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체험기

11년전 북한 출장 방문기

백조히프 2019. 1. 25. 10:15

방문객 여러분, 제가 2007년 말 현대중공업 시절 남북협력사업 방문단의 일원으로 다녀왔던 북한 기행기를 요즘의 남북협력 시대를 다시 맞아 뭔가 생각할 만한 것들이 좀 있을 것 같아 한번 더 올리네요.


우리 옛 고교 Kng27 홈피에도 올렸고, 현대중공업 내 인터라넷에도 올려 당시 2,000명 이상의 클릭수를 기록하기도 했심다. 11년이 지난 지금 평양과 원산 쪽이 김정은 정권의 과시적 허장성세 속에 그 때보다 더 눈에 띄는 인프라가 구축되었겠지만, 그 당시는 원산쪽이 참으로 열악해 한참 놀라고 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사진들을 보니 소생의 머리숱이 그래도 제법 촘촘해 보여 여기서도 흐르는 세월을 한번 더 확인시켜 주고 있심다.


===================



북한 출장 방문기

 

 

2007. 12. 30


떠나던 날

 

남북경제협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부가 주관하는 대북 조선협력 2차 실사단 일원에 끼어 12월 14일부터 4박5일 여정 속에 평양, 원산, 안변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보통지역이 아니듯이 가기 전부터 세 번이나 출발 일정이 바뀌었다. 최종 확정된 14일 코엑스에서 통일부가 주관한 방북 교육을 받고 나서조차도 북측의 확인 연락이 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정말 가기는 가는가하고 고개를 저을 만큼 아득한 곳이라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출발 당일 날 오후 2시 쯤 판문점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예정대로 경유지인 북경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1시간 40여 분 후 북경공항에 도착하니 수 년 전 상해공항에 내렸을 때처럼 터미널 구조는 비슷했으나 공항요원들의 표정과 행동은 2008년 올림픽 개최를 의식한 듯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최소한 인천공항 수준은 충분히 따라온 것 같았다. 마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번 치룬 뒤 우리사회의 시민의식과 간접 인프라들이 글로벌 수준에 훨씬 빨리 다가선 것처럼 중국도 그런 선순환 커브에 조만간 들어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첫 날 숙박지인 북경 크리스탈 호텔에서 동행한 시설부 김차장과 맥주 한 잔하며 첫 밤을 보낸 뒤, 이튿날 서두르며 9시에 북경공항으로 향해 오후 2시에 평양으로 출발하는 고려민항편의 탑승수속대 앞에 섰다. 1주일에 3편 있다는 북경-평양 노선은 의외로 만석인 듯 했다. 수속 밟기 위해 우리 일행이 서있는 옆줄에는 남쪽 사람들이 아닌 복색의 근로자풍 사람들이 있었다.

짐작컨대 우리의 7, 80년대처럼 중동 건설시장에 단체로 취업나갔다 귀환하는 북쪽 아저씨들이었다. 무더운 작업 환경에서 고생을 많이 한 듯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고 피곤한 표정들이었다. 그들도 우리가 남측에서 온 사람들이란 것을 일견에 알아챘겠지만 별다른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는 우리측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보안검색을 마치고 출국장에 들어서 고려항공 탑승 게이트 근처에 가니 같이 수속을 마친 한 무리의 북측 근로자들이 비행기 보딩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좀 떨어져 자리 잡으려 했지만 나는 일부러 북측 사람들 속에 들어가 앉았다.

그들 간에 오고가는 얘기를 좀 듣다 옆에 앉은 아저씨에게 우리 일행은 남북 협력 건으로 평양가는 팀이라고 밝힌 뒤 어디에서 일하다 들어가는 길이냐고 말을 걸었다. 의외로 선선히 쿠웨이트와 카타르에서 한 2년간 일하다 들어간다고 답해 주었다. 한 2천 명 정도 현지에서 일한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남쪽기업과는 고용계약을 맺은 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적은 아직 없다 했다.

 

보딩 시간이 되어 일어설 채비를 하는 데 이 양반이 자기 동료들이 전해 준 코카콜라 캔을 따서 나보고 먼저 한 모금 하라 권하는 게 아닌가? 순간 마음 속 깊이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아, 이런 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의 DNA가 작동한 것이리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최대한의 감사한 표정으로 한 모금한 뒤 다시 건네주었다.

