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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백조히프 2026. 5. 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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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내 이름은 원덕기 : 프롤로그] 1980년 5월 24일, 병원 옥상에서의 생생한 증언... 유일한 인터뷰 영상

 

26.05.17 18:08 | 최종 업데이트 26.05.18 07:36 | 글: 소중한(extremes88) 전선정(sljeon) 김화빈(hwaaa) 이진민(real2) 유지영(alread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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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촬영한 인터뷰 영상의 화면을 갈무리한 것. 영상 속 인물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Tim Warnberg, 한국 이름 원덕기)다.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이 영상은 그 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 영상은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 ⓒ 5·18기념재단 제공


선글라스를 쓴 채 카메라 앞에 선 외국인. 그의 뒤편 먼 곳으로 "해태 아이스크림"이 적힌 광고판과 그 아래 전일빌딩,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이 보인다. 이 외국인의 이름은 미국 미네소타대학 출신의 팀 원버그(Tim Warnberg, 당시 25세).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 사이로 그의 폭력을 향한 분노와 광주를 향한 사랑이 비집고 나온다.

팀 원버그의 맞은편엔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2016년 작고)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Most of them ended up getting their heads split open. You could see them savagely beat the head and it was split, and blood was spurt out all over everywhere.
(대부분의 머리가 결국 찢어졌습니다. 계엄군이 잔혹하게 때려 머리가 찢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 팀 원버그 인터뷰 중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계엄군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시민을 넘어뜨리고 있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2분 30초 가량의 이 인터뷰는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힌츠페터 테이프(총 33분 51초)에 담겨 있었고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촬영은 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진행됐다.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 영상은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

유경남 전 5·18기념재단 국제연구원 연구실장은 "특히 외국인이 항쟁의 사실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목적이 분명한 인터뷰로서는 그 유사한 어떤 역사적 사건에서도 보기 힘든 기록"이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같은 소위 국제사회가 인정할 만한 기준에 비춰보면 그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는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1978년 광주에 온 한국 이름 '원덕기'

5·18기념재단에 보관된 위르겐 힌츠페터의 미공개 테이프. 약 30분 분량의 이 테이프 속 영상에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지난 3월 13일 취재진이 해당 테이프를 살펴보고 있다. ⓒ 강상우


팀 원버그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원덕기'라는 이름을 받아 1978년 4월부터 광주에 살고 있었다. 평화봉사단은 1960년대 미국 정부가 만든 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활동했다. 광주에 2년 넘게 머물고 있던 팀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국가폭력을 아주 초기부터 경험했고, 5월 27일까지 이어진 열흘간의 항쟁은 물론 그 전후 상황도 직접 겪었다.

특히 한국어에 능숙했던 그는 힌츠페터와 같은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단순히 항쟁을 목격하는 것을 넘어 직접 피해자들을 도왔다. 인터뷰에서 팀 원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This is general citizens. Everybody was out now. Everybody was angry, people had been hurt. (...) So I was helping the injured off the street.
(이들은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모두가 거리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분노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다친 상태였습니다. (...) 그리고 저는 거리에서 부상자들을 옮기는 것을 도왔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광주YMCA 인근)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 ⓒ 나경택 제공


팀 원버그가 들것을 든 채 금남로를 지나는 모습은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기자의 사진(위)에 여실히 남아 있다. 이처럼 환자를 이송하고 피해 상황을 살피기 위해 팀 원버그는 전남대병원을 자주 찾았고, 옥상에서의 인터뷰도 이 과정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나 기자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는 "(사진 속 외국인은) 공수부대에게 맞을 각오로 저렇게 했던 것"이라며 "그런 마음, 그 용기를 보며 사진기자로서 '저건 역사다'라는 생각으로 기록했다"고 전했다.

팀 원버그와 함께 들것을 들었던 노병유 당시 광주CBS 기자(위 사진 하얀 상의) 또한 "그때 원버그의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라며 "그 또한 얼마나 무서웠겠나. (그럼에도) 자기 목숨을 내건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카메라 앞에 선 이유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의 위르겐 힌츠페터(왼쪽 카메라를 든 인물)와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가운데 체크무늬 셔츠)의 모습. 그의 뒤편에 또다른 단원 폴 코트라이트와 데이비드 돌린저가 서 있다. ⓒ 5·18기념재단 제공


인터뷰 당일 찍힌 사진(위) 또한 여전히 남아 있다. 가운데 선글라스를 쓴 체크무늬 셔츠의 외국인이 팀 원버그이고, 맨 왼쪽 카메라를 든 이가 힌츠페터다. 그의 인상착의가 인터뷰 영상 속 모습과 같다.

오른쪽 끝에 선 또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는 그때를 선명히 떠올렸다. 평화봉사단원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데다 상황 또한 매우 위험했기에, 처음엔 누구도 선뜻 인터뷰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팀 원버그가 나섰다.

