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와이프 박애숙이 제 고교동문 기관지인 '용마'지에 소생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묘사해 글 값 받아먹은 글이 있기에 여기 소개함다. 뭐 저를 좀 씹어도 글 값 벌어오면 이제는 용서해 줘야 하는 따분한 처지가 됐네요.
평생 ‘금의야행‘하는 김재민 곁에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27회 김재민의 오랜 친구이자 와이프이기도 한 박애숙이라 합니다. 본 용마지의 편집장을 맡고 계신 강성보님의 강권으로 불려나와 이 시리즈의 글 정신에 따라 그간 35년간 찌지고뽂고 한 세월을 같이 보낸 남편에 대해 제가 살아오며 느낀 품평 글 한번 소개해 볼까 하네요.
먼저 저는 학창시절 입시용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은 채 소설책 읽기를 죽어라 좋아했습니다. 특히 여고시절부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좋아해서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이제스트가 아닌 완전본으로 다 읽은 전력이 있습니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편이 너무도 인상깊어 40년도 더 넘은 지금까지도 그 주요 대목들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거기에 비하면 톨스토이 소설들은 ‘안나 카레리나’를 제외하면 ‘전쟁과 평화’나 ‘부활’ 같은 것이 스케일이 큰 대하소설이긴 하지만 인간의 다양한 내면심리를 도스토옙스키만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는 못한 듯하여 그리 큰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소설 쪽에서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知와 사랑)에서 수다스러운 장광설 속에 인간심리를 깊숙하게 파헤쳐 간 도스토옙스키와는 또 다른 독일적인 정갈한 인물상 창조에 색다른 감명을 받았네요. 이런 소설들에서 나오는 독일적 환경에 대해 자주 접하다 보니 대학시절부터는 독일이란 나라에 한번 가서 생활해 보고 싶은 소망이 일었습니다.
이 소망을 한번 더 증폭시킨 것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소설에서 그녀가 거주했던 뮌헨의 슈바빙 시절을 묘사한 부분을 접하고부터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너무 독일에 가고 싶어 혼자 독일어 학원에도 다녔고, 등산 좋아하시는 아빠가 등산길에 같이 동행해주면 독일유학건도 한번 고려해 주겠다는 말에 혹해 제법 오랜 기간 등산동무도 해드렸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약속은 뻥이었습니다. 제가 대학 졸업하자 여자 몸으로 단신 유학은 허락할 수 없다며 밑에 있는 3명의 여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좋은 배우자 만나 얼른 결혼하는데 전념하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빠의 식언에 단식 항거까지도 하며 제 의지를 전하려 했으나 큰 효험이 없은 채 엄마가 맘에 들어하는 오빠의 친구 중 한 재력있는 부호 아들에게 시집가라는 압력에 하루하루가 싫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독일 유학생이었던 김재민이 제 앞에 구원의 운명처럼 나타났습니다. 키가 좀 작다는 것 외에는 학벌이나 외모가 그리 떨어져 보이지 않아 첫 인상이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 역시 내가 싫지 않았던지 두 세 번 만나자 ‘박양, 우리 같이 독일 갑시다’ 하고 그냥 쑥 프로포즈 해오는 것 아닙니까. 그 때 좀 많이 당황했지만 어차피 여기서 재고말고 할 시간은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감지했기에 저도 운에 맡기고 한번 부부의 연을 맺어보자는 맘이 생겼습니다. 이 인간 덕에 꿈에도 그리던 독일도 한번 가보자 하는 꿍꿍이도 있었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만난지 한달여 만에 결혼한 뒤 그는 다시 독일로 먼저 들어가고 한 6개월 후 제가 뒤따라 들어가 우리의 애환 많았던 독일생활에 합류했습니다. 12년 반에 걸친 독일생활 후 아들도 2명 얻으며 독일대학에서 ‘예술사’ 공부도 잠깐 해봤지만 육아에 전념하며 ‘김재민 박사 만들기’에 더 부산했던 세월을 보냈네요.
