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아온 역정

9. 인문예술 독서에 빠졌던 고2 시절

백조히프 2018. 6. 25. 23:22


9. 인문예술 독서에 빠졌던 고2 시절

 

 

<1971년의 고2 시절>

 

호연지기를 키우던 고1 시절을 보내고 대입준비에 서서히 시동을 거는 고2 시절을 맞게 되었다. S대 합격자 수를 늘리기 위해 문과 2, 이과 6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S대 들어가 볼거라고 적성하고는 별 관계없이 이과반을 택해 2-3반에 배정되었다.

 

가보니 古文 담당인 영국신사 타입의 안평제 선생이 담임이었다. 1-4반 친구들이 일부 같이 옮겨갔지만 2/3가 새로 본 얼굴들이었다. 이과반이다 보니 수학-II를 하게 되었지만 S대 입시과목들이 이과계에도 국영수 외에 사회과목들과 제2외국어가 포함되어 있어 문과반 쪽과 뭐 그리 크게 차별화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의 덕형관 전경>

 

학기 초의 좀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책이나 많이 읽자 해서 4월 중순까지는 수업 마치고 도서관 밑에 있는 식당에서 우동이나 도시락밥을 뜨거운 국국물에 말아먹고는 도서관에 올라가서 주로 세계문학전집을 문닫는 저녁 9시까지 읽다가 귀가했다.

 

1학년 때 구거흥 선생시간에 배운 작가들인 헤르만 헤세(나르치스 운트 골드문트(知와 사랑), 데미안, 황야의 늑대), 모파상(진주목걸이, 비계덩어리), 발작(인간극장), 앙드레 지드(좁은 문), 플로베르(보바리 부인, 여자의 일생), 에밀 졸라(나나, 목로주점), 레이몽 라디게(육체의 악마), 스탕달(적과 흑), 헤밍웨이(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토마스 하디(테스), 찰스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의 작품들을 다이제스트로 줄여져 있는 요약본 속에 거의 두달 여에 걸쳐 꾸준히 읽었다.

 

이 때가 나의 고교 시절에서 가장 뿌듯했던 시기였다. 정규수업 시간에 뭔가 주입식의 여러 과목들을 배웠겠지만, 국어와 사회, 음악과 체육 이외의 다른 과목들은 시험공부할 때 제대로 살펴보리라 생각하고 집중하지 않은 채 잡념 속에 슬렁슬렁 보내었다. 하지만 이런 수업을 마친 뒤 도서관에서 보내는 3시간 여 자유 독서타임이야말로 나의 사고력 성장에 자양분을 직접 준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문학 작품들을 찾아 읽는 중에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 책도 얻어 걸리게 되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의 책이었던 것 같았는데, 표상(表上)이란 용어의 의미가 시원스레 설명되지 않아 좀 갑갑했다 (요즘에 와서 찾아보니 ‘외면적 이미지라는 뜻인데 일본식으로 중역하다 보니 그리 소개되었다).

 

하지만 전체 맥락적 내용들이 꽤 도발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바로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그의 삐딱이 같은 염세적 세계관은 뭔가 젠체하고 싶어하던 그 시절의 내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아무튼 이런 철학도서에까지 자발적으로 빠지게 되자 뭔가 명문고에 부합하는 생각하는 힘을 갖춘 고삐리가 된 것 같아 약간 나르시시즘에 빠질 정도였다.

 

<기억나는 이 시절의 은사와 학우>

 

2 시절에 좋은 쪽으로 기억나는 은사는 고문 가르쳤던 담임 안평제, 국어 구거흥, 국사 이원균, 화학 이준식, 수학 정진헌 선생이었다. 담임 안선생의 과목은 뭐 그리 흥미있는 쪽이 아니었지만 대학교수같은 내공 많은 분위기에 망나니 같았던 몇몇 선생들과는 달리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려는 자세가 참 맘에 들었다.

