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가서 남해 찍고 돌아오다
2019. 2. 13
지난 토요일(2/9) 재작년 6월인가에 다녀온 하동 땅을 다시 방문했다. 얼마 전부터 한 2년째 못본 김진회의 근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에 가는 길에 진주에도 들려 얼굴 본 지 오래 된 최태룡이까지 보고 오려 했으나 이 친구가 지금 미국 방문 중이라 해서 진회만 만나고 오게 되었다.
가기 전에 안부인사와 함께 찾아가도 되냐고 했더니 ‘나는 그때와 똑같다.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온나’ 하는 방문 수락을 받고 오후 1시쯤 지하철로 사상 시외버스터미널에 닿아 하동행 버스에 올라탔다. 11,000원 하는 버스는 전경 좋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함안, 사천을 지나 두 시간도 안되어 하동 터미널에 도착했다.
(섬진강 송림 1)
버스에서 도착예정 문자로 연락받은 진회가 17만 킬로 뛰었다는 검은 제네시스를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2년 전 여름 때와는 달리 러시아 엽사들 모자를 쓰고, 더 짙어진 흰수염 외모 속에 완전 도인같은 분위기를 띄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올라타니 쇼팽이나 슈만 류의 잔잔한 클래식 피아노 곡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리스트의 피아노 곡들이라 했다.
(섬진강 송림 2)
2년 전 소설-토지의 주인공들이 나오는 ‘최참판댁’ 거리는 생략하고 섬진강 옆에 있는 ‘송림’으로 데려갔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송림은 몇 번 봤지만 오후 늦은 햇살이 내려쪼이는 섬진강변의 솔 숲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을 둘이서 호젓하게 걸어가는 데 꽤 각별한 운치가 있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가다 같은 산책객인 듯 싶은 젊은 아가씨들에게 사진찍기를 좀 부탁하니 흔쾌히 세 컷이나 찍어주었다.
(쌍계사 입구)
(쌍계사 경내)
자리를 옮겨 화개장터를 방문했으나 비시즌이라 을씨년스럽기만 해 근처에 있는 쌍계사에 들렸다. 이곳 역시 외지 방문객들만 몇 쌍 보일 뿐 호젓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모처럼 사찰 경내를 한바퀴 편안하게 둘러봤다. 한국에서 아름답기로 한 이름 한다는 말이 허황스럽지 않게 사찰들의 배치와 주위환경이 참 아금받게 어우려져 있었다.
(쌍계사 9층 석탑)
특히 9층석탑이 눈에 확 띄었다. 석탑인데도 불국사 다보탑 못지 않은 다양한 관능의 기예미를 풍기는 가운데 우뚝 솟은 정결함의 석탑 스타일이 신라인들의 무르익은 예술적 완숙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단청들도 생생한 색상들을 뽐내고 있어 보물 500호로 지정된 사찰답게 관리도 잘되는 중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진회집 뒷면)
난 이번에 올 때 진회를 만나면 내가 돈을 쓰며 자연인 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으나, 같잖은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지불기회를 내내 주지 않았다. 해도 곧 기울어져 가고, 지나 내나 시장기는 별로 없고 해서 식당순례를 포기하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는 코스를 택했다. 오는 길에 어느 마트에 들려 LA갈비 1킬로와 백화수복 큰 됫병 하나를 사서는 제법 긴 귀행길을 거쳐 재작년에도 1박한 농가형 진회집에 도착했다.
내가 묵을 손님 방에 짐을 대충 풀고는 사온 LA갈비를 불판에 구우며 자기는 백화수복, 나는 갖고온 무알콜 캔맥주를 마시며 오랜 만의 해후를 나누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호구조사는 미루어 짐작만 하고 일절 묻지 않았다.
대신 지박사와 예전에 같은 룸메이트였다는 사실을 환기 시키며 그 시절 얘기를 슬쩍슬쩍 물었다. 자기는 지흥석을 만나고 겪은 친구 중에 ‘가장 영특하고 유머러스’ 한 친구 중 하나로 여긴다고 방송용 멘트인지 뭔지를 뇌까리며 평소 독설가답지 않게 옛친구에 대한 애정과 경외감을 표했다. 90년대 후반인가 미국방문을 한달인가 했을 때 서토와도 처음 만났고, 지박사가 근 한달 간이나 찾아와 가이드 하게 삐댔음도 전해주었다.
