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세계

앙리 루소(1844~1910)의 그림 세계

백조히프 2025. 4. 2. 23:56

 

앙리 루소(1844~1910)의 그림 세계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아웃사이더로서 원근법까지 자주 무시하는 화풍 때문에 소박파라고까지 불려지는 루소는 파리 근교 세무국에서 15년 간 수세 관리로 근무했다. 30세 중반 때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84년에 퇴직한 뒤 마침내 전업 화가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루소

 

1894년 앵데팡당전에 참가하여 <전쟁>을 전시했는데 여기에서 몽환상태에 가까운 독창적 기법을 보여주었다. 양식의 발전이나 시대의 동향과는 전혀 무관한 듯 생각하지도 않았던 걸작이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갑자기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 있다면 1897년 파리 앙데팡전에 출품되었던 <잠자는 집시 여자>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그림 앞에 서면 꿈이라고도 현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괴상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1903년부터 플레장스에 정착해 초상화를 비롯한 이국적 소재로 <호랑이의 공격을 받는 정찰대>를 기점으로 1905년 가을 살롱전에서 <배고픈 사자>를 선보였다. 루소의 작품들은 상당 수가 잡지 사진들과 파리 식물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 식물 장식과 꽃다발, 그리고 아주 단순한 선으로 처리한 정원에 환상적인 양식을 부여해 이국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자아내었다.

 

그의 성품이 소탈하고 순진무구한만큼이나 작품들 역시 순수하고 환타지 추구적이어서 평단에서는 오랫동안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때마침 유행한 원시예술 붐에 힘입어서 주목받기 시작한 뒤 고갱, 르노와르, 피카소 등이 그의 작품에 흥미을 보이자 비로소 평단으로부터 관심을 얻게 된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그저그런 류의 화가로 대접받았지만 사후에야 '현대 원시미술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

 

잠자는 집시 여인(1897)

 

이 그림에서 받는 인상은 너무나 현실에서 떨어져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 마력에 한번 빠지면 주위의 현실세계가 오히려 시큰둥하고 덧없어 보여지기까지 한다.

 

장면은 달빛에 비친 지구상의 그 어딘지도 모를 사막이다. 배경에는 강인지 호수인지가 구별되지 않는 저 너머에 어떤 인간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을성 싶은 산맥이 이상한 위용을 갖춘 채 솟아 있다. 아마도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내려왔다면 바로 이런 사막이었을 것이다. 그 사막의 모래 위에 지팡이를 손에 쥔 집시 여자가 만돌린을 옆에 놓고 조용히 자고 있다.

화사한 줄무늬가 쳐진 그녀의 옷은 은회색 달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밝게 빛난다. 고요하게 잠자는 이 집시 여자 뒤편에 사자가 한 마리 나타난다. 달빛에 갈기와 눈을 금색으로 번쩍이면서 여자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다. 얼굴 바로 옆에 맹수가 서있는데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편안하게 자고 있다.

 

루소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정경을 세부까지 꼼꼼하게 그리는 소박한 화풍으로 대담한 구도를 재현해 내고 있다. 대체 그는 이 그림을 그리며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자화상(1890)

 

루소는 인상파 화가들처럼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재현하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밑바닥의 세계'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는 꿈의 세계가 현실세계에 비해 적어도 동등하거나 현실 이상의 충실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육제의 밤(1886)

 

루소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데 밤 하늘에 달빛은 밝고, 검은 나무들의 그림자는 온 사방을 감싸며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사육제에 참가 예복을 그대로 입은 채 두 젊은 연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애틋한 연정을 나눈다.

 

화면 전체가 검푸른 청색과 검은 색으로 메워져 있기에 하얀 달빛과 남녀의 밝은 색 옷은 더욱 도드라져 청아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아마 이 여자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소의 첫 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나날의 정겨웠던 추억이 화면에서 스르르 스며나오는 듯하다.

 

에펠탑(1898)

 

초창기 작품으로서 붉은 황혼 무렵의 에펠탑 전경을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있다. 통상적인 미술사의 흐름 바깥에 머물면서 자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마치 어린 아이처럼 천진무구하게 그리려는 '소박파' 또는 '프리머티브파'의 화풍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부르 다리(1906)

 

여기서도 원근법을 무시한 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강과 다리, 그리고 배를 상상의 나래 속에서 자유롭게 화폭에 담고 있다. 비행기와 비행선을 그려 놓은 것은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인 루소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을 나타낸다.