 

그 점에서는 화학 이준식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실력을 겸비한 영국신사같은 분위기를 다른 학우들도 많이 좋아했었다. 구거흥 선생도 내게는 여전히 멋진 인상을 남겨주었지만, 그래도 이 시절의 참선생이라고 꼽을만한 양반은 이원균 선생과 나중에 다른 곳에서 만난 장여태 선생이었다.

 

이선생과 장선생은 정말 실력, 수업몰입성, 인격의 3박자를 최고수준으로 갖춘 고교교사의 전범이라 할 수 있었다. 물리 쪽에 내가 그리도 약했음에도 장선생에게 배울 때는 뭐 쫌 핵심원리를 알게 된 것 같은 뿌듯함이 항상 들었다.

 

그리고 이선생의 국사시간은 다른 친구들처럼 마치는 시간이 다가오는게 아까울 정도로 매수업이 그저 신천지였다. 이 양반을 통해 중국인간들이 고구려를 하구려라 부른다는 것과 이순신 자살설같은 것을 들은 기억이 지금도 그날 수업분위기와 함께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야말로 최고였다.

 

수학을 가르친 정진헌 선생은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동기들에게 워낙 안좋게 각인지워진 같은 수학담당의 김종빈 선생 때문에 덕 좀 본 부분도 있다 하겠다. 당시에도 대머리에 이웃집 아재같은, 막 막걸리 한잔 들이키고 온 듯한 불콰한 안색에 사람좋은 눈매는 후카시 든 듯한 눈매의 다른 선생들과는 소탈한 면에서의 차별화가 많이 되었다.

 

일단 자주 쓰는 용어들인 단젠토’, ‘헤리고푸타등의 일본식 발음습관과 함께 한 테마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뿌듯한 표정으로 , 안그러심미까?’하고 손동작 제스추어까지 쓰며 마무리짓는 포즈는 거의 전매특허처럼 기억되고 있다. 거기다 수업 조금하다 툭하면 튀어나오는 일본프로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여러 가쉽성 얘기들을 전해줄 때면 그 시간 수업은 이미 끝난거나 다름 없었다.

 

우리 동기들이 자율적 선행학습이나 학원수업 등을 통해 수업내용은 미리 터득했을 것이라 여겼는지 그냥 야구얘기로 거침없이 가버리는 것이었다. , 일탈의 대가이시며, 야구 노가리 신 디오니소스시여..

 

2학년 시절에 생각나는 학우들로는 내 주위에서는 배효택, 오세현, 유영호, 류용호, 김안석 등이었고, 뒤쪽에는 김세곤, 곽태홍, 배재홍, 김선영 등이 떠오른다. 지금 창원쪽에서 병원원장한다는 배효택이는 내 바로 옆에 앉았는데 모타리는 작지만 곱상한 외모 속에 학업 애살과 함께 운동신경까지 다 갖춘 친구였다, 항상 내게 관대함을 보여준 괜찮았던 아그로만 기억된다.

 

얼마 전 췌장암인가로 타계한 오세현이도 그 당시 배효택이만큼이나 친했던 친구였다. 중간에 무슨 커뮤니케이션에서의 오해로 좀 틈새가 벌어지긴 했는데 그것을 서로 못푼 채 고교시절 이후로는 다시 만나본 적 없이 비보를 전해 들으니 그저 친했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만 파고든다.

 

지금 대선그룹 부회장과 부산동기회 회장 하며 아직도 현역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유영호는 그 당시에도 검은 뿔테안경 쓰고 남에게 폐 안끼치려는 조용한 성품의 친구로서 내 인상에 남고 있다. S대 원자력공학과로 간 류용호는 성격이 좀 가시나 같은 데가 있었지만 우리 2-3반에서 수학의 귀재로 명성을 떨쳤던 김경국이, 박흥묵이와 함께 3대 이과계 수재로 그 학업내공을 자랑했다.

