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한국판 롤리타 영화 <은교>

백조히프 2025. 3. 29. 23:50

 

한국판 롤리타 영화 <은교>

 

 

2013. 6. 1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과 아드리안 린 감독의 동명영화 <롤리타> 테마를 가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작가 박범신이 소설 <은교>로써, 또 이를 정지우 감독이 동명영화로 변형 부활시켰다.

 

 

 

12세의 앙증맞은 롤리타 대신 17세의 풋풋한 여고생 은교(김고은 분)가, 40대 후반의 불문학 교수 험버트 험버트 역에는 70세의 대시인 이적요(박해일 분)가 우선 대각구도를 이룬다. 여기에 극작가 퀼티의 포지션에 서지우(김무열 분)라는 이적요의 수행제자를 등장시켜 삼각구도를 형성한 뒤 각자가 결핍된 것을 갈구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갈등극을 연출한다는 것이 한국판 버전의 주요 골격이다.

 

 

 

70년대 중반 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등단한 작가 박범신은 자신의 노년 꿈을 상당히 투영시킨 70세의 이적요 시인을 통해 푸른 젊음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고 동경하는 노예술가상을 창조한다. 그 예술가는 어느 날 자신의 전원주택 작업장에 알바 일거리를 찾아온 여고생 은교를 보고 그 젊음의 현현체가 여기 나타났다 믿는다.

 

 

 

<은교를 처음 본 노시인이 그 푸른 젊음의 영롱함에 탄식과 숭배를 바치는데..>

 

 

또래 친구들에 비해 감수성이 남다른 은교 역시 시인의 서재를 치우면서 막연히 접해보고 싶었던 문학동네가 풍기는 ‘서권기’(書卷氣)에 점점 취하며 고고한 鶴과 같은 품격을 보이는 노대가에게 호기심 어린 호감을 키워간다.

 

 

 

은교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적요의 대학교양 강의를 처음 듣고 이 시인이 가진 문학적 소양을 어깨너머서라도 건져보려는 공대 무기공학과 출신 서지우는 노대가의 수발을 10년 이상 들고 있다. 노시인에게서 “별이면 다 같은 별인 줄 아는가?” 하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감수성이 무딘 서지우는 암만 노력해도 안되는 ‘재능없는 자’의 비애를 그냥 안고가야 하는 캐릭터이다.

 

 

 

그럼에도 노시인을 열심히 모시면 언젠가는 자신도 하늘이 도와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때를 만날 지 모른다며 그 시기가 자신의 수행 정성에 달려있다는 듯 최선을 다한다. 적요시인은 그가 문학적 재능이 없음을 진작에 간파했음에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진 자’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내치지 못하고 그냥 일상의 수행비서 정도로 거두어 준다.

 

 

 

 

그런데 은교를 보면서 이 발랄한 아이의 거침없음과 풋풋한 젊음의 향기에 서서히 혹하는 노쇠한 자신이 안타깝게만 여겨진다. 은교에게도 엄마와 편하지 않는 일상에 찌들리다 노시인의 집에서는 낯선 호기심의 세계가 더없이 편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서지우가 신처럼 떠받드는 시인이 자기에게는 천사나 요정의 흔적이라도 보는 듯 최상의 예우로 대해주니 별세계가 따로 없다.

 

 

 

적요시인은 어느 비오는 날 밤 엄마와 대판 싸우고 들이닥친 은교의 젖은 옷을 드라이기로 말려주며, 친구 집에 지금 가기도 그렇다는 말을 듣고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을 허락한다(어쩌면 내심 원하던 바이기도 했겠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은교가 자기 침대 이불보 아래에 파고 들어와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움과 야릇한 흥분이 교차되어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는데 서지우가 아침 수발을 들기 위해 찾아오자 이 짧은 꿈의 시간은 아쉽게도 종료된다. 그때 은교의 가슴 위에 새겨진 검은 새 문신을 보고는 나중에 이게 뭐냐고 물으니 얼마 있다 지워지는 일회용 문신인 헤나라는 대답을 듣는다.