(유명한 하동 물의 고장인 진회 동네 전경)
언제나처럼 나는 자신의 만년 하수로 여긴다며 초등시절 얘기로부터 내가 독일 가기 전까지의 그 시기를 지겹지도 않은 지 얘기 사이사이에 또 리바이벌 해댔다. 토성교로 전학 오기 전 동신에서 같은 반 했다던 강성보와 조용수의 얘기도 나왔고, 토성 와서는 나만큼이나 성낙산(욱조)이라는 이름이 자주 들먹여졌다.
(진회 동네 전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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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간중간 기타로 이런 노래 저런 노래 부르는 중에 백화수복이 거의 다 비워져 가면서 필름이 딸막딸막하는지 눈을 게스름하게 떠고는 ‘니, 누고? 아니 누구신지요?’ 하며 예의 마지막 코스로 가는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자리를 파했다.
내 방에 들어가니 매트리스로 받친 요와 이불은 그럴 듯 한데 몰아치는 산바람을 어쩔 수가 없어 입고 간 파카 채로 잠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오들거리며 일어나 보니 밑에 있던 전기 매트리스는 켜지지 않았고 방 보일러도 가동되지 않은 채였다. 주인장이 술에 취해 먼저 헤롱거렸으니 발생한 사태였다.
(냉방에서 간신히 깨어난 뒤)
그래도 파카옷과 체온으로 버티면서 용케 하루밤을 넘겼지만, 화장실 변기가 며칠 전부터 고장이나 큰 것은 포기하고 추운 마당에 나가 여러번 노상 방뇨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해는 또다시 떠올랐고, 요놈 깨면 바로 차 얻어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가려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다.
일어나서야 내 방에 전기 메트리스와 보일러도 꺼져있음을 알고 취중이라 못챙겼음을 꽤 겸연쩍어 했다. 그래서 만회하려는 듯 하동에서는 이제 별로 볼게 없으니 한 40킬로 쯤 떨어진 남해의 ‘독일마을’로 가보자며 나를 태워갔다. 나도 이곳은 TV 방송을 통해 여러번 전해들은 지라 ‘그건 좀 괜찮아 보이네..’ 하고 따라 나섰다.
(독일마을 전경 1)
가면서 하는 얘기가 ‘독일마을’은 김두관이 군수하던 2000년 무렵 독일광부와 간호사들이 퇴직하고 자기 독일인 배우자들과 노후생활을 하려 풍광 좋은 남해안 지역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적극 섭외해 만들었는데 의외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것이었다. 매스컴을 타며 전국의 관광객들이 버스대절을 하며 점점 많이 모여들자 초창기 평당 11만원 하던 지가가 지금은 100만원을 훌쩍 넘어 로켓 상승하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여기도 들이닥쳤음을 알려주었다.
(독일마을 전경 2)
소문 듣고 방문한 할매 관광객들이 독일 아재들이 사는 집 창문을 거리낌 없이 들여다봐 이 양반들이 짐작컨대 좋은 집값을 받고 이 공간을 거의 모두 떠나버렸다 했다. 그 과정에서 재력있는 엉뚱한 사람들이 들어와 제법 오랜 기간 쌓아놓은 관광문화 자산을 자신들의 돈벌이에 활용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수년 전부터 그 인근에 독일마을을 모방한 ‘미국마을’이라는 것까지 조성하여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식 가옥과 동부 지역 스타일의 집들을 큼지막하게 지어 독일마을로 온 관광객들을 연결 유치하려는 상술을 부리는 중이었다. 내가 본 독일식 거리들이 지금은 상술에 쩔어 네델란드 식 풍차까지 달리며 국적불명의 짬뽕 유럽화가 된 것처럼 서토와 지박사를 비롯한 미국 사는 동기들이 볼 때 요 동네도 좀 많이 조악스러우리라 여겨졌다.
(리베 하우스 내에서)
진회가 수년 전에 방문했다던 무슨 ‘리베 하우스’라는 곳을 찾아 갔더니 그래도 독일식 소세지와 감자튀김 안주에다 흑맥주 등이 있어 자리잡고 시켰다. 독일이 테마가 되다보니 오후 내내 독일쪽 질의응답 시간이 가져졌다. 소세지 맛도 내가 독일 것 같다고 평해줬더니 과연 맛이 다르다고 평소 입 짧은 친구가 자주 입에 대며 맞장구 쳐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친구가 내친 김에 ‘미국마을’도 보러가자 해 언제 또 오겠나 싶어 오케이 했다. 첫 번에 찾아가지 못한 채 우회 길을 한참 달리자 그냥 미국 것은 본 걸로 하고 터미널로 가자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말이 안된다며 수 킬로를 돈 끝에 기어이는 ‘미국마을’에 도착했다.