 

참 이 장면에서 1-4반에서 소개를 잊어버린 박혜규가 번뜩 생각났다. 이 친구도 류용호와 비슷한 캐릭터의 친구로 기억되는데, 1학년 때 내 옆에 있다 한번씩 발동하는 악동같은 내 성질머리 받아준다고 고생깨나 한 친구다. 서대신동 우리집 근처에 살며 경중을 같이 다녔지만, 고교 들어와서 공부머리가 확 깨었는지 류일성이급으로 성장하며 S대 경영학과에 再修없이 들어갈 정도가 되어 나와는 고2 이후로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수십년이 흘러 90년대 후반 울산대에서 만났는데 무척이나 내게 반가움을 표했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안있어 인후암으로 타계했다.

 

그런데 이 때 2-3반 반장을 누가 했는지 암만 생각해도 블랙 아웃에 빠진 듯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장기재였던가, 유봉이었던가 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다른 제3의 동기였는지도.. 김안석이는 몸집은 그리 커지 않았지만 중2 때 같은 반했던 한용칠이 비슷한 캐릭터로 조용하면서도 결기있는 협객같은 분위기를 많이 풍겨 편하게는 지내지 못한 채 그저 지켜만 본 신비주의적 인물이었다. 뒤쪽의 덩치들하고는 자주 트고 지내는 듯도 하고, 수업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듯 학업초월자적 자세로 일관했다.

 

2학년 때부터는 문과이과로 나눠지는 바람에 같은 반을 안했지만 말더듬이 최태룡이는 반이 갈라진 이후에도 자주 만났던 문과계 친구다. 물론 문과에도 김진회, 박상국, 장기남이를 비롯해 중학시절부터 알던 친구들이 꽤 있었지만, 대입준비에 서로 바쁘거나 생활 관심사들이 달라지다 보니 최태룡이처럼은 자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이 친구의 사람 사귀기 좋아하는 친화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게 뭐 그리 관심이 많았는지 내가 지를 찾는 회수보다 지가 나를 찾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여튼 우리집에도 자주 놀러왔고, 학교에서도 자주 만났다. 3수 시절과 대학 들어가서도 내가 있는 하숙집들을 잘도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 진주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로 지내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있는 나를 찾아와 삼산동 맥주집에서 한잔 하며 담소했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저 뒷줄에 앉아있던 김세곤, 곽태홍, 배재홍, 김선영이는 제주도 여행에서부터 수업시간들에서의 추억, 그리고 2학년 말의 책걸이 시즌 때의 장기자랑을 통해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다. 김선영이는 외대 들어가서 또 같이 만나게 되었고, 지금도 그 인연 속에 간간이 얼굴보기를 지속하고 있다.

 

<71년에 발생한 국내외 주요 사건>

 

1. 박통의 3선 성공

 

‘714월 박통은 40대 기수론을 선점한 김영삼을 신민당 당권대회에서 역전 승리하여 대선에 나선 김대중을 94만표 차이로 이겨 3선에 겉으로는 가쁜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김대중의 고려연방제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4대국 보장론‘, ’남북한 서신교류‘, ’향토예비군 제도 폐지같은 공약을 전형적인 빨갱이 찬양 정책이라며 맹공을 퍼붓던 여권은 온갖 관권동원과 당시 국가예산의 10%선에 달하는 600~700억원을 퍼부었지만 수도권에서는 4:6으로 패배했다. 그럼에도 필사적인 영호남 지역주의 구도를 강화해 경남북에서의 몰표에 힘입어 간신히 승리했다.


<1971년 장충단 공원 유세시의 박통 부부>

 

일견 영남에서 박통이 거의 90% 선의 지지를 받았지만 호남에서는 김대중이 75%선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자, 그 다음 날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온 체육담당 이길상 선생이 저쪽 것들은 저그 후보가 나와도 우리처럼 똘똘 뭉치지를 못하네..’ 하며 비웃던 소견 피력이 지금도 떠오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라는 글을 보면 박통이 이 선거결과를 보고 돈을 그리 물처럼 쓰고도 표차가 이것 밖에 안돼?’ 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다. 사실 영남지역이 아니었으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 나오자 박통은 이런 선거 시스템은 더 이상 안돼!’ 하며 다음 해에 등장하는 유신통치 시스템에서의 체육관 선거를 모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2. 실미도 사건

 

이 해 823일 김신조 일당 침투사건에 대한 보복전을 위해 인천 실미도에 특수 훈련장을 세워놓고 양성하던 북파 침투병력들이 혹독한 훈련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뒤 육지에 도착해 시내버스를 탈취하며 대방동까지 진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군경저지선에 걸리자 대부분 수류탄으로 당시 유한양행 건물이 있던 사거리에서 자폭했고, 일부(4)는 살아남았지만 그 다음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모두 총살되었다.



