네요.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미해병 1사단은 중국군의 포격과 백병전 공세에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그 못지않게 흥남까지 허겁지겁 도보로 패주하며 동상에 걸리고, 얼어죽는 병사가 꽤 되었심다. 1개 사단에서 3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1주일 사이에 내었으니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네요.
- 참전 필리핀군의 사상자 규모는 내가 읽은 한국전쟁사 책들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필리핀에 오래 거주한 마공은 필리핀측 기록까지 살펴본 모양이네요. 저격병 얘기는 전선이 교착된 '51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짐작됨미다. 영화 '고지전'에서 북한측 여군 저격병 얘기가 나오지요.
- 마오는 처음 중국군 총사령관에 대만 공격 준비하던 쑤위, 국공내전시 군사적 지략가 린바오(임표)를 지명하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심각한 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파병론을 적극 지지해준 고향후배 펑더화이를 임명했네요. 펑더화이는 미군의 워커처럼 외골수 군사전문가였심다. 자기 군을 다 말아먹은 김일성이 막무가내로 진격하라 쪼아대다 열받은 펑더화이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네요.
- 마닐라공25.09.09 12:14
- @김재민 매년 6.25가 되면 대사관에서 필리핀 참전용사들을 기념 행사에 초청하여
- 연회도 베풀고 건강 첵크도 해주고 의료비 지원도 해주고,심지어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 경제적인 도움도 줍니다.그러나 매년 참가하는 참전용사들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 언젠가 참전용사들에게 당시의 추위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 궃은 날의 밤에는 스웨터에 코트를입고 털모자까지 쓰는 것을 보면 우리의 겨울날씨가 제일 큰 적이었을 것입니다.
- 심지어 이북의 오리사냥은 총이 필요 없이 그냥 낫을 들고 얼어 붙은 오리의 다리를 베면 된다는 농담까지...
- 터키의 앙카라에는 한국 공원이 있어 참전 용사를 기리고,대사관에서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 한국으로 유학도 알선해줍니다.
- 한때 우리 큰 놈이 대사관의 부탁으로 유학생 선발에 관여한 바가 있습니다.
-
- 김재민작성자 25.09.09 12:10
- @마닐라공 아하, 그런 스토리가 있었네요. 필리핀 참전용사 기념 모임에서 한국전에서의 생생한 얘기들 많이 들었겠심다.
-
- 마닐라공25.09.09 12:30
- 그런 것을 보면 모택동에게 맞선 유소기나 임표와는 달리
- 주은래는 외교가로서 수완 뿐 만 아니라 차세대 지도자를 찾고 길러내고 준비하는데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 결코 1인자 자리를 넘보거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2인자가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진정으로 인민과 국가를 위해 충성한 인물이었습니다.
- 20세기 중국을 이끈 인물을 압축한다면 주은래가 없었다면 마오쩌둥도, 신중국도, 지금의 부상하는 중국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지나친 표현이 아닌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은래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그를 평가하였습니다.
-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는 짓은 중국 인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국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한국 역사다.”는 그의 주장은 동북공정을 강행하는 현 중공의 지도층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
- 마닐라공25.09.09 12:28
- 사실 중공군의 보병 화기는 미군 등 여러 유엔군보다 더 우수하였습니다.
- 그리고 국공내전,중일전쟁 등을 통하여 실전의 경험을 쌓은 군대였습니다.
- 물론 장개석의 국부군의 패잔병도 중공군에 자연히 편입되었습니다.그러다보니 전후에 많은 중공군 포로들이 대만으로 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 팽덕회를 비롯한 지휘관들도 전장에서 뼈가 굵은 노장들이었습니다.
- 중공군의 보병 전술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아주 뛰어났습니다.
- 야간전투에는미군의 측면을 맡고 있던 한국군의 약점을 파고 많이 괴롭혔습니다.
- 소련이 약속한 항공지원을 못 받는 바람에 보급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강군이었습니다.
- 홍군의 대병력이 한국에 있는 것이 장개석이 본토를 침공할 좋은 기회라로 장개석은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길 원하였지만 ,이것이 3차 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됩니다.
-
- 김재민작성자 25.09.10 06:47
- 이 얘기는 전반적으로 마공의 말이 맞네요. 화력과 기동력은 미군에 비해 엄청난 열세의 중국군이지만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통해 야생의 생존적 실전감각과 정신력에서 뛰어난 우위로 '도보이동 싫어하고, 야간전투에 맹하며, 공군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미군의 맹점을 파고들어 한국전쟁에서 초반 승리를 많이 낚아챕니다. 펑더화이의 군사전략적 리더쉽이 빛을 발했지요.