그 양반 역시 짦은 순간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 남쪽 친구에게서 흐뭇한 기분으로 캔을 되돌려 받아 오래 된 친구들과 돌려 마시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대어 마셨다.


고려항공 시승

 

서로 감사의 목례를 나눈 다음 우리 일행 쪽에 합류하여 고려항공 비행기에 올라탔다. 구소련제 일류신이거나 투플레프 기종 같았는데 예상대로 보잉이나 에어버스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기내시설이 구닥다리 그 자체였다. 거기다 앞자리와의 간극마저 터무니없이 짧아 비교적 소형 체구를 가진 내게도 앉아서 옆으로 몸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100킬로를 넘나드는 거구의 김차장은 평양까지의 1시간 반 정도 비행기간 중에 거의 죽는 줄 알았다고 착륙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승무원들의 미모는 남쪽 스튜어디스들에 비해 그리 떨어질 바 없었으나 몸에 배인 친절한 미소와 접대 태도 등은 아무래도 체제가 체제인 만큼 이해하고 넘어가야 했다. 비행 중에 한번 기내식이 나왔는데 좁아터진 공간에서 앞좌석에 붙은 받침판을 펼쳐 먹는 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고역이었다.

체구가 조금만 큰 승객에게는 받침판이 90도로 펴지지도 않았다. 내게는 앉은 좌석이 착석할 때부터 90도로 올라오지 않아 뒤쪽으로 한 15도 정도 제껴진 채 마치 우주항공사들의 이륙 자세처럼 식사하게 되었다.

 

좀 과장하면 식사 중 여러 번 아우슈비츠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수감수처럼 살기 위해서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음식을 입에 넣어야 한다는 극한상황 그림이 머리 속을 계속 스쳐갔다. 곽밥이라 하는 커다란 도시락 케이스에 밥, 닭고기, 빵과 함께 찹살떡 같은 후식이 들어 있었다.

음료 서비스도 하는데 맥주를 시키니 커다란 병맥주를 가져다니며 일회용 컵에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물을 주문하는 승객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제공했다. 여기에서부터 벌써 뭔가 애잔한 마음이 찡하게 들었다.


평양 입성과 첫인상

 

드디어 말로만 듣던 평양 순안공항 활주로에 착륙하게 되었다. 하강하는 동안 아래를 보니 활주로 외에는 잔디형태로 손질되어 있지 않은 잡초 땅들이 그냥 그대로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지 않은가? 과연 북한답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승객수송 버스를 타고 공항건물 앞에 이르니 북측 안내원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동행한 우리 공무원들 다섯 명의 이름만 호명하더니 따로 귀빈실로 가게 하고 나머지는 일반 수속대로 보내었다. 관료적 마인드가 뿌리 깊은 듯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구소련군의 털모자와 긴 외투 복식을 한 북한 공항요원들의 표정은 연전에 금강산 관광가기 위해 민통선을 지날 때 검문하던 북측 군인들과는 판이할 정도로 여유로와 보였다. 여성요원들은 따로 선발된 듯 대부분 자연산 미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컴퓨터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은 듯 일일이 수작업으로 일을 하는 바람에 얼마 안되는 입국객들 가지고도 한 시간이 넘게 수속시간이 걸렸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대우제 중고버스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부가 잘 정비된 차량에 올라타니 북측 안내원들도 군데군데 동승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수인사를 나눈 뒤 묵을 고려호텔로 가는 길에 접어들자 창문 양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북녘의 풍경을 부지런히 눈에 담았다. 도로는 4차선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으나 통행하는 차량 수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위로 뻗은 싸리비 나무같은 가로수가 가는 길에 드문드문 늘어서 있는 게 처음 밟아보는 북녘의 풍치에 한결 더 이국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 전세계에 들이닥친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이 오직 여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듯 무슨 별세계같은 보호구역에 들어선 듯 했다.

 

옆에 앉은 온화한 표정의 안내원과 가벼운 가족 얘기를 교환하며 한 20분 쯤 달리니 드디어 평양 시내에 반듯반듯 세워진 콘크리트 다주택과 대리석으로 마감재를 쓴 몇몇 거대한 공공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은 막 어둠이 들어서려 하는 석양 속에서 영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나오는 냉전시대 동베를린 시가처럼 단정하지만 어딘가 우수어린 회색 톤의 무미건조함이 군데군데 배여 있었다.