(미국마을 입구)
아직 독일마을과의 연계 코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지 방문객들이 한산하였다. 가옥들만 덩그라니 지어졌을 뿐 거주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서토와 지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여기서 ‘거주 주민’ 알바하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였다. 미국식이라 집들의 규모는 한참 컸다. 동네에 미국 남부식 펍이라도 생기려면 시간이 좀 더 흘러 오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할 거라는 계산을 놓아보고 여기서도 아듀를 고했다.
(서토와 지박사가 얼른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미국마을 집들)
진회가 쓰바쓰바 하면서도 지 평생 하수가 자기를 기특하게 또 찾아와준 게 싫지는 않은 지 비싼 차 기름 써가면서 하루 반이나 할애해 남해까지 이동해 관광가이드를 해준 게 나도 내심 고맙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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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달 전에 가슴에 난 무슨 종양제거 수술을 했음에도 여전히 맑은 공기와 하동 물 덕분에 기본 건강을 잃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 반가왔다. 카톡은 하지 않는다지만 문자 메시지는 여전히 가능하고, TV도 바둑방송을 주로 시청하려 구입했다지만 이것으로 세상 돌아가는 시사에도 그리 어둡지 않는 것이 대견하게 여겨졌다.
하루 밤 유숙하는 것은 어쩌다 보니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불쑥 찾아온 친구를 마다하지 않고 맞아주며 최선으로 관광가이드까지 해주니 나름 복터진 방문이었다. 터미널에 내려다 주고 ‘이젠 더 이상 찾아오지 마라’ 하던 소리도 ‘틈나면 또 들려라’ 하는 소리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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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철 19.02.13. 21:07
경영학 박사인 김교수께서 하라는데..무조건(?) 해야되지 않켓슴미까.^^
당연히 선언하고 평화협정까지 일사천리로 가야되는데.. 워낙에 오만하고 욕심많은 나라여서..
가는 척 하다가 갑작스레 뒷통수를 치고 깽판을 유도할듯 하여.. 여러모로 애로가 많이 예상되네요.
남북이 일단 힘과 뜻을 잘 합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데..문통께서 과연 누구 편에 서실란지..^^
구덕시절 얼굴은 기억에 있지만..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어 지박사가 나성에서 소개를 해 줄때 까지
진회동기를 잘 몰랐기에 서먹하여.. 당시 보다 안면을 틀 기회를 적극 만들지 못했지요.
당분간은 좀 더 조용히 있고싶어 그가 하동에 내려가 있는 것이라면.. 가서는 안되겟슴미다만-^^
두 분의 우정이 매우 진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진회 동기의 건강과 평안을 바랍니다.
하지만 고교 동기라는 편안한 거리가 확인되는 순간 서토도 이 친구에게 우찌 될지는 나도 잘 가늠이 오지 않소이다.
찾아서 머리에 흰 서리를 맞히네..하기사 세월이 머나먼 바다를 건너서도 오는 판국에 좁은 땅 하동 쯤이야 고속버스 타면은..
길영공이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사람 좋다는 얘기도 들려줬고, 젊은 시절의 상황들도 뭐 좀 들은 듯한 친밀감을 풍겨줍디다.
그 노무 마지막 코스.. 한말 또 하고.. ㅎㅎㅎ
참 사람이 술을 먹는것이 아니고 술이 사람을 먹게 되는 것 같심다..
짜슥 몸이나 건강해야 될낀데..
글고 김박이 냉방에서 간신히 깨어난 얼굴을 보니 거의 죽었다 살아난 사람 모습이요..
잘못하다간 그냥 영원히 잠드는 수도 있었을 것 같쏘..
남산 중정(안기부?) 취조실에 몇날밤 샌 사람같은 모습임미다..ㅋㅋ
그리고 동기 중 백성래라는 친구가 갑자기 돈 생겼다며 지박과 같이 하숙방에 있는 자기를 찾아와 술 샀다는 얘기도 취중에 흘려 스토리 구성이 잘 안됐는데 어떤 그림이었는지 기억나면 좀 들려 주시구려.