<귀국전 함부르크에서 두 아들과(1995)>
김재민은 글쓰기와 말하기 차이가 참 크게 나는 인간이었습니다. 억센 경상도 억양에 강한 남자로 보이려는 듯 비속어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무식체 말투가 초기에는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이제는 하도 들어 그러려니 하고 얼추 면역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질 한국어를 마구 날리는 인간이 글로써 자기 생각을 전할 때는 이 인간이 그 인간인가 할 정도로 지적이고 논리정연한 문장을 적지 않게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참 뭐 이런 인간이 있나, 개차반 어투를 가진 인간에게 뭐할라고 하늘은 이런 고급글귀 작성 능력을 줬을고 하고 희안하게 여긴 적도 많았네요.
거기다 반골기질은 왜 그리 강한지 천신만고 끝에 독일 경영학 박사쯩 하나를 건져와서는 현대경제연구원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는데 원장이 베푸는 중화반점 환영 식사자리에서 임원급 박사들과 신참 박사들이 요리를 먹고 마무리 면을 시키는 자리였는가 봅니다.
원장이 ‘난 짜장!’ 하자 부원장을 비롯한 고위급 박사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나도 짜장, 짜장, 짜장..’ 하는 게 너무 딸랑이 짓들 같아 보여 자기는 울뚝 밸로 ‘난 기스면!’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 젊은 박사들은 다시 ‘짜장, 짜장, 짜장..’의 연창을 했다는 것이고요. 사회성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함의 극치라 하겠습니다.
이 일화가 연구원내에서 한동안 크게 회자되며 김재민이가 야당 당수하는 데는 제법 기여했지만 ‘97년 IMF 금융위기가 와서 연구원 인력의 40%를 계열회사로 방출하는 구조조정시에 0순위로 유배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울산으로 유배되어 온 현대중공업 경영기획팀에서는 스타급 분석보고서 작성쟁이로 제법 이름도 날렸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새로 부임한 사장이 인상적인 보고서를 작성한 경영학 박사임을 알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독대한 자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경영기획팀이 좀 더 효율적인 조직이 되려면 당신이 보기에 어떤 점을 고쳐야 하나 하고 물었다고 하네요. 당연히 앞뒤 가려가며 말했어야 할텐데도 고지식하게 자기부서 담당중역의 업무적 무능함과 아부쟁이들을 편애하는 인물관리의 통찰력 없음을 자기 딴에는 소신 발언이랍시고 뇌까렸다 합니다.
이 발언이 담당중역 귀에도 흘러 들어가 중역을 격분시켰고, 그 중역을 따르는 딸랑이 부서장들 사이에는 ‘또라이 박사’로 소문나 김재민의 현대중공업 경력이 그 좋은 박사쯩에도 결국 임원 한번 못해 보고 부장급으로 머문 채 마감된 결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 큰 아들이 ‘아빠는 군대를 가지 않아 나도 아는 출세길의 이치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하며 혀를 끌끌 찰 정도였고요.
이렇게 그의 직장경력이 ‘금의야행’ 하듯이 자기가 가진 재주값을 한번도 제대로 못챙긴 채 마감한 게 항상 가슴 한 켠에서 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권모술수와는 담쌓은 고지식함과 자신의 저항정신을 은폐할 줄 모르는 대책없는 솔직함으로 온가족을 항상 불안하게 했지요. 다른 한편 꼿꼿하고 순수하며 소탈한 품성으로 또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을 제법 많이 받아온 그의 삶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요즘 경남고 27회 카페에서 자기 자서전 글 올리며 많은 동기들의 지지를 모우는 모습에서 김재민의 글재주가 계속 꽃피워지길 와이프이기 전에 글쓰기 좋아하는 지기로써 응원합니다. 이 인간이 가족 먹여살린다고 꽤 오랜 기간 익숙치 않았던 조직생활에 몸담으며 적지 않게 받았을 스트레스와 애환들이 이제는 멀리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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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 18.08.23. 17:14
제한된 분량이라는 경계선이 있었겠습니다만 거기에 맞게 결혼 전에서부터 결혼 그리고 유학시절, 유학 후의 직장에서의 남편의 적응도를 몇 개의 에피소드로 집약해내는 깔끔한 필치 등이 다 이유가 있었네요.
여고시절부터 지구력을 요하는 어려운 러시아 문호들의 장편들을 좋아했던 것이 지금의 김박사 못지 않은 문재를 지닌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남편 김박사가 문학작품을 중고교시절부터 애독하여 독일 유학 시절까지 지속된 것이 오늘의 필치를 가졌듯이 말이지요.
문학을 전공한 나도 러시아문학은 읽기가 쉬운 게 아니었지요.