 

외투에 손을 넣은 채 빠른 걸음으로,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바쁘게 귀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쪽의 도시들에서처럼 삶의 역동성같은 현실감으로 와닿지 않았다. 군데군데 건물 위에 걸려져 있는 붉은 색의 혁명구호와 띄엄띄엄 보이는 ‘무슨무슨 상점’ 같은 간판을 내건 단층 건물들이 드디어 말로만 듣던 은둔과 수수께끼로 점철된 기묘한 사회주의 국가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고려호텔 투숙

 

드디어 버스는 북한내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고려호텔 앞에 당도했다. 로비로 들어서니 서구호텔식 복식을 한 포터들과 문지기가 우리 남쪽 손님들을 이제는 자주 본다는 듯한 표정과 태도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맞아 주었다. 로비의 규모는 넓찍했지만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듯 휘황찬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놀라운 것은 미달러가 더 이상 각종 가격표들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달러 약세라는 전세계적 현상이 이곳 은둔의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 2년 전부터 서방측 투숙객들에게 유로화로 숙박비와 각종 봉사료로 지불하게 한다고 했다. 

 

고려호텔 로비에서

 

김차장과 같은 방을 배정받아 들어가 보니 객실 수준은 남쪽이나 서구국 호텔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는 않아 보였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동급 룸 수준에서 평균은 되었다. 미니 냉장고를 열어보니 신덕산 샘물과 룡성 맥주가 각 두 병씩 들어 있었다. 샤워를 한 후 남쪽에서 가져간 육포를 안주 삼아 맥주 한 잔씩 하며 바깥을 내려다 보니 가로등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맞은 편 건물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도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저녁 7시부터 2층 대식당에서 북측이 마련한 환영만찬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가보니 분홍색 한복을 입은 북측 도우미들과 나비 넥타이에 밝은 베이지 색 양복을 입은 남자 종업원들이 다섯 개 정도의 원형 테이블에 앉게 된 남측 손님들을 정성껏 접대했다.

우리측 산자부 대표와 북측 육해운성 대표가 의례적인 환영사와 답사를 나눈 뒤 각 테이블에 중간중간 끼어앉은 북측 요원들과 수인사를 다시 나누며 코스로 나오는 음식과 북한산 소주를 음미했다. 음식은 깔끔했지만 특별한 진미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려호텔 만찬연 김차장(중앙)과

 

평양에서의 첫 밤을 숙면으로 보낸 뒤 평양 액센트로 “손님 일어나십시오” 하는 북측 프런트 여안내원의 모닝 콜을 들으며 6시 반에 기상했다. 서둘러 샤워와 세면을 하고 식당에 가니 식사는 어제 만찬 때처럼 또 코스식으로 나왔다. 8시 경 로비에 집합하여 남포와 원산 근교 안변으로 가는 두 팀 중 후자에 끼어 원산행 버스에 올랐다.

 

 

이른 아침 평양거리(고려호텔 앞)

 

원산 가는 길


하루를 자고나서 그런지 바깥 풍광이 훨씬 익숙하게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다 첫 날의 설렘과는 달리 안정감을 회복한 듯 했다. 버스는 20분 정도 시내를 관통하다 곧 교외길로 들어섰다. 총 길이 172 Km에 1972년 착공하여 1978년에 완공했다는 평양-원산 간 4차선 고속도로는 콘크리트 포장로였다.

접합 이음매가 매끄럽지 못한데다 전날 내린 눈이 도로 곳곳에 쌓여 시속 70킬로 이상 내기가 어려웠다. 차창에 비치는 산하는 녹화사업이 부족해 그런지 머리를 짧게 깎은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산세는 황석영이 소설 '장길산'에서 묘사한대로 확실히 남녘보다 선이 굵고 세차 보였다.

 

<원산가는 길에 본 산세>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은 거의 없기에 운전기사는 응달진 곳에 눈이 미처 녹지 않은 구간에서는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좌측통행을 일삼았다. 배낭을 등 뒤에 매고 간간이 길을 가는 주민들은 대부분이 도보였다. 정기 노선버스 같은 것은 아예 없는 듯 했다.