 

 

 

또 한번은 세 명이서 근교 산행을 하는 중에 은교의 손거울이 서지우의 놀래킴으로 인해 절벽 바위 끝으로 굴러 떨어진다. 서지우가 달래기 위해 똑같은 것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은교는 엄마가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라 자기에게는 특별한 것이라며 잃으면 안된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때 노시인이 ‘공무도하가’에 나오는 절벽 꽃따주는 노인처럼 위험스레 내려가 그 손거울을 간신히 가져온다.

 

 

 

 

<헤나를 그려주는 중에 관능의 공기를 마시고 꽃음미 상상하는 적요 선생>

 

 

시인이 자신을 위해 큰 사고의 위험도 무릅쓰고 호의를 바친데 대해 은교는 감읍하며 며칠 후 보답하는 의미에서 헤나를 그려주겠다고 제의한다. 은교가 쑥스러워 하는 시인을 자기 무릎 위에 눕힌 채 헤나를 그리는 동안 시인은 농염한 관능의 공기를 마시며 살푸시 수면에 빠져든다. 꿈속에서 젊은 청년이 되어 살랑살랑 앞으로 뛰어가는 은교를 따라잡아 깊숙한 키스를 나눈 뒤 본격적인 꽃 음미에 들어간다.

 

아아,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섰으면 하는 중에 다 끝났다는 은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눈을 뜬 적요시인은 꿈에서의 아쉬움을 글로써 기술해 되새기려 한다.

 

 

스승이 어린 소녀에게 점점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을 감지한 서지우는 은교에게 “선생님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며 윽박지른다. 은교는 지우에게, 자신이 다 바친 세월에도 못 얻은 것을 짧은 시간에 쉽게 얻어내는 총애를 질투한다 여기고, 경멸감을 품는다. 스승 역시 젊음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자신의 플라토닉 러브 감정을 노친네의 추한 욕정으로만 간주하고 은교를 몰아붙치는 지우가 점점 멍청이로 여겨진다.

 

 

 

그러던 중 지우는 스승의 서재내 문갑에서 필서로 쓴 자그만 원고뭉치를 발견하는데 제목이 <은교>가 아닌가? 읽어보니 스승의 은교 숭배로 점철된 찬양문이지만 그 글의 내용과 표현이 예사롭지 않은 美文이라 대담하게 자기가 가로채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노시인은 이 글을 결코 대중에게 공개하지는 못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아는 출판계 선배에게 자신의 작품인양 하고 보낸다.

 

예상대로 이 소설은 출간하자마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며 서지우는 일약 인기성공 작가군에 편입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스승은 제자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며 마음 속으로는 사제의 연을 끊는다. 그럼에도 서지우는 스승이 성격상 ‘이 소설은 내 작품이요’ 하고 말하지 못할 것임을 굳게 믿고 이 소설의 문학 시상식에 노시인을 초대해 致辭까지 들으려 한다.

 

 

 

예상외로 수상식에 나타난 적요시인은 서지우의 예상대로 폭탄발언은 하지 않은 채, “너의 젊음이 네가 노력해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가 잘못해 받은 벌이 아니다”라며 늙은이에 대한 폄하적인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우회적 일침을 날린다. 하지만 우둔한 제자는 그냥 제자리를 빛내 준 스승의 아량에 기뻐하며 안도감에 빠진다.

​<제자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은교의 여우짓에 한숨을 내쉬는 적요 선생>

 

은교는 여전히 노시인의 품격을 높이 흠모하면서도 이런 문학계의 대가가 평범한 여고생에게 과분하게 보여주는 묘한 애정공세를 약간은 자랑스레 받아들인다. 다른 한편 경멸했던 서지우의 문학적 성취에도 일면 놀라움을 보이며 지금까지의 부정적 생각을 상당히 완화시킨다.

 

 

 

이쯤에서 소설과 영화는 반전적 클라이맥스로 접어든다. 적요시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은교가 찾아와 생일차림 준비에 한껏 곰살스러움을 떠는 중에 밉생이 제자도 술 선물 하나 들고 쭈삣쭈삣 스승을 찾아온다. 그냥 형식적 인사만 하고 가려는 제자가 그 순간 안되어 보였던지 노시인은 “같이 술 한잔 하고 가게” 하며 더 머물 것을 허용한다.