몇년 전 이문열 선생과 함께 러시아문학기행을 했을 때 사전에 이들 작품들을 다시 한번 일독하고 떠날 때도 만만찮은 일이었지요.
글쓰는 솜씨가 드러난 이상 남편 김박사와 함께 노후에 재미난 문학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맛깔나는 글들을 써두었다가 책으로 발행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글쓰는 일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요새는 안읽게 되었는데.. 사람의 아들은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그 주제를 형상화 시킨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참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저도 라디오 피디인 오빠 때문에 이문열쌤 한번 뵌 적 있습니다
호기심에 쳐다 봤더니 방심하면 훅 치고 들어오시는데 대가 같으신데도 소탈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문열쌤 책은 "젊은날의 초상"인데 저도 정춘시절, 그 아름다운 문장들에 함께 열병을 앓았었던것 같습니다..
필요한 말만 필요한 곳에 표현한것 같습니다.
글재주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김재민 그 인간 괜찮은 사람이지요?
다친 부위는 빨리 낫지 않지요?
빨리 완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보 주필은 뭐그리 먼데서 다음
집필진을 구하고 있는교,
가까이 있는 사람을 바로 1미터 앞에 두고
임여사 한테 우짜든지 잘보여 부탁히는게
빠를것인데...
"돈은 주조된 자유다"
또스마저 평생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고통은 또 저런 명문장을 탄생시키죠
남자인줄 알았는데 여자분이시고 고대교수시더라구요
엄청 가독력이 좋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또스의 비평서는 E.H 카가 최고였습니다
새색시는 그냥 친정으로 보따리를 싸고 갈까 하는 생각까지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부모가 出他 中 꼬마 신랑의 장난이 유난히 심해서 그만 신랑을 들어서 지붕 위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때 생각보다 일찍 귀가 한 시부모가 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사태를 파악한 시부모의 꾸지람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신부의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색시야! 익은 박 딸까? 안 익은 박 딸까?"하는 소리였습니다.
이에 새색시는 신랑이 겉으로는 까불어도 제 속은 다 챙기고 있구나..
색시는 이 후로 더욱 더 시부모를 잘 모시고 신랑의 뒷바라지도 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꼬마 신랑은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퀴즈 나갑니다... 이 얘기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누구 누구일까요?
그건 그렇고 부창부수라 카더니 애숙 여사님 문재가 하마트면 재민공 그늘에 묻힐 뻔했네요. 딴 건 몰라도 글 쓰는 일은 독립채산제로 하심이 나을듯 합니다.
그리고..
강주필이 제안하는 해외작가건은 다 좋은데 우리집 사람은 빼 주십시오.
40년 가량 같이 살아서 잘 압니다.
그냥 패쓰해 주시기 간곡히 부탁합니다.
지공선사께서 미처 어부인의 문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세계 제일의 글쟁이 스티븐 킹도 문단에 등단하기 전
자신이 써놓은 글이 못마땅해 쓰레기통에 버리기를 여러차례 했답니다.
그의 부인이 남편이 버린 글을 한번 읽어보더니만 깜짝 놀라 출판사에 보냈답니다.
그 글은 밀리온셀러가 됐지요. 영화로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쇼생크 탈출>입니다.
지여사가 가슴에 품은 기막힌 사연은 무궁무진할 듯 합니다. 한번 풀어놓으시디록 권유해보심이..
혹여 글쓰기에 익숙치 못하시다면 지공선사께서 조금 도와주시면 되겠습니다.
글은 미사여구가 중요한 게
마치 보이지 않는 무지개의 양쪽 끝에서 각자의 일상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어느 비 개인 날 아침 불현듯 나타난 무지개의 양쪽 끝에 서있는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이 푸른 벌판 한 가운데서 극적인 포옹을 하는 그림이 마음 속에 떠 오릅니다.
ㅎ 영화를 너무 많이 본건지..
하여간 운명적 만남이었네요...
김박이 기스면 사건으로 야당 당수 노릇하게 되었다는 대목에선 절로 웃음이 나오고.
앞으로도 자주 등단하시어 우리 동기팬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시길...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나에게도 건방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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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 강국장이 인정하고 또한 글쟁이 수인공이 글 냄새를 가장 먼저 맡아내는 애숙님의 글솜씨는 좀더 진행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글 흐름을 갖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