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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이란 허울 속에 사람이 죽고 있다

백조히프 2025. 5. 14. 15:17

 

오마이뉴스

 

'편리함'이란 허울 속에 사람이 죽고 있다

 

[반도체산업과 대통령 선거] 노동자와 자녀들의 생명으로 유지되는 반도체 산업, 이제는 바뀌어야

 

25.05.14 09:11 | 최종 업데이트 25.05.14 09:12 | 이종란(sharps)

 
지난 3월 6일 열린 故 황유미 18주기 추모 및 반도체특별법 폐기 결의대회에서 참석한 시민들이 방진복 차림에 영정을 들고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노트북과 스마트폰 오래 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오래되고 무거운 노트북은 종종 새 노트북 구매 욕구를 자극하며 나를 실험하지만 좀 더 버텨본다. 태블릿 PC 구매도 버티고 참아본다. 대중교통이 더 좋아지길 바라며 개인 자동차도 없이 촌스럽게 살고 있다.

효과도 없고 다소 코믹한 도덕주의적인 작은 실천으로 세상이 얼마나 바뀌는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백혈병으로 스물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의 죽음을 계기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만들어진 뒤 반도체 산업에서 죽고 병든 노동자들의 아픔을 끊임없이 접하다 보니, '편리함'이란 허울 속에 생명의 가치가 너무 쉽게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황유미 사망 후 18년, 그러나 바뀌지 않는 세상

이제 정말 황유미처럼 병들고 죽어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가슴 아프게도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질병 산업재해(산재) 제보와 죽음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도 뇌종양으로 나이 50을 못 넘긴 한 삼성반도체 출신 여성노동자가 눈을 감고 말았다.

 

슬픔은 그저 남겨진 가족의 몫이 될 뿐인 비정한 세상이다. 또한 반올림에는 함께 산재 신청을 하였다가 현재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분들도 여러 분이 계신다. 한참 떨어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일 뿐인 나도 참 무섭고 겁이 나는데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그(녀)들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아픔들은 산재로 의심하지 않으면 모두 개인 질병으로 치부된다. 산재 신청까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산재임을 어렵게 입증해야 하므로 그 관문을 통과한 소수만이 산재라는 공식통계에 잡히고 있다. 질병 산재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그로 인한 작업 환경 개선은 기업의 의무가 아니다. 국가의 관리감독이란 것은 사전에도 없었지만 산재 인정 이후에도 없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피해자의 처지에서 질문을 던져 본다.

반도체 생산에는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 금속, 유독가스가 사용된다. 황유미님이 일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산재 질병의 고통이 끊이지 않는 기흥사업장에서만 반도체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화학물질 수는 무려 800~1200종에 달한다. 그중 절반이 영업비밀 물질이다. 반도체 공장에는 방사선 설비도 많다.

 

작년 5월 기흥사업장에서 2명의 노동자가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사선에 피폭되어 지금도 치료 중이다. 소리도 냄새도 없는 방사선 피폭에 대한 우려로 노동자들은 불안하다. 그동안 얼마나 방사선 피해가 있어왔는지도 알 수 없다. 화학물질과 방사선, 또 수많은 설비에서 뿜어 나오는 전자파 영향, 교대근무로 인한 건강 영향 등 복합적인 유해 위험 속에 노동자들은 병들어간다.

스마트폰, 컴퓨터, TV,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반도체 칩은 기술혁신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에 들어가는 고성능 반도체 칩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 노동자들은 오늘도 과로를 한다. 수개월 야근과 과로 후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는 삼성전자 연구개발 노동자의 증언에서처럼 이미 근로기준법상 주52시간 노동상한제 규제는 무너져 있었다.

이제라도 바로 잡고 적정한 노동으로 과로 질환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 생각하지만, 정부나 여야 정치권 할 것 없이 삼성의 이해를 대변하기 바빠, 반도체특별법에 '주52시간 노동상한제 적용 제외' 조항을 도입하려 했다가 노동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바 있다.

 

그 뒤 민주당은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지난 3월 고용노동부(전 김문수 장관)는 서둘러 반도체 연구개발 노동자에게 주64시간까지 근로를 시킬 수 있는 인가 제도를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대폭 확대했다. 연구개발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청정실에서 일하는 현장 노동자들은 밤낮으로 교대하며 높은 노동 강도를 견뎌내고 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는 자본들은 반도체 라인에 충분한 인력 공급을 하지 않는다. 충분하게 휴식을 취해야 몸의 면역력도 회복되는데, 밤에는 자야 하는 주행성 동물의 이치를 거슬러 밤에도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유방암, 전립선암, 대장암 등 호르몬 영향의 암 발병률도 높고 뇌심혈관계 질환, 수면장애 등 피해도 적지 않다.