 

자신의 복권을 더없이 기뻐하던 서지우가 혼자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언성이 높아지자 시인은 피곤해 먼저 잘테니 둘이서 마무리 지으라 이르고는 자리를 먼저 뜬다. 은교가 침실까지 보위하듯 따라와 잠자리를 살펴준다. 어두컴컴한 침실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은교의 손을 노시인이 불현듯 잡아채자 두 사람은 무언가 찡하고 통한 듯 아무 소리없이 편안한 포옹을 나눈다. 그러면서 은교는 침상에 앉은 시인의 이마에 존경과 사랑을 듬뿍 담은 입맞춤을 바친다.

​<은교와 가장 뿌듯한 순간을 가진 후 파국으로 돌입 >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뒤로 하고 잠이 든 시인은 자다 목이라도 말랐는지 설핏 일어난다. 그런데 뭔가 요상한 기운이 느껴져 아래채 거실을 보니 술자리는 파했는데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그 어떤 직감이 꽂혀 내려와 창고에서 사다리를 가지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간다. 서지우가 숙식하는 방에 불이 켜져 있어 밖에서 가만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아뿔사 가장 상상하기 싫어했던 광경이 펼쳐지지 않는가..

 

자신의 순결한 신부 은교가 평소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던 제자에게 온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본 듯 후회막급의 심정을 억누른 채 분노의 화신이 된 스승은 고귀한 신부를 더럽힌 놈을 어떻게든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내려와 자신이 ‘내 당나귀’라고 부르던 갤로퍼 차의 바퀴축 나사를 헐겁게 풀어놓는다. 이 차를 타도록 서지우의 차는 펑크를 내어 놓은 채..

 

 

 

아침이 되어 귀가하려던 서지우는 스승의 예상대로 당나귀로 갈아타서 몰고 나간다. 가다가 핸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음을 발견한 지우는 차를 정비센터로 끌고 간다, 거기서 누군가가 나사를 의도적으로 풀어놓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는다. 직감적으로 스승의 소행임을 알아챈 지우는 극도의 흥분 속에 스승에게 따지러 다시 돌아서 찾아간다. 앞에 느릿거리는 트럭을 급추월하려다 맞은 편에서 오던 차와 정면충돌해 길옆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진다.

 

 

 

아마 세 사람 중 가장 슬픈 ‘재능없는 자’의 역을 맡았던 서지우는 소설 원고에 이어 탐해서는 안되는 스승의 과실을 훔친 죄로, 스스로는 왜 죽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어이없는 횡사의 비운을 맞는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자기가 계획했음을 알려주는 적요시인의 음성 메시지가 은교에게 전달된다.

 

 

봄이 되어 대학에 진학한 은교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은교>라는 작품이 수록된 (소설에서는 사건 수임 변호사가 알려줌) 문학동네 책을 보고 이 글이 노시인 할아버지가 쓴 것임을 비로소 알아챈다. 그리고는 한동안 뜸했던 시인의 집으로 찾아간다.

 

제자를 죽인 이후 적요시인은 스스로에게도 사형선고를 내려 식음을 전폐하고 깡소주만 마시는 폐인이 되어 세상과의 작별 시간만을 기다린다. 은교가 집안으로 들어서니 모든 곳이 엉망진창 어지러진 채 악취가 진동하는 폐허의 냄새가 엄습한다. 방 한쪽 구석에 할아버지가 죽은 듯이 등을 돌리고 누워있다. 인사말을 걸어도 전혀 반응이 없다.

