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부 맛 좀 알게 된 초등교 시절
<토성동이라는 동네 공간>
토성교에 입학한 후 첫 일주일은 광복동 관재국에 출근하는 부친이 학교 정문 앞까지 동행해 주셨다. 내가 교문을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 떠나는 부친의 뒷모습을 보면 어찌나 아쉽고도 불안한 마음이 들던지.. 그 다음은 모친이 학교가는 길을 동행해 주었지만 웬지 과잉보호에 대한 짜증스러움이 더 많아 이때부터 부친의 권위와 그늘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2017년 12월에 가본 토성동 우리집 근처>
아미동이라는 교육환경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모친의 바람대로 우리 가족은 토성동으로 이주해 왔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제 나름대로 성장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부모님들의 최대 관심은 나에게 더 많이 편향되었다.
토성동에 와보니 우리보다 형제가 많은 이웃들이 수두룩했다. 길 건너에는 27회이자 작고한 조군제의 5형제(형 27회 훈제, 동생 성제 등), 26회 김기성의 4형제(동생 28회 기태, 기홍 등)들과 동네에서 자주 놀거나 한번씩 집안도 방문하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밑쪽에는 27회 전창민, 김헌수 등이 토성교 다른 반들에 같이 다니며 면식을 쌓았다.
그 밖에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수많은 친구들이 토성동이란 공간에 많이도 살았고, 이들과도 학년이 높아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가 멀어지기도 했다.
모친이 부평동이나 국제시장으로 나들이 갈 때 부평동으로 건너가는 개다리가 있었는데 그 길을 지나가다 도살꾼들이 쇠몽둥이로 개머리를 쳐서 개를 잡는 광경도 제법 봤고, 다리 밑에서 움막을 치고 사는 하층민들의 삶도 ‘저리도 사나보다’ 하고 별 생각없이 지나다녔다.
<토성교에서의 저학년 시절>
토성교에 입학하니 유치원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다양한 계층 출신의 학우들을 접하게 되고, 학습분량도 갑자기 많아진 듯해 그 어떤 격랑 속에 빠진 듯 했다. 집에 형이나 누나도 없이 우물안 개구리처럼 ‘니가 최고다’ 하는 모친의 맹목적인 떠받듦 속에 살던 나로서는 어떻게 빨리 자신의 포지션을 파악하고 아이들 속 학습적 계층질서에 손쉽게 적응하는 것은 한참 무리였다.
<2017년 12월에 가본 토성교 전경 1>
자연히 수업에 대한 집중도도 낮아지고, 낯가리는 빈도도 높아져 학교생활에 흥미가 줄었다. 80여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그저 그렇고 그런 중위권 학생으로 취급받았다. 1학년 여자담임은 의사부인이나 잘사는 집 학부모들에 둘러싸여 그 부류에 끼어들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이 노골적으로 개털 취급했다. 우리 모친도 학부형회에 나름 열심히 참석했지만 선생 구워삶기 배팅빨이 센 아줌씨들에게는 한참 역부족인 듯 했다.
2학년 남자담임은 뇌물은 받더라도 학생은 크게 차별하지 않는 꽤 양심적인 양반을 만났던 것 같은데, 내가 공부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니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해 그저 구우일모처럼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시험성적은 점점 상위권에서 멀어져 급기야 60~79점으로 평가된 시험지들은 집에 감추게 되었고, 어느 날 학부형회에 다녀온 모친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문초하자 바로 실토하였다. 그날 모친의 고자질을 접한 부친으로부터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디지게 맞았다. 어린 맘에도 드럽게 수치스러웠다.