<실미도 사건 개요>

 

이 사건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자 정부는 처음 북한무장공비들이라 했다가 하루만에 군특수범이라 말을 바꾸었지만 당시 국회의원 이세규가 공군소속 북파공작원들이라 폭로하자 정래혁 국방장관은 그제서야 이 사실을 마지 못해 시인했다 (폭로한 이세규는 바로 중정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한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들은 혹독한 처우에 대해 폭동을 일으켰고, 경비병들이 대부분 이들에 의해 사살되었지만 극히 일부가 화장실 변기물 속에 몸을 숨겨 살았다는 보도까지는 읽은 것으로 회상된다. 하지만 이 부대의 실체와 운영 목적, 그리고 생존자에 대한 처리여부는 그후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영화-실미도 포스터>

 

이렇게 오리무중의 보도관제 속에 더 이상 추가보도는 나오지 않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다가 19876월항쟁 이후 금기사건에서 벗어나 소설 등으로 다시 불씨를 짚히기 시작했다. 이어 2003년 강우석 감독과 설영구, 정재영, 안성기 등이 나온 실미도라는 영화화를 통해 더 깊은 내막이 (픽션도 꽤 가미되었지만) 좀 더 소상하게 밝혀졌다.


3. 중국에서 린뱌오(임표) 쿠데타 실패

 

1113일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으로 마오쩌퉁의 2인자로 부상한 린뱌오(林彪)가 마오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의 실패 후 부인 예이쥔(葉君)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려다 외몽고 상공에서 중국공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거나, 다른 한편 마오 충성파인 승무원들과 린뱌오 경호원 간의 기내 총격전으로 기체가 추락했다는 두가지 속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화혁명시의 마오(중앙)-린뱌오(우)-주언라이(좌) 3인>

 

문혁 때 마오의 심중을 꿰뚫어 정적 제거의 악역을 맡아 큰 공을 세워 2인자의 위치까지 부상했으나, 이때부터 마오의 ‘2인자 견제에 걸려 갈등을 겪으며 실각할 위기에 몰리자 마오를 제거하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 실행하기 직전 부모와 평소 사이가 안좋았던 큰 딸의 제보로 실패하고 급히 항공기로 탈주하다 추락사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의 국내언론들에서는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2인자의 오만함에 젖은 린뱌오가 1인자 제끼기 시도를 하다 실패 후 도주하다 허망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간략하게 보도되었을 뿐 마오-린뱌오-주언라이(主恩來) 3인 간의 인간적 애증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조망은 일절 없었다.



  <추락한 린뱌오 부부의 탈출機 잔해> 

 

최근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시리즈 책에 보면, 린뱌오가 전쟁천재라는 별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로써 천성적으로 다른 2인자 후보들보다 눈에 띄게 나서려 하지 않았기에 마오의 눈에 들었다 한다. 여기에 보답하려 문혁 때 마오편을 열심히 들었는데 그러다보니 2인자로까지 부상했고, 그때부터 믿었던 마오로부터 ‘2인자 견제가 들어오자 벌거벗은 정치권력판의 치사함에 환멸을 느껴 마오와 마오 친위 시스템의 파멸을 꾀했다는 설로 이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4.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71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서울 소재 대연각 호텔 21충 건물에서 커피숍의 프로판 가스 폭발사고로 전 건물이 순식간에 화염에 싸여 166명이 사망하는 사상최악의 호텔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불길은 시작되자말자 계단을 막아버려 투숙객들이 아래로 내려오질 못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건물 전체가 1시간 반 만에 불길에 싸여 버렸다.