- 하지만 남으로 내려올수록 보급선의 취약함과 급증하는 사상자 수에 펑은 캐퍼를 넘어서는 무리한 공격은 되도록 안하려 했심다. 그런데 초반 승리에 간이 커진 마오가 정치적 효과를 위해 계속 남진하라고 닦달질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도 냉랭한 기운이 생겼네요. 펑더화이가 한국전쟁 후 중국군부에서 뒷줄에 앉혀져 있다가 문화혁명시 홍위병에게서 개모욕을 당한 후 숙청되는 씨앗이 되었심다.
-
- 마닐라공25.09.09 11:57
-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항공기 폭격에 중공군은 두더쥐처럼 땅굴을 팠습니다.
- 땅굴에 대한 기록입니다.
- "갱도 건설 목적을 분명히 했다. 방공(防空), 방포(放砲), 방독(防毒), 방우(防雨), 방조(防潮), 방화(防火), 방한(防寒) 7가지를 철저히 하라고 주지시켰다. 형식도 통일시켰다. “갱도 입구는 두터워야 한다. 10m에서 15m로 해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 짧게는 100m, 멀어도 500m 이상은 불허한다. 출구도 중요하다. 적어도 2개 이상 만들어라. 갱도의 폭은 1.2m, 높이는 1.7m를 기준으로 한다. 그 이상은 돼도 이하는 안 된다. 내부 시설도 만전을 기해라. 무전실과 사무실 외에 식량 창고와 탄약고, 주방, 화장실, 목욕 시설, 휴게실을 완비해라.” 1952년 새싹이 돋을 무렵, 눈에 보이지 않는 지표(地表) 밑에 거대한 용이 자리 잡았다. 만리장성에 비견될 사방으로 연결된 6250Km짜리 갱도였다. 금수강산의 땅속을 흉하게 만든 지원군은 환호했다. “우리의 갱도는 지하장성(長城)이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다.” 마오쩌둥은 갱도 완성에 만족했다 .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 미군의 화력에 밀리지 않았다. 보급선도 단절된 적이 없었다." (출처: 중앙일보)
-
- 김재민작성자 25.09.10 07:23
- 90년대 공산권과의 수교 이후 중국과 소련의 한국전에 관한 여러 비사적 기록물들을 더 알게 되었네요. 이들이 가진 자국군에 대한 정보가 좀 과장되고 미화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같은 사안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가지는 데는 큰 역할을 한다 여겨짐다.
- 6, 70년대 한국영화에 나오는 중국군은 마치 생각없는 좀비들처럼 한국군 진지로 돌격해오는 인해전술에 우리가 중과부족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런 선입견을 많이 교정시켜주었다 하겠심다.
- 중국인 저자 왕수쩡이 쓴 '한국전쟁'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병사들 개개인이 사람의 감정을 가진 채 '조국수호의 첨병'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한국에서의 개개 전투에 임했을을 묘사하고 있네요. 물론 공산체제가 잘하는 선동선전술에 혹해 오바하는 거짓 허세감을 가지기도 했겠심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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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토25.09.09 02:44
- 우리의 근현대사에 관한 것이라..기 평가된 역사로 보이지않고..계속
- 진행되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읽어지는 기분입니다.
- 본문을 보며 크게 와닿는 것은..중국이 한국전쟁에 어찌그리 과감히..
- 그리고 병력면에서도 큰 물량을 지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 어렵사리 통일을 막 이루어낸 싯점이라..그리하기가 쉽지않았을 터인데 말이지요.
- 이런 사실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전쟁도 인간적 감성에
- 크게 좌우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 부각될 수 있는듯 합디다.
- 사태 직전에, 작은 힘이나마 같은 이념을 가진 동지적 입장에서 함께 피흘리며
- 외부의 적과 싸운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 말이지요.
- 어찌보아..어떤 결정적 순간에는.. 더욱 탄력 받게되는 사유일 수 있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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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민작성자 25.09.09 12:43
- 마공 글에 긴 댓글로 응대하고 나니 드디어 서토의 글이 나타나는구료. 서토나 나나 우리가 70년대까지 배운 한국전쟁에 대한 지식으로는 이 복합적인 전쟁에 대한 실체 파악이 참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디다.
- 우리가 배운 한국현대사 책에는 북한 남침-> 낙동강까지 밀림-> 인천상륙 성공-> 한미군의 쾌속 북진-> 중국군 개입->1.4 후퇴->휴전회담 속 교착전->정전조인으로 끝나는데 실제로는 1.4 후퇴까지만 다룬 한국사 전반부만 기술되었지요. 남은 2년의 전쟁기간은 그냥 두루 뭉수리하게 표현되고요.
