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1. 태어남과 아스름한 유년시절

백조히프 2018. 5. 21. 10:52




1. 태어남과 아스름한 유년시절



<들어가기 전에>


한 두 달 후에나 쓸 줄 알았던 자서전 순번이 앞 타자의 일신상 이유로 갑작스레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마음의 준비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좀 황망하기는 하지만 동기들의 압력에 더 이상 버팅거릴 명분도 없고 해 어차피 해야 할 숙제라 여기고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어 한번 시작해 보려 합니다.


<출생과 부친모친의 프로필>


나는 1955년 1월1일(양력) 부산 남부민동에서 관재국(일본인 적산가옥을 국내인에 불하해 주던 관청)에 다니던 부친(김창성)과 경북 영해 지주 딸인 모친(이상순) 사이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에 의하면 전력사정이 안좋던 그 당시에도 신정기간이라 내가 출생한 이래 사흘간이나 전기가 계속 들어왔었다고 전해 준다.


부친은 경남 함안의 빈한한 농군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가장의 역할을 도맡다 상급학교인 진주사범전문대에 진학 실패후 독학으로 못이룬 학업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한다. 동네에서 신동났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특히 국어와 일본어 학습을 좋아해 일본인 담임의 총애를 독차지했다고 항상 자랑스레 어린 시절의 내게 밥상머리에서 회상했다.


반면 모친은 일정시대 경북 동해안의 영해에서 지주의 3째 딸로 태어나 당시 한국민 평균 중상층 이상의 생활수준에서 성장했다는 환경적 토대를 언제나 뿌듯해 했다. 제일 큰 언니(이모)가 부산의 어느 우체국 국장에게 출가해 사는 인연으로 부산에 내려와 남성여고를 졸업한 뒤 지금으로 치면 초등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다 한다.   


해방 후 부친은 짐작컨대 룸펜생활을 거쳐 해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해 일본 항구에서 미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군수송선에 근무했다 한다. 번듯한 외모와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사세보 같은 항구의 일본인 여인들과 바람깨나 좀 피운 것으로 사료되는 사진들이 후일 집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모친의 최근 전언에 의하면 자기와 결혼하기 전 어느 일본여인과의 사이에 자식도 있는 것 같으니 내게는 일본인 이복 누나가 있음을 알아나 놓으라고 뜬금없이 흘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부산 형부집에 와있던 모친은 이웃 중매쟁이의 소개로 부친을 만나 집안보다는 외모에서 풍기는 서글서글한 인간적 매력에 빠져 좀 성급하게 결혼했다고 후회하듯 말한다. 혼인 무렵에는 미처 몰랐던 부친의 숨겨진 태생적 바람둥이 기질이 자신을 평생 괴롭힐 줄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다고 징글징글해 했다. 하지만 독학과 독서로 다진 지식량과 달변가적 언변은 어느 여인도 홀딱 넘어갈 정도로 사줄만 했다고 평가했다.
    
 <아미동 생활과 성도유치원 시절>


부친의 바람기에 질린 모친은 장남인 내게 모든 것을 거는 듯 <김재민 기세우기> 양육 작전을 자신의 30대 초부터 바로 돌입한 것 같았다. 연년생으로 영민, 그 수년 후 막내 딸 내경이 태어났지만 <일편단심 김재민>의 양육 기조는 내가 결혼하고 장기간의 독일유학 후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막무가내식의 모성애 폭탄이 본능적으로 부담이 되어 싫었다. 가족식탁에서 내게만 생선 발라주기, 유치원 매일 따라오기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복수혈전적 애정표현을 자주 거부해 새옷 후딱 더럽히기, 찢어진 옷 오래 입기, 동네 거지소녀에게 퍼주기와 자주 어울리기 등으로 모친의 애를 태우는게 어린 마음에도 통쾌무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느 정도 사물과 사리판단을 하게 된 철든 이후였다.  


<2017년 12월에 찾아가본 아미동 우리 집터 1>


<아미동 우리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 2>


내가 태어난 후 집안에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해 임시직을 전전했을성 싶은 부친도 관재국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게 되자 남부민동 단칸방 살림이 훨씬 펴져 아미동에 작은 적산가옥 하나 마련하게 되며 아미동 시절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은 내가 세상을 인식하게 된 첫시절로써 어떤 기억들은 평생을 가기도 했다.


<2017년 말에도 남아있던 아미동 성도유치원 자리>


다섯 살이 되자 모친은 나를 데리고 성도 유치원이란데에 갔다. 지금에사 알고보니 기독교 미션 유치원이었는데 기도가 일상인 놀이터였다. 3명의 여선생이 있었던 걸로 기억되며 남녀 아동들과 첫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 1년 후 토성교에 입학할 때까지 사회적 적응력을 키워준 꽤 괜찮았던 공간이었다. 총기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이 발휘되어 여선생들과 여자 아동들의 주목도도 갈수록 높아져 여기서의 생활이 아주 흡족했다.


<일산 사는 모친 방에서 발견한 성도유치원 졸업때 사진>


송도와 동래금강원으로 전차 타고 봄가을 소풍 다니던 것과 크리스마스 이브날 목자 분장을 하여 아동극에 참여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떠오른다. 유치원 다녀와서는 동네 아이들과 이런저런 놀이 하며 밥먹으러 오라고 부를 때까지 동네방네 돌아다녔다. 한번씩 광복동에 있는 부친의 근무지인 관재국에 모친이 싼 도시락을 갖고 같이 방문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점심 때 당구장에서 갓 나온 부친의 코에 파란 큐 가루가 묻어 있던 기억도 난다.


<2017년 말에 만난 아미파출소 건물>


이 시절에 나는 4. 19 혁명의 여파가 아미동 큰길에서도 밀어닥쳐 수많은 청년들이 짚차와 쓰리쿼터 트럭에 올라타 아미 파출소까지 구호를 내지르며 시위해 이 조그만 건물의 창문들을  돌팔매질로 박살내는 장면도 목격해 그 역사적인 학생혁명의 현장에 있었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가다 우리동네 윗길에 있었던 아미교에 동네아이들과 놀러가기도 했는데 어느 교실에선가 상급반 아이들의 음악시간 풍금 반주 속 합창 노래가 흘러나와 잠깐 귀를 기울이며 들은 그 곡조와 합창 목소리들이 근 60년이 다 된 지금도 어제처럼 귀청을 울리는 듯 남아있다. 


<2017년 말에 가본 토성동 2-8번지(대한상사 위치)>


성도 유치원을 졸업하고 토성교에 입학하며 ‘맹모 삼천지교’를 수행하려는 모친의 주장에 부친도 승복하여 경남중학교와 토성교를 위쪽과 왼쪽에 둔 ‘토성동 2가 8번지’(이 주소지가 아직 머리에 남아 있을 줄이야..)에 있는 일본식의 긴 ‘나가야’ 다주택 집 한 칸을 구입하여 들어오며 나의 아미동 생활은 끝이 나고 토성동 시절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