<불길에 휩싸인 대연각 호텔>

 

불길이 이렇게 빨리 번진 이유는 빌딩 내장재가 온통 가연성 물질로 가득했고, 인테리어는 목재로 많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층에 갇힌 투숙객들은 비상계단도 부실했고, 스프링쿨러도 설치되지 않았기에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헬리콥터 구조를 기다리거나, 일부는 급한 김에 자기 방에서 메트리스를 껴안거나 침대시트를 낙하산 마냥 머리에 펼치고 내려오다 대부분 추락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망자는 유독가스에 질식해서 발생하였다.


<다급하게 낙하 추락하는 투숙객들>

 

나도 이날 낮부터 화재현장에서의 구조실황 중계를 부산집에서 시청했는데 가히 목불인견의 상황이었다. 대부분은 다 사망했으리라 예견되는 속에서 뛰어내리는 투숙객이 속출했고, 헬리콥터에서 내려준 줄을 잡고 가던 어느 여성은 중간에 손을 놓아버려 떨어지는 안타까운 장면도 직접 목도했다. 소방사다리가 미치지 않는 고층건물에 로프를 연결하려 궁사협회 동호인들이 동원되어 로프를 묶은 화살을 쏘아올리려는 시도들도 지켜 보았다. 당연히 로프 무게를 이기지 못해 궁사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옥상에 착륙 헬리포트가 없어 선회만 하는 헬기>

 

사망자 중에는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를 즐기기 위해 묵었던 젊은 청춘남녀 투숙객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들 중에는 그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의 아들도 세간에서 떠돌던 ‘7공자 그룹의 일원으로 파티모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나중에 대만대사관의 영사관으로 알려진 한 40대 중년남성은 창가에서 물수건을 입에 대고 턱밑까지 다가온 화마의 위협에도 끝까지 침착하게 구원을 기다리다 구출되는 중계장면이 그 와중에서 몇 안되는 인간승리같은 장면이었다.

 

<추억의 제주도 수학여행>

 

2 시절 초기에 정신적 호연지기를 키운답시고 혼자서 겉멋들 듯 독서열에 빠지긴 했지만, 뿌린만큼 거두는 성적상승에 턱없이 부족한 핵심과목 학습량으로 학급석차는 확연히 중위권으로 밀려 1학년 때처럼 한번씩 10위권까지 어쩌다 가던 저력도 완전히 고갈된 듯 싶었다.

 

, 이제 S대 가고 싶거든 문사철 독서욕을 확 줄이거나 포기해야 하는데 그 때를 언제 쯤 할까 하고 벼르는 중에 배타고 제주도 가는 수학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을 갔다 오면 독서 쪽은 좀 멀리 하고 학습량 확보에 전념하자고 다짐했다.

 

4월 말인가 저녁 5시 무렵 여객선 터미널에서 승선한 것으로 기억나는데 하루밤을 꼬박 새운 채 새벽까지 아리랑호로 명명된 세월호같은 배를 타고 장장 14시간 여에 걸쳐 제주항에 도착한 것 같다. 배 맨 밑바닥에 있는 3등석에서 지루한 시간을 섯다판 구경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일탈적 객기를 내뿜는 친구들을 일면 이해심과 호기심 속에 쳐다보며 자는 둥 마는 둥 보내었다.




<만장굴 입구와 솟아 오른 용암 괴석>

 

아침 8시 경인가 말로만 듣던 한라산의 픙광이 펼쳐지며 우리를 점점 가깝게 맞아주는 제주항이 무슨 이국 땅을 보는 것처럼 약간 낯설면서도 우리 글 간판들 속에서 다시 정겹게 느껴졌다. 버스로 제주 시내에 들어가 다운타운 격인 관목정자리에서 각 반별 단체 기념사진들을 찍은 뒤 숙박여관으로 들어가 그룹별로 방 배정 받고 여장을 풀었다. 우리 방에는 7~8명이 같이 썼던 것 같고, 얼마 전에 지병으로 타계한 오세현이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은 생각나는 몇 친구들이 생각난다.