공기와 하늘은 더없이 맑아 총총걸음으로 대오를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 남쪽에서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추구하는 웰빙 걷기운동 효과를 무료로 누리는 것 같다고 뜬금없이 좋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6, 70년대 남쪽의 시골 오지에서나 볼 수 있던 낙후된 교통수단 인프라가 그대로 엿보여 안스러운 마음을 가는 내내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눈에 띄어 벌판에 방목되어 있는 소들도 먹을 풀이 충분하지 못한지 남쪽 소에 비해 덩치가 2/3 정도 밖에 안되었다. 털도 윤기나는 누런 색이 아니라 푸슥푸슥한 황색과 흑갈색의 조악한 잡탕처럼 보였다. 예전에 서구쪽 소, 돼지, 개, 하다못해 닭조차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덩치도 커고 때깔이 좋아 보이던 현상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해 참 마음이 묘했다.

얼른 이곳에도 비인간적이라 욕을 먹는 자본주의 생산성 개념일지언정 일부라도 도입되어 물질의 만성 부족을 완화하여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게끔 남쪽 기업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평호수를 배경으로

 

평양 남쪽으로 내려가 황해북도의 상원, 연산, 곡산을 거쳐 유일한 휴게소인 신평호에서 20분간 정차해 기념 촬영을 했다. 처음에 남쪽에서 지도보며 생각했던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원산까지 직행하는 최단거리의 고속로 코스가 아니었다. 험한 산세와 경유 지역의 개발 필요성 때문인지 '평양에서 남하->황해도 중간에서 동진->강원도 동해 근처에서 북상->원산'에 다다르는 우회코스였다.

 

버스가 출발한 뒤 얼마 안 있어 강원도 도계 표지판이 나타났다. 수안, 법동 등을 지나며 한 2시간 여 북행하니 명사십리로 예전부터 유명한 원산 입구에 도달했다. 오면서 헤아려 보니 총 13곳의 터널을 지났는데 굴 안은 헤드라이트에 비춰지는 희미한 야광 도로표식만 있을 뿐 아무런 라이트 시설도 없는 그야말로 암흑천지 일색이었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다 되었다.


낙후된 원산 인프라

 

남쪽에서 원산폭격이란 말로 잘 알려져 있는 원산은 6,25 때 미공군으로부터 대규모 맹폭을 당해 거의 초토화 되었다 하였다. 휴전 후 북측에서 평양, 개성, 함흥, 신의주, 원산 5대 지역거점 도시들을 국가경제적 차원에서 집중 재건하여 함흥과 함께 동북지역의 대표적 공업중심지로 육성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경관 좋고 공업화도 비교적 잘 되었다는 원산 시내로 들어서니 평양과는 사뭇 다른 낙후된 지방도시 면모가 한 눈에 다가왔다. 중심가에 있는 시설물과 주민들의 입성도 평양에 비해 한참 뒤처졌다. 명색이 북한 5대 도시 중 한 곳인데 어찌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 약간 놀랄 정도였다.

 

송도원 여관 601호


우리가 하루 밤을 묵을 송도원려관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고려호텔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북쪽 숙박시설의 여러 열악한 환경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낡아빠진 엘리베이터나 화장실 시설, 대낮에도 복도에 불을 켜지 못해 복도 끝 사람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컴컴했고,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차가운 냉기가 건물 곳곳에 음습해 있었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에너지와 전기 공급이 어려운 경제사정이라해도 1급 숙박업소가 이 정도라면 일반 가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거라 넉넉히 짐작되었다.

 

대우, 삼성 사람들과 송도원 여관 앞에서

  

푸른 원산 바다

 

점심식사를 하러 2층 식당에 갔다. 연분홍색의 얇은 한복을 입은 도우미 여성들은 냉기에 단련된 듯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코스식 음식들을 부지런히 내어 왔다. 예전부터 명태잡이로 유명한 지역이라 명태조림과 함께 광어 등 어물들이 주메뉴였고, 군고구마가 코스 앞쪽에 나와 이곳에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먹거리로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원산근교 시찰


점심을 마친 후 북한 방문의 주목적인 안변 상음리와 월랑리 지역의 조선소 건립 후보지 시찰을 하러 갔다. 한 50여 분 버스로 남행하니 목적지인 안변 해변이 나타났다. 맨 처음에 본 상음 연동 지역은 파고가 낮고 배후지 활용도가 그럴 듯 했지만 바람이 세고 전면이 탁 틔여 고비용이 예상되는 방파제 건설이 불가피했다.