- 한국전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들을 통해서도 제한적으로만 그 전모를 맹인 코끼리 만지듯 알 수 밖에 없으니 그 궁금증이 참으로 갑갑했심다. 서토가 내가 기술한 이 상세 분석 글을 잘 읽고, 참고 도서 중에 한 두권 찾아 읽기까지 하면 얼매나 좋을꼬 싶네요. 뭐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알기에 넋두리 삼아 그냥 해봄다. 서토25.09.09 02:53
- 마공의 글이 보강되니.. 더욱 해당 역사가 입체화 되는 느낌입니다.
- 잘은 모르겠습니다만..만주쪽에 가오강이란 세력이 있었다는 점이 새롭네요.
- 정치나 권력다툼 견지에서는 상당 부분 신빙성 있어 보이는 내용이군요.
- 어쨋거나..본문과 같은 역사와 배경을 가진 현재의 동북아 인데..
- 이러했던 역사를 배경으로..현재 다가오고 있는 현실에 대해
- 어찌 대처해 나가야 할 지를...
- 경고인을 포함하여 모든 한국인들 모두가..함께 합심하여 중지를
- 모아가야 할 여건이 다가오고 있다 생각함미다.
-
- 이법사25.09.09 07:27
- 잘 읽었습니다.
- 내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100% 확언헐 수 없지만 모택동의 중국군이 위태로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김박이 정리한 여러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깊은 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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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공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때 모택동의 홍군은 국부군에 몰려 만주에서 완전히 소탕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당시 북한에 갓 자리를 잡은 김일성이 아무 댓가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터 주어 이 살아남은 홍군을 무기와 함께 받아들여 숨겨 주었다.
- 2. 정세가 조금 바뀌어 홍군에게 숨통이 트이자 북한에 들어와 있던 홍군은 무기를 들고 다시 본토로 몰래 빠져나가 모택동 세력을 되살려 주었고 이는 결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최종 승리를 거두는 중요한 무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 3. 이리하여 중국과 북한은 국공내전과 항일전선에서의 홍군 속의 조선인들의 기여와 더불어 중국을 살려준 은인으로서 문자 그대로의 혈맹 관계이다.
- 4.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내세운 항미원조는 자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정치적인 구호이기는 하나 그것만은 아니며 북한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한 깊은 뜻도 들어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되며 남한이 추후 외교정책 입안시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착오를 맛볼 것이다.
- 5. 시대가 흐름에 따라 중국의 장정 세대와 북한의 빨치산 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신세대가 정권을 잡고 있어 이러한 본래의 혈맹 관계는 그 강도가 옅어졌지만 무시할 수준은 절대 아니며 서구식의 외교관계 공식을 기계적으로 입력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 맞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이 미국과 혈맹이라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른 관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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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민작성자 25.09.10 07:17
- 법사가 읽은 북한과 중국의 혈맹관계를 논할 때 국공내전에서 쫓기던 린바오군을 김일성이 북한영내로 받아들여 피신처 제공과 함께 회복까지 시켜준 기여는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편에서 나오는 얘기임다. 린바오와 마오가 김일성의 호의에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할 만한 사건이었지요.
- 법사 말대로 이런 호의를 되갚을 기회가 궁지에 몰린 김일성을 파병으로 구하자는 의견을 모우는데 적지않게 기여했을 것임다. 그렇지만 군사전문가를 자처하는 린바오는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펼치는 것은 자살행위다 라고 여겨 강력한 파병 반대론자의 편에 서지요. 결국 린바오는 자기 소신대로 한국전쟁에서는 한발 빠지며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아주 소극적으로 지키는 모양새를 보였심다.
- 북한으로부터는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낙인까지 찍히면서 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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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법사25.09.09 15:23
- @김재민 그랬군요. 이제 떠오르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도올 김용옥에게서도 들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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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공25.09.09 19:06
- 모택동보다 앞서서 노동당의 수괴가 돤 김일성이 그때까지 국부군에게 쫒겨 다닌
- 홍군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고 부상병도 치료해주었지요, 소련에서 지원 받은 소총까지 2만정을 주고
- 홍군이 다시 국부군과 싸우도록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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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공25.09.09 08:08
- 항미원조라는 말에
- 한국전이 중공군과 미군과의 전쟁이라 생각하고
- 중공군이 한반도를 미제의 제국주의에서 남한의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라는
- 얼빠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되겠습니다.
- 그런 놈은 저거 아버지 볼짝 때린 사람의 똥구녕을 햛는 놈입니다.
- 중공은 어쨌든지 전멸 직전에 간 김일성을 구원해 준 우리의 통일을 막은 집단이고
- 전쟁으로 많은 재산과 인명을 희생이 되었고, 아직도 우리의 북녘의 인민들이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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