 

 

 

할아버지가 곡기와 함께 말의 길도 닫았음을 알아챈 은교는 그 뒤에 같이 누워 “할아버지, 절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줘 너무 감사해요.. 전 제가 그렇게 예쁜 아이인 줄 미처 몰랐거던요. 부디 안녕히 계세요“ 라고 하는 인상적인 하직 인사를 고하고 가져온 안개꽃을 머리맡에 놓은 채 자리를 조용히 뜬다. 떠난 것을 감지한 노시인이 눈물을 머금으며 ”잘 가라, 은교야“ 하는 엔딩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씬에서 계속해 들리던 연리묵의 <말은 못하고>의 피아노 멜로디가 어찌도 그리 처연한 우아함으로 다가오든지...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것(134만 관객 동원)은 주류 관객층인 2, 30대의 보편적 정서에 뭔가 바로 와 닿지 않는, ‘어린 소녀와 노년의 에로스’라는 테마가 그 어떤 불편함을 주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영상미학적으로나 남녀사랑의 다양한 변주면에서는 상당히 잘 다듬어진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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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토] 2013-06-18 16:14:14

김박사,

덕소에서 며칠 개기며(?) 회사를 위한 새롭고 창의적 사업구상

마이 했능교?

웹에 글/사진/영상/도표 들을 올리는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 하는구료.

언젠가는 옥자 실력에 버금갈 수 있도록 같이 열심히 노력합시다.^^

앞으로 본 글처럼 누군가가 주요 장면들을 하나하나 발췌해 보여주며

영화를 세밀히 풀어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굳이 힘들게 영화보러 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렵게 보내준 이전 롤리타 영화 다시 잘 감상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삼각구도 관계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

분별잃은 질투심에 어느 한쪽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점 등이

정확히, 영화 '은교'가 '한국판 롤리타' 라는 김박사의 주장에

동의하게 만드는군요.

김박사의 해석을 듣고나니 박범신이 소설'롤리타'의 전체 구조를

표절한게(?) 아닌가하는 추측마저 듭니다. 물론 은교가 소설이나

영화 모두에서 한단계 수준높게 다듬어졌다는 인정은 됩니다만-

김박사의 글을 보고난후 영화 은교의 OST 음악을 찾아서 몇 들어보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피아노 멜로디를 '처연한 우아함'으로 받아들인 김박사의

감성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는 김박사로부터 말을 듣기전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미국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음악과 더불은 마지막 씬이 참으로

소름끼칠 정도로 비장감이 있었다는 언급을 한 적도 있지요?

 

올려진 글 잘 읽었습니다.

감성/정서 풍부한 아름다운 마음을 부러워하며-

 

[김재민] 2013-06-19 11:50:42

 

서토도 요 며칠 잘 지내셨능교?

나는 일주일 내내 집에서 책 좀 읽고 롤리타와 은교 글 등을 작성하며 마트 등에만 오가다 오늘 오후에 울산으로 내려가기에 모처럼 어제 저녁 강주필, 박상국, 이종윤 오리선생, 그리고 박사장 처남형님(경고 21회)과 잠실에서 합류하여 저녁 한 그릇 같이 했심다. 오리선생과 처남형님이 1차 후 귀가한 뒤 어디 가서 간단한 입가심만 하고 자리 파하자 했는데 결국 오징어구이집, 커피집, 스탠드 바까지 순례하며 새벽 2시까지 방담하는 수순을 밟았네요..

좀 늦게 읽어나서 여기 들어와 보니 서토가 감당하기 어려운 격려사 글을 또 길게 올려놨구랴.. 너무 지나치게 띄워주니 이 글 같이 보는 우리 동기들이 "저것들 또 사귀는 분위기 조성하네.. 눈꼴시어 못 봐주겠구만.." 하는 소리가 바로 귓전으로 파고 드는 듯 함다..

사실 소생은 서토가 생각하는 그런 감성이 풍부한 인종이 못되네요.. 실제로는 집에서 와이프, 둘째 아들놈과 감성적 터치의 드라마나 영화를 같이 볼 때마다 그 어떤 삐딱이 기질이 발현되어 그 허구성을 한참 과장하여 지적질 하기에 와이프는 "야이 낭만의 파괴자, 도살자야!.. 같이 못보겠다.. 자리 좀 비켜도!.." 할 정도로 진상으로 찍힌 지 꽤 오래 됨다..

그러니 서토도 나를 너무 낭만주의의 사도인양 간주하는 것은 엄청나게 본질을 호도하는 것임다.. 제발 다시 제자리로 보내주면 아주 고맙겠네요.. 그래도 서토같은 묻지마 팬(?)이 있어 항상 든든함다.. 힘자라는 데까지 자료들 많이 찾아 열심히 글들 소개해 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