 

돌산(1897)

 

고요한 정적 속에 꿈꾸는 듯한 세계로 들어온 신사가 홀로 산책하는 장면은 루소 자신이 세파에 시달리며 언제나 동경하던 아늑한 동화나라에서 재현해 보고자 했던 한 순간이지는 않았는지..

 

밀림의 사자

 

해질 무렵 저녁에 운좋게 사냥에 성공한 사자가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루소가 이 장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잡지나 광고지, 또는 아카데미 회화에 대한 미술책이 이런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동물들의 자세를 연구했으며, 축도기로 줄여 자신의 작품에 삽입했다. 하지만 루소가 이 작업을 마치면 그 어떤 힘이 화폭에서 살아 꿈틀거렸다.

 

밀림의 폭풍(1891)

 

화려한 색조의 밀림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백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도 별 수 없이 피신처를 찾는 동작과 다급한 표정에서 루소의 익살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호랑이에게 공격 당하는 정찰병(1904)

 

들라크루아의 동명 그림'호랑이 사냥'에서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처절한 긴장감과 역동적인 동세는 그리 느껴지지 않지만 한 순간의 선연한 포착으로 오랜 기간 관람자의 뇌리에 남을 것 같은 선명한 색채 대비가 인상적이다.

 

배고픈 사자(1905)

 

이 그림은 열대림을 그린 루소의 연작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걸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배고픈 사자가 영양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을 동안 나뭇 위 표범은 자기 몫이 돌아올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육식 새들은 영양의 살점을 잘게 찢어먹고 잡혀먹히는 짐승은 비명속에 눈물만 흘린다.

 

두 장난꾸러기(1906)

 

루소가 그린 열대 원시림은 환상의 낙원이요,꿈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그 꿈은 공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파리식물원에서의 나무와 꽃에 대한 관찰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림에서 그려진 나무와 꽃은 파리식물원에서의 관찰로 출발한 것이다.

 

루소는 식물원에 자주 들러 식물을 많이 보고 연구했으나 화면에 그려진 모양들은 실제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로서 루소의 상상 속에 창조된 것을 화폭에다 재현시킨 것에 다름아니다.

 

플라멩고(1907)

 

보통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세한 부분들을 꼼꼼하게 그림으로서 이 풍경이 현실세계가 아닌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환영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어떤 세부 대상도 실제보다 훨씬 화사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면서..

 

뱀 부리는 여자(1907),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그림은 밀림의 환상을 그린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작품이다. 우아한 곡선으로 그려진 열대 식물의 윤곽과 기괴한 꽃들은 달빛에 비치어 엷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주황색 깃털을 가진 새 옆에서 두 마리의 뱀들이 땅꾼 여인이 부는 피리 소리에 맞추어 매끈거라는 춤을 추고 있다. 전혀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은 채 여인과 새, 그리고 호수 풍경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야말로 멋진 한 순간을 짜릿하게 만들어낸다. 교교한 달빛 아래 긴 머리를 산발한 검은 실루엣의 여인의 눈은 반짝거리는데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큰 구렁이가 얼쑤하며 너울거리듯 다가오는 품새가 루소 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포착할 수 없었던 거대한 '본질적 존재의 폭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야드비가의 꿈(1910), 뉴욕 현대미술관

 

루소가 죽기 직전인 1910년 마지막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이 그림에서 역시 열대나 정글림은 그에게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꿈은 일상의 현실 이상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어느 비평가가 왜 정글 한 가운데에 근사한 소파가 있는가를 물었더니 루소는 "여자가 긴 소파 위에 자고 있다 밀림으로 옮겨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라 답했다. 즉 화면 가득 정성들여 그린 꽃이나 동물이나 피리를 부는 토인여자 등은 모두 이 소녀 야드비가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국적 풍경

 

장난기 많고 허풍쟁이였던 루소의 그림들에서는 어제 밤까지도 꾸던 꿈에서의 편안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렇기에 그의 이런 이국적 풍취를 자아내는 그림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듯 여겨지면서도 역설적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꿈을 통해 다시 현실 속에 재현된다. 아물아물한 꿈속에 영속적인 조형감을 줌으로서 우리의 현실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