 

상음리 연동 해변 전경

 

상음리 합진 늪지대

  

월랑리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

 

두 번째 상음 합진 쪽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를 낀 내륙 지역이라 바람은 약했지만 방파제 건립을 해야 했으며, 늪지여서 매립비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마지막 월랑리 쪽은 담수 확보가 용이하고, 준설토양 활용성이 엿보여 앞의 두 곳보다는 나았지만 남쪽 시찰단을 매료시킬 만한 빼어난 입지 수준은 아니었다. 세 곳 모두 진출기업에게 막대한 초기 인프라 건설비용을 추가로 요구하는 입지조건들을 품고 있었다.


남측의 냉정한 조선소 입지 평가와 원산조선소 방문

 

일행 대부분이 뭔가 미진한 마음을 품은 채 원산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점심과 비슷한 코스로 한 뒤 북측 안내원들과 회합을 가진 자리에서 보고 온 소감을 피력했다. 대우와 삼성 측 사람들은 나와 김차장이 위에서 느낀 바와 비슷한 생각을 북측에 전했다. 북측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의 평가를 부지런히 받아 적으면서 입지결정을 너무 위험성과 수익창출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아달라 주문했다.

 

남북경협 합의 정신에 의거해 초기 입지조건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남측이 대승적으로 먼저 진출해 주면 북측은 필요한 토지와 인력 제공을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였다.

인프라 및 설비투자의 대규모성과 그에 따르는 위험요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 민족적 차원에서 큰 맘 먹고 여러 처녀지들을 공개했음에도 남쪽기업들은 사업성만 야박하게 따진다고 도리어 면박주는 식이었다. 아무리 시장경제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 해도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여길 정도로 서로의 인식 간극은 참으로 컸다.

 

원산에서의 첫 밤을 그럭저럭 보낸 뒤 아침 6시에 기상했을 때 화장실 변기에 물이 내려지지 않아 각 실마다 온통 난리였다. 온수는 커녕 냉수조차 7시 전까지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겨우 시간이 되어 수돗물이 나오긴 하는데 이번에는 뻘건 녹물이 쏟아져 나와 모두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북쪽의 전력과 용수공급이 열악하다 들었지만 실제로 체험해 보니 갑자기 문명사회에서 절연된 느낌이었다.

 

전날 저녁 남측 반응이 시원치 않다 여겼는지 북측은 다음 날 이미 합의했던 원산항과 원산조선소 견학 일정에서 원산항 방문은 취소되었다는 평양 상부의 결정을 통보했다. 할 수 없이 조선소만 구경하게 되었는데 들어서는 순간 설비의 낡아빠짐과 작업방식의 낙후성에 또 아찔했다.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라니 하는 생각이 남측 일행들에 금방 퍼져 나갔다. 

  

원산 조선소 구 소련제 크레인

 

그라인딩 하기 전의 신조 선체

 

자기들 말로는 약 20만평 부지에 2,000여 명의 생산인력이 최대 12,000톤급 선박까지 건조하고, 인도네시아와 이란 등지에서 소형선 건조 주문이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했다. 하지만 용접, 도장, 설계, 인력양성 부문에서 낙후되었음을 스스로도 시인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남쪽의 60년대 상황과 흡사해 당분간은 신조선 건조가 아닌 선박블록 생산입지로서도 활용할 여건이 아니었다.


평양 귀환과 마지막 밤

 

씁쓸한 마음으로 평양행 귀로에 올랐는데 이번에도 길가에 퍼진 트럭들과 망태매고 먼 길 걸어가는 주민들을 보니 애잔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 통일비용을 쏟아 부어야 북쪽 인프라 수준이 남쪽 반이라도 따라올까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통독 후 10년 만에 ‘유럽의 병자’라 불릴 정도로 독일경제를 허우적거리게 했던 밑빠진 독 물붓기식 사회적 비용을 강요한 동독지역 인프라 개축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새나왔다.

 

평양 시내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과시적인 대형 건축물과 넓은 도로폭이 정말 허장성세처럼 보였다. 지방 도시들은 캄보디아만큼도 안되게 낙후 속에 내팽개쳐 놓고 수도권에만 이렇게 낭비적인 건설 쇼를 지속적으로 하는 체제가 더 이상 오래 가서는 결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하자 무슨 허구의 세계에 다시 진입하여 집단기만의 분위기 조성에 지각이 마비된 듯 한 역할을 한다는 자괴적 심정이 마음 저 깊은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방에 들어가 샤워하고 나오니 저녁 8시에 북측과 마지막 회합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회의 후에는 남쪽 정부 사람들이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답례 만찬을 주최한다고 했다. 회합에서는 그 전날 했던 얘기들이 확인차 되풀이 되었고, 기존 견해 차이에 대한 특별한 간극 줄임은 없었다.