<주상절리의 절경>


23일 동안 만장굴, 천일연 폭포, 주상절리, 정방 폭포 등 알려진 방문지들을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5.16 도로 등 여러 길로 버스에 탑승해 부지런히 다녔다.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용암동굴인 만장굴 내 종유석들이 머리 속에 떠오르며 내가 가져간 강력한 랜턴 덕에 일행들 맨 앞에서 불 비추며 동굴 탐사를 했던 기억이 다시 반추된다 

 

웅장하지 않은 채 아담한 호수 속에 놓여 있는 것 같던 천일연 폭포도 생각이 난다. 특히 여기서 예쁘장한 누나뻘인 여대생들 3명인가가 같이 구경하며 거닐다 우리 일행과 떨어진 나를 발견하고 , 우리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하고 서울말로 나긋하게 부탁하는 게 아닌가. 이게 웬떡이냐 하고 최선을 다해 찍어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서울에서 왔고, ‘학생은?’ 해서 나는 부산에 있는 경남고 학생으로 수학여행 중이라고 답했다.


<천일영 폭포 후경>

 

그러자 , 경남고!’ 하며 우리는 동덕여대에서 왔는데..’ 하고 말을 계속 붙이려 했지만, 웬지 숙맥처럼 그냥 목례만 하고 자리를 뜬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쉬웠다. 아마도 다른 한편 워낙 학교에서 ‘S대가 아니면 모두 다 대학도 아니다라는 세뇌교육을 너무 자주 받아왔기에 무의식 중에 외모는 괜찮다 해도 2, 3류대 여대생들과는 내가 어울릴 대상이 아니다라는 같잖은 엘리트 의식이 튀어 나왔을 수도 있었겠다.  

 

이 수학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서귀포 숙소에서든가 성욱조, 조윤건, 허한이가 주축이 된 워커스 밴드의 한밤중 야간 공연이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이 친구들이 악기를 아리랑호 출발 하루 전 배안에 미리 숨겨놨다고 했다. 하여튼 같이 동행했던 친구들은 그날 밤 근처 동네주민들이 다 모여 무슨 학생밴드가 이런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연주 볼거리를 시골 한구석에서 내보여주나 하고 신기해 하며 함께 구경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벤처스 악단-비너스>

퍼스트 조윤건이가 당시 인기절정 벤처스 악단의 ‘Venus’ 곡을 거의 프로처럼 연주하고, 성욱조가 드러머로 활약하며 좌중의 얼을 뺐던 그 밤을 말이다. 당당당당 땅당당당 당당당당 땅따르땅땅 호잇~~’하는 전주 속에 나오는 상하이 트위스트’(?, 설운도 곡 아님) 비슷했던 곡 연주도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참 대단했다. 동네주민들도 야밤중 이 무슨 고성방가냐고 신고하기는커녕 호기심 많은 관객으로 몰려와 관대하게 구경해 주던 그날 연주타임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여행 이벤트로 각인되었다.


<벤처스 악단-Wipe Out>


또 하나 기억나는 사건은 그 다음날 밤이던가 아리랑호를 같이 타고온 강원도 삼척의 태백공고 학생들과 우리학교 폼잡는 껄렁이들이 밤거리에서 한판 붙었다는 소식이었다. 최근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김황열군이 태백공고생들에게 길가에서 다구리(집단폭행)를 당해 머리가 깨진 채 병원에 후송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의리의 돌쇠차승일이가 어디선가 술이 한 잔 된 채 우리 방에 찾아와 낫같은 것을 손에 들고는 태백공고 놈들 만나면 꼭 이렇게 복수해 줘야 한다며 벽에다 낫으로 '분노의 두 번 연타'를 찍어대던 동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방 폭포 전경>


마지막 날은 바다로 폭포물이 바로 떨어지는 정방폭포를 찾아갔다. 참 이런 희귀한 곳이 있다니 하고 감탄하며 주변 경관을 한참 둘러보다 친구들과 사진도 좀 찍은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은 태백공고생들과의 사건도 있고 해서 외박보다는 숙소에 얌전히 머물자는 인솔단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 같다. 그 다음 날 오전은 제주 시장에서 다른 친구들처럼 귤 한 박스를 기념으로 구입하며 시장을 돌아다니는 구경 속에 망중한 같은 시간을 보내었다.