데이비드 돌린저는 광주가 "팀의 도시"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시 힌츠페터의 인터뷰 요청에) 우리는 팀을 내세우며 그가 이번 일을 가장 가까이서 겪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면서 "광주 시민들은 같은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팀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오른쪽)와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이었던 고진석(현 고진석의원 원장)씨. 귀국 후 의대에 진학하고자 했던 팀 원버그는 전남대 의대 학생들과 자주 의료 봉사를 다녔고 가깝게 지냈다. 고씨는 이 사진을 두고 "양림동 우리집 골방에서 찍은 것 같다"고 떠올렸다. ⓒ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평범했던 청년 팀 원버그는 이처럼 광주를 덮친 국가폭력을 미처 피하지 못했고, 애써 피하지도 않았다. 그가 자주 찾은 음악감상실의 DJ였던 이흥철씨는 항쟁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씨는 "팀을 보자마자 '어? 왜 못 도망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때 저는 가두방송 차량에 탑승해 있었는데 팀이 '궁금하다'고 해 차에 태우고 광주 외곽 지역의 처참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 말했다.

또 "그날 저녁 팀이 '따라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숙소에 외신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인터뷰를 하거나 얼굴이 알려지면 위험했기 때문에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한 뒤 나왔다"라며 "당시 팀은 광주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 더 잘해 줄 걸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덧붙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기록한 광주 동구청 일지. "CBS 노병유(보도부 차장), 미국인 1명. 남자 1명 머리 박살. 단가(들것을 뜻하는 '담가'의 오기)에 싣고 관광호텔 쪽으로 감"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의 "미국인 1명"이 팀 원버그다. 2026. 03. 11. ⓒ 강상우


평화봉사단을 연구해 온 서나래 한국교원대 학술연구교수는 "당시 주한 미 대사관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에게 '돌아다니지 말라', '즉각 미 문화원 광주분원으로 모이라'고 했지만 (팀 원버그와 동료들은) 광주에 남았다"라며 "이들에게 광주는 위험한 곳, 낯선 곳이 아니라 본인이 살던 곳이자 이웃과 친구들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경남 전 연구실장도 "광주 사람들과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연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 꿈 접고 그가 택한 길

의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팀 원버그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며 의료 봉사에 적극 나섰다. ⓒ 록산 원버그 윌슨, 폴 코트라이트 제공


팀 원버그는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평화봉사단에 지원해 의료 분야에서 활동한 것도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을 겪은 후 그는 삶의 방향을 바꿨다. 고립됐던 광주를 위해 증언과 자료를 모았고 이를 다른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건네 스웨덴 등에서의 외신 보도로 이어졌다.

제임스 메이어(James Mayer) 당시 평화봉사단장은 이 사건을 "말 그대로 폭탄(It was like a bomb)이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당시 외무부 기밀문건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문건을 살펴보면 한국 외무부는 주한 미대사관 관계자와 메이어 단장을 불러 항의했고, 이를 내란 우두머리 전두환이 수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주요 부처는 평화봉사단 파견 중단을 검토하기도 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시민들이 사망자의 시신을 트럭으로 옮기고 있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메이어 단장은 "아직 대통령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두환은 군 내부에 있으면서 이 일이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팀 원버그로부터 자료를 받아 직접 스웨덴으로 건너갔던 캐롤린 투르비필(Carolyn Turbyfill)은 "팀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세상에 알리려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 주한 미대사관마저 그를 위축시켰지만 물러서지 않았다"며 "저는 두려웠지만 팀 덕분에 스웨덴까지 가서라도 광주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이어갈 수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1987년 한국학 학술지에 실린 팀 원버그 논문의 원본. 2026. 03. 04. ⓒ 이희훈


특히 의대 진학 대신 한국학을 전공하기로 한 팀 원버그는 하와이대학 대학원에 입학했고 1987년 < 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영어권 최초로 5·18을 다룬 이 논문을 통해 당시로선 '폭동'으로 취급되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서나래 교수는 "실제 이 논문은 출간된 이후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논문과 책에 인용됐다"라고 강조했다. 논문엔 팀 원버그의 통찰력이 담긴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Their victory, however, may yet prove Pyrrhic. Arendt observes that "to substitute violence for power can bring victory, but the price is very high, for it is paid not only by the vanquished, it is also paid by the victor in terms of his own power.
(하지만 그들(신군부)은 결국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권력 대신 폭력을 내세우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대가가 매우 크다. 패자뿐 아니라 승자 역시 자신의 권력을 잃는 형태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광주 닮은 그의 고향 미네소타

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 간호사)가 ICE(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요원들의 집중 사격으로 숨진 장소(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 그를 추모하는 팻말과 꽃, 각종 물품이 놓여 있다. 2026. 03. 02. ⓒ 이희훈


팀 원버그가 나고 자란 미네소타의 2026년은 광주를 닮았다. ICE(이민세관단속국)을 동원해 특정 지역을 겨냥한 국가폭력 그리고 이에 맞선 시민들의 연대가 46년 전 계엄군과 주먹밥을 떠오르게 한다.

<오마이뉴스>는 5·18 46주년 그리고 힌츠페터(2016년 작고) 10주기인 올해 미네소타를 찾았다. 미네소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이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지금, 광주의 미네소탄(Minnesotan) 팀 원버그, 미네소타의 광주사람 원덕기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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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내 이름은 원덕기 [5·18 46주년·힌츠페터 10주기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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