1시간 조금 넘게 진행되다 남북 협력정신에 의거해 계속 잘하자는 양쪽 대표들의 세레모니적 덕담성 멘트들이 교환된 뒤 참석자들은 모두 만찬장으로 올라갔다. 1815년 나폴레옹의 폐위 후 유럽질서를 재편하는 빈 회담에 대해 후세 역사학자들이 한 마디로 표현한 '회의는 춤춘다'는 풍자적 문귀가 하필 그때 뇌리에 딱 떠올랐다.

 

스카이라운지는 층 전체가 360도 회전식이었다. 거참 경제적 어려움에도 북쪽 사람들이 외빈을 위해 할 것은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S자 형태로 길게 늘어선 테이블 한 쪽 끝에 자리 잡은 김차장과 나는 주위 업체 사람들과 방문 소감들을 나누며 이쪽저쪽에서 권하는 양주를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취기가 슬 오르려고 하는데 순안공항 도착시 남측 사람들을 맞았던 대표 안내원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앞에 앉았다. 같이 기념사진 찍고 하면서 분위기가 좀 풀어진 틈에 성명과 무슨 일을 담당하느냐고 물었다.

  

대각선 맞은 편 계선생과 송별연 자리에서

 

계 아무개라고 이름을 소개한, 이목구비가 똑부러지게 생긴 젊은 안내원은 민족경제협력연맹에서 실무 일꾼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가족과 나이, 학부 전공에 대해 물으니 딸 하나 두고 있는 30대 후반의 기혼자이며, 20대에는 김일성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밝혀 주었다.

답례로 나도 독일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심 깊게 접해봤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이 젊은 친구가 반색을 하며 다가서기에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해봤냐고 물었더니 이제 열심히 알려한다라고 답했다.

 

내친 김에 북쪽이 조선산업을 제대로 하고 싶거든 중국 이외에 베트남과 쿠바의 개방책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이라 권고했다. 특히 베트남 정부의 조선산업 발전전략을 살펴본다면 북쪽에서 당장 써먹을 만한 정책방향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거라 덧붙였다.

연결해서 북쪽에도 계선생같은 젊은 엘리트들이 많이 양성되어 세계를 향한 실용주의적 정책들을 윗선에 많이 올리고, 앞장서 실천하면 향후 10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분을 북돋워 주었다.

 

이 양반이 어느 정도 고무되었는지 만찬을 마치고 나와 사람들과 하강 엘리베이터로 가는 나를 보더니 “상당히 경청할 만한 말씀 많이 해주셨다”며 따로 목례를 건너는 게 아닌가? 제발 이런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떠나 북쪽의 개방노선에 일익을 하는 시기가 무르익었으면 하는 바램이 진심으로 일었다.

 

평양의 마지막 밤을 지하 바에 내려가 김차장, 대우 일행들과 함께 양주 한 잔 하며 보냈다. 노래방 기기도 있지만 유행하는 남측 노래들은 별로 없어 수록되어 있는 팝송을 찾아 부르며 기분을 내었다. 일정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모처럼 만취한 김차장을 부축해 방에 들어오니 밤 1시가 넘어 있었다. 침대에 누우니 바로 숙면으로 빠져 들어갔다.


끝내기 인상

 

베이징에서 하루 머문 것을 포함한 4박5일 간의 북한 탐방은 정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말미에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언젠가는 정상적인 국가로서 발돋움 할 때가 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들었다. 똑같은 감정과 인간미를 가진 북측의 형제자매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체제가 언제까지나 인간의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진보에 대한 내적 욕구를 억누를 수는 없기에 언뜻언뜻 대화를 하면서도 이들에게서 숨어있는 飛上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경제협력을 통해 북쪽 동포들과 자주 교류하여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것이 통일 후 남북의 화학적 결합기간을 줄이는 급선무라 여겨졌다.




'여행 체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골 탐방기-3/3  (0) 2019.03.08
몽골 탐방기-2/3  (0) 2019.02.28
몽골 탐방기-1/3  (0) 2019.02.24
하동 가서 남해 찍고 돌아오다  (0) 2019.02.13
독일에서의 사우나 혼탕 체험기   (0) 2019.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