 

드디어 배타고 떠나야 할 시간이 왔는데 태풍이 온다해서 출항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이 부분은 난 기억이 나지 않는 데 얼마 전에 만난 문원장이 그랬다고 확인해 주었다). 할 수 없이 하루를 억지춘향식으로 더 묵고 떠났지 싶다. 갈 때와 같은 코스를 같은 시간 속에 하루밤 또 왁자지끌하게 항해한 뒤 부산항에 아침에 닿았다.

 

아무튼 이 제주여행은 초등5 시절의 경주여행이나 중2 시절의 서울여행과는 달리 머리 굵어지고 가본 첫 숙박여행이라 여러모로 내겐 뜻깊었다. 사건사고도 꽤 있었고, 말로만 듣던 제주도의 이국적 풍취가 상당히 인상에 남았다. 이제 돌아가면 이 여행을 내 고교시절의 새로운 학업패턴 수립을 위한 변곡적 계기로 삼으려 했기에 과거와의 무슨 이별여행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제주도 여행에서의 결심 실현 시도>

 

나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뒤 경남학원과 청산학원 저녁 단과반들에 의도적으로 많이 등록해 나름 제주도 여행시의 내면적 결심을 실현하려 애썼다. 하지만 세상사 어디 마음대로 쉽게 되는 게 그리 많던가.

 

베스트셀러이던 송성문 선생의 정통종합영어와 홍성대 선생의 수학의 정석 II’도 수강신청해서 영어 쪽은 꽤 열심히 해 오늘날 영어독해 쪽의 기반은 쌓았지만, 수학에서는 계속 좌절감만 맛봤다. 여러 문제 유형들을 실력 좋다는 학원선생들이 화려하게 풀어가는 것을 보면 고개를 끄떡이며 시험에 나오면 바로 풀 것 같았지만, 조금만 형태를 응용하여 바꿔버리면 많은 경우 속수무책이었다.

 

자기 힘으로 끙끙거려가며 풀어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생각하는 문제해결능력이 늘어 수학도사로 등극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정석-II’ 책만 잡으면 1~2분 생각하는 체 하다 바로 해답 페이지로 달려가니 참 요즘 아그들 게임할 때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참을성 없는 것과 거의 같았다.

 

수학성적이 잘 안나오니 덩달아서 암기보다 생각하는 학습능력이 중요한 물리, 화학의 과학쪽도 같이 헤매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이과반에서의 핵심과목들에서 이렇게 죽을 쑤니 S대 갈 확률은 점점 아득해 갔다. 그럼에도 S대 진학욕심은 포기하지 않았으니 이 이상과 현실의 메울 수 없는 갭은 나의 초중시절 공부머리를 회복해 보자는 여러 시도의 무망 속에 더 한층 강화되었다.

 

그래도 똥고집은 있어서 성적 안오른다고 술마시고 담배 피우며 홍등가 찾아가는 등 일탈의 길을 기웃거리는 것은 자존심상 싫었다. 나약한 패배주의적 자기기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술은 우리 부친이 집에서 자기식의 호연지기를 보이면서 자주 대작하자 해서 맥주 정도는 주량이 꽤 늘었지만, 담배는 마리화나처럼 여겨져 고교졸업시까지 결코 손대지 않았다.

 

섹스실전 경험도 속마음이야 꿀떡 같았지만 에로스의 상상세계에서 혼자 노니는 것으로 맘을 억제하고, 고교졸업 후 대학가서나 기회 된다면 경험해 보기로 내심 정했다. 완월동 같은 데서 치기 속에 첫 딱까리 떼는 일은 내게서는 결코 없을 것이라 다짐하면서.. 어쨌든 일탈쪽 문은 단단히 잠궜는데도 성적은 또 오르지 않는 기이한 내면적 갈등의 교착 속에서 내 고2 시절은 그렇게 끄떡끄떡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