<토성교 전경 2>
이 사건 이후 모친은 수소문하여 잘 가르친다는 과외그룹에 나를 끌고 갔다. 열여명이 수업받던 어느 개인집에서 과외선생은 칠판에 ‘5+8=?’이라 쓴 계산 문제를 풀어보라 했는데 낯선 분위기에 주눅 든 내가 ‘58’이라 썼더니 아이들이 ‘와!’ 하며 한심해 하는 반응 속에 선생이란 작자도 ‘이 친구 기초가 너무 없어 못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 사건이 그후 내 인생의 반전 계기가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유년기 초엽의 반전을 가져다 준 선생과의 조우>
어디선가 연세대 정외과 졸업 후 취직이 안되어 잠깐 백수로 산다는 어느 청년이 학생들 몇 명 모아 과외선생업을 해보려 한다는 소식이 모친 귀에 포착되어 찾아가니 2학년 때까지 저그 모친들의 치마바람으로 1, 2등을 하고 있다는 친구들도 와 있었다.
이 아재의 수업방식은 20분 씩 시간을 정해 놓고 참고서를 읽게 한 뒤 그 내용들을 교리문답식으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텍스트 해독력, 암기집중력, 예상질문 파악력이 관건인 방식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연상 암기력과 질문 예측력이 어딘가에 숨어있다 막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군계일학 같은 발군의 인상을 그 선생에게 심어주었고, 1~2 등 한다는 친구들의 허상이 드러나 그딴걸 대답 못해 손바닥 맞는 모습이 참 한심하였다. 거기다 자의식이 충분히 있을 나이임에도 쪽팔림을 무릅쓰며 매를 피해 보겠다고 손바닥을 뺐다 다시 내다하며 매를 더 버는 꼬락서니 하고라니..
<토성교 저학년 시절의 우리 3남매>
난 드디어 유치원 시절의 자존감을 회복했고, 과외선생도 “5+8을 58이라 하던 친구가 자기에게 교습받고 성적이 바로 상위권으로 올라갔다!”라는 자가마케팅 홍보로 과외희망생이 급격히 늘자 집도 한 채 구입해 과외선생을 아예 주업으로 삼았다. 내게는 총애하는 수제자 대우를 확실하게 해주면서 주말에는 영화관과 분식 레스토랑에 따로 데리고 가 학교선생들과도 맺지 못한 공고한 사적관계를 계속 쌓았다.
요즘으로 치면 이 선생을 통해 선행학습과 자신의 대학 및 군생활, 그리고 한국사회의 후진성 등 세상에 대한 흥미로운 경험담을 전해듣게 되자 학교수업은 ‘아이들 장난’처럼 심심해서 못들을 정도였다. 이렇게 초등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륙하기 시작했던 내 학습력은 그 후 중학교를 거쳐 고교 초반 무렵까지 그 성장세가 유지되었다.
<부친과의 이 무렵 추억>
이 시절 영화도 한참 좋아했던 부친은 주말마다 모친과 나만 동행해 영화관 순례를 하였다. 주로 외화를 좋아했기에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다니면서, 영화 상영에 따라 대영(부영), 부산극장도 자주 들렸다. <애꾸눈 잭>, <대장 부리바>, <벤허>, <십계>, <유황도>, <콰이강의 다리> 등등이 6~8세의 꼬마가 봤던 영화들이었다. 그 때 이후 영화관람은 오랜 기간 내 인생에서 빼 놓을 없는 순방코스가 되었다.
4학년에 접어들 무렵인가 부친이 야구글럽 2개와 연식 공을 사가지고 와서 공받기 놀이를 집 앞 거리에서 틈만 나면 둘이서 같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 자랑 동네사람들에게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튼튼한 어깨와 반응 빠른 운동신경도 발달하여 동네친구들과의 찐뽕게임 등에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고, 후일 중학교와 고교 입학 체력장 시험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부친은 스포츠 관람도 좋아해 충무초등, 토성초등 운동장이나 구덕운동장에서 자주 벌어졌던 복싱, 레슬링, 야구게임 관람에 대부분 나만 동행했다. 이 시절만 생각하면 난 ‘아, 그때 우리 파피가 날 끔찍이도 좋아했제..’ 하는 추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문디 영감.. 말년에 바람기만 쪼끔 더 잡아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으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제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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