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친밀관계 살인의 전조 ‘강압적 통제’…한국은 개념조차 희미하다
‘기술 매개 젠더기반폭력 대응’
호주-한국 교류 프로젝트 열려
- 수정 2026-02-25 07:49
- 등록 2026-02-25 05:00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친밀관계 살인이 일어나기 전 전조 증상으로 나타나는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입니다. 실제로 살인의 전조 증상은 신체적 학대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지난 3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멜버른에서 만난 브리짓 해리스 모내시대 교수(범죄학)는 한겨레에 “친밀한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비물리적 학대’ 역시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며 “피해자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리스 교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정폭력 연구와 경찰 교육 등을 하고 있다.
최근 디지털 감시·스토킹, 딥페이크 범죄 등 새로운 기술을 매개로 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친밀관계 폭력의 정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리나라는 신체적·물리적 폭력을 기준으로 친밀관계 폭력 피해자가 처한 위험도를 평가한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강압적 통제’를 친밀관계 살인의 핵심 전조 증상으로 판단하고 있다.
강압적 통제란 연인·배우자·동거 등 친밀한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행동 패턴을 의미한다. 휴대전화를 통한 감시나 위치추적, 지인과의 관계 차단, 경제활동 통제와 직업·외출 제한, 반복적인 모욕·협박·가스라이팅, 성적 강요 등 피해자가 공포심을 느낄 정도로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행위가 포함된다.
모내시대학 인문·사회과학부가 주최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외교통상부 산하 오스트레일리아한국재단이 지원한 ‘기술 매개 젠더기반 폭력 대응: 오스트레일리아-한국 교류 프로젝트’(사업단장 모내시대 조혜인 교수)가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멜버른에서 열렸다. 이번 프로젝트엔 한국에서 서울시·서울연구원·서울시여성가족재단·한국여성정책연구원·경찰대학·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오스트레일리아 젠더기반 폭력 연구자, 여성폭력 대응 기관 등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강압적 통제’ 피해에 대한 개념조차 없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여러 주에선 신체적 폭력이 없었더라도 처벌 대상이 된다. 뉴사우스웨일스주(2024년 7월 시행, 최대 징역 7년), 퀸즐랜드주(2025년 5월 시행, 최대 징역 14년)는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처벌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지난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도 강압적 통제를 처벌하는 법안이 통과돼 시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빅토리아주는 2008년부터 시행된 가정폭력법에 이미 ‘강압적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결혼·사실혼뿐만 아니라 친밀한 관계, 동거 중이거나 동거를 했던 사이, 돌봄 의존 관계 등 폭넓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
올해 1월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선 교제 중이던 여성에게 휴대전화 위치 추적, 신용카드 사용 내역 감시, 외출이나 가족과의 연락 제한, 성관계 강요 등 강압적 통제를 이어간 남성이 징역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브리짓 해리스 모내시대 교수는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친밀관계 살인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신체적 상해가 가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인이 일어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체적 폭력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건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피해생존자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통제로 인해 ‘갇힌 느낌’을 받았는지 파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 연구 과제로 강압적 통제를 선정하기도 했다. 정부 정책에 반영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성안전국가연구기구(ANROWS)는 2023년부터 5년간 수행할 국가 연구 의제 중 하나로 ‘강압적 통제’를 뽑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압적 통제’가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진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혼한 전 부인의 휴대전화에 위치추적 앱을 설치하고, 218회에 걸쳐 문자와 전화를 한 뒤 승용차에 아내를 감금해 폭행한 50대 남성이 2023년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부산에선 전 연인을 집 앞에서 살해한 혐의로 2018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은 남성 ㄴ씨도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였다. 그는 범행 전부터 피해자와 동거하던 집에 녹음기를 설치하고, 차량 블랙박스를 복원해 피해자의 행적을 감시했다. 집을 나가 연락을 피한 피해자에게 집착과 분노를 표출하는 문자를 반복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성평등가족부가 낸 ‘가정폭력 피해실태 분석 및 지원 방안 개선에 관한 연구’ 보고서(2022년)를 보면, 배우자 또는 파트너에게 폭력을 당한 피해자 87.7%가 “(강압적) 통제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문가들은 강압적 통제를 법으로 규제하기 이전에, 강압적 통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먼저 자리잡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뉴사우스웨일스주의 경우 법 시행 이후 15개월간 경찰에 접수된 강압적 통제 관련 사건 400여건 중 기소된 건 18건에 불과해, 피해자가 신고하더라도 제대로 대응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호주 내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유나 오스트레일리아 여성안전국가연구기구 부국장은 “강압적 통제는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피해생존자들은 자신이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조기에 식별하기 위해선 개별 사건이 아니라 행동의 ‘패턴’을 인식하는 관점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김 부국장은 “강압적 통제에 대한 일관된 정의와 교육, 법의 효과나 부작용을 점검하기 위한 평가 체계, 형사 처벌을 넘어선 가해자 행동변화 프로그램 등 통합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미라 아프타브 오스트레일리아 매쿼리대 로스쿨 교수도 “강압적 통제를 규제하는 주들에선 경찰과 사법기관이 강압적 통제의 패턴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가해자에게 반격하며 저항한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는 등의 오인 문제, ‘맞지 않았으면 폭력이 아니다’라는 인식 문제 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라며 “한국에 강압적 통제 개념이 도입된다면, 경찰뿐 아니라 사법기관, 피해자 지원 서비스 종사자 전반이 강압적 통제에 대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포괄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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