또 하루 종일 수많은 기계설비에 둘러싸여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청정실에서 가스, 피알(감광제) 등 냄새에 시달리며 불안하게 일하다 보니 유해물질 노출에 따른 건강 영향뿐 아니라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의 정신질환도 많이 발생한다.

반도체 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이 국회 앞에서 자녀산재법 개정 촉구 및 산재심사·재심사를 청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도체 산업의 건강 유해성 조사, 이어지고 확대 되어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2019년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실태 연구보고서(집단 역학조사)에 따르면, 반도체 노동자들은 백혈병, 림프종 등의 혈액암 발생 및 사망률이 높고(여성오퍼레이터의 백혈병 사망, 비호지킨 림프종의 발생 사망이 일반인구 대비 유의하게 높았고, 특히 2010년 이전 입사자, 20~24세 여성에서 유의하게 높았음), 갑상생암, 위암, 유방암, 뇌 및 중추신경계암, 신장암, 피부의 악성흑색종, 고환암, 췌장암, 주침샘암, 뼈관절암, 부신암, 비인두암 등 일반 인구 대비 유의하게 높았다.

 

연구보고서는 이에 대해 정확한 원인 규명은 불가능하나 청정실 작업 환경의 영향 가능성을 추정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속으로 이어진 2020년 보고서에서는 '암 외의 질환'에 대한 발생 사망을 조사한 결과, 오퍼레이터, 장비엔지니어, 공정엔지니어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의료 이용을 보인 질환은 생식계, 조혈기계, 정신계, 신경계, 순환계, 눈과 귀, 내분비, 순환기, 피부질환, 비뇨기, 호흡기, 감염, 호흡기 병태, 유기물 먼지에 의한 과민성 폐렴 등이었다.

 

결론으로 반도체 제조업에서 암 외 질환의 분석 우선순위로 조혈기, 생식기, 정신질환이 중요함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피부, 신경계, 감염, 순환기, 호흡계, 비뇨기계 등을 함께 참고해야 한다고도 밝혔다.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피해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죽음의 행렬로 인해, 반복된 집단 산재신청 운동 등을 통해 오래전에 수면 위로 올라왔던 문제다. 피해자들의 반복된 산재 신청으로 인해 10년 넘는 기간을 추적해 집단역학조사를 실시하긴 했지만 위 연구는 2020년으로 그쳤다. 그 이상 진척은 없다.

 

그마저도 더 많은 피해가 있을 협력업체나 중소 반도체 업체는 제외되었고, 다단계 하청생산 구조에서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경우는 피해 통계에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현장실습생 노동자들의 피해도 적지 않은데 대책은 전무하다.

노동자들의 죽음 행렬 멈추려면

반도체 칩 생산과 소비는 더욱 왕성해졌다. 예컨대 내연기관차에는 반도체가 평균 200여 개 들어가고, 전기차에는 1천 개, 자율주행차에는 2천 개 이상이 탑재된다. 삼성전자의 경우 한해 2조 개 이상의 반도체 칩이 생산된다. 막대한 양이다.

그럼에도 또 수백조 원의 공적자금까지 들여 삼성, SK 재벌 대기업에 온갖 특혜를 주면서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거대산업단지)를 용인 땅에 짓고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법(반도체 특별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국민의 힘, 민주당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의 주장처럼 우리 미래의 먹거리가 반도체 산업이 되어야 하는가?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반도체 산업을 무한 확장하는 것에 어떻게 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독성화학물질, 방사선에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들의 존재를 지우고, 여전히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정치인들, 탐욕스러운 재벌 기업들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다.

가장 유해한 산업을 가장 탐욕스러운 기업들이 무한대의 특혜를 받으면서 생산하게 하는 반도체특별법에는 단 한 줄도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없다. 여전히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들의 성분이나 공정 유해성 정보는 기업의 영업비밀, 산업기술보호 및 국가핵심기술 보호 논리에 밀려 알 길도 없지 않은가. 노동자들의 생명은 소중하다. 더 이상 죽을 수는 없다. 재벌의 이윤을 위해 모든 걸 희생시키는 반도체특별법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