1학년 2학기가 끝났는데 빵꾸가 너무 많이나서 윈터를 하지 않으면 학사경고를 받게 되었던지 머 그런 엿같은 경우가 생겨서 겨울방학인데 집에도 못내려가게 되었는데 없는 살림에 또 하숙비를 보내달라기가 미안하여 한달동안을 아는 선배, 동무들 방을 전전하며 버티기로 결심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요.. 밥은 하루에 한끼만 먹기로 하고..ㅋ.. 그 따구로 살다보이 체중이 54-5kg로 내려갔지요..
광배집에 가서 노래부르는 것은 아마 혼자 간 것 같소이다. 난 그 기억은 안납니다. 광배집에서 바둑을 두는데 바둑판이 거북이처럼 생겼습니다. 가만보이 거북이등이 바둑판 뚜껑이라
백성래는 고대 동기인데 요즘 머하는지..
워낙이 사람이 좋고 의리있는 좋은 친구지요..
문원장하고도 친했던 것 같은데..
하숙비가 올라오면 동네 외상값 갚고 이러면 3-4일 만에 다시 빈털털이..
하릴없이 삐하니 방구석에 있는네 갑자기 성래가 와서 목구멍에 때벗긴 일이 있긴있었던 것 같은데..
자 자초지종은 나도 잘 기억이 안나는구려
광배집에 갔을 때 거북이 등짝 바둑판 가리개 봤다는 얘기도 합디다. 지박사는 기억력이 바로 며칠 전에 들은 나보다도 훨씬 윗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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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선생님 고향이 어디십니까? 하고 안 물어서 다행입니다....
너무 웃긴다! 아니 웃음보가 터지네...
주변을 관광시켜주는따뜻한 진회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어제부터 요즘 동기들간에 회자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위에서 있는 놈들을 먼저 불러가니 친구들한테 있는 돈
팍팍 쓰라는 말입니다. 농담이지만 우리세대는 고생고생하여
좀 살만하면 병에 걸려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하니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입니다.진회는 부산을 떠나 조용히 은거하고 있으니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재민박사가. 진회소식을 알려주니 고맙소이다.
노래 잘부르고 바둑 잘두고 얘기 잘하는 친구 진회 부산모임에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대충하고 자리를 뜰라고하면 끝끝내 찐드기같이 들러붙을 때가 많았지요.
어느날 심리학 책인가에 보니 융인지 누군지가 인간의 성격을 몇가지로 구분한 중에 "구순성 성격"이란 것을 설명했는데 유아기에 이유과정 중에 문제가 있으면 끝끝내 모유나 젖병을 물고 놓지 않는 그런 성격이 생긴다는 머 그런 것..
그래서 내가 김진회가 그런 구순성 성격이라고 지적을 한 적도 있었슴다.. 미련과 아쉬움이 많아 자리를 잘 뜨지 못하고.. 사실은 정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적지 않은 동기들이 여기에 학을 떼고 진회라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짓곤 하는 걸 꽤 봤심다.
하는 짓도 대략 눈에 선합니다..
안 변하는 것이 외려 보기가 나쁘기 않습니다..
아마 진회와 함께 고3, 재수시절, 대학교 .. 이렇게 청년시절의 알짜배기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 것이 아닐까도 싶음.. 이제 생각하니 그 때 진회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하여 많이 힘들었던 것 같음..
일일이 다 기억도 잘 안나도 실없고 우끼고 한심한 얘기들이 즐비하니.. 하이튼 죽이 잘 맞았씀..ㅎ
만날 때마다 우리 옴마 안부를 묻고, 꼭 찾아볼거라고 과장된 다짐을 하는게 지박 얘기를 들으니 좀 이해도 되는 듯 하네요. 참 유년의 트라우마는 6, 70이 되어도 끈질기게 들어붙는 것 같소이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이 권하듯 나도 법사의 유년 시절과 대학 졸업 할 때까지의 청년시절을 기록하는 자서전격 글 시리즈를 보고 싶은 맘이 꿀떡같은데 어찌 한번 결심하지 않으실라능교?.. 2부는 옵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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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10년전쯤인 2009년도 전후인가.. 해당지역을 지인과 함께 차를 몰아 다녀온 적이 있어
김박사의 글이 보다 정겹게 다가 옵니다.
하동, 쌍계사, 화개장터, 구례까지 돌아보고 왔지요. 그 때 울산에서 김박사와도 만나지 않았나 싶슴미다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의 언어가 다른 상황을 매우 신기하게 느낀 기억이 남아 있네요.
연속극 허준인지 대장금인지를 촬영했다는 셋트촌에도 들렸던듯 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