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리뷰
2013. 7. 27
요즘 들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초연된 70년대 초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파격적 섹스씬 연출과 허무 스토리가 펼쳐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그 시대적 배경 조망을 통해 상당 부분 공감을 표하게 된다. 세상의 체제반전을 꿈꿨던 유럽 68세대의 이상이 허무하게 사그러든 1970년대 초의 파리(Paris)로 상징되는 그 닫힌 삶의 공간에서 무슨 낭만적인 사랑노래나 희망의 꿈열매가 다시 자랄거라 기대할 수 있었을까?
68세대의 시대정신에 깊이 심취했던 젊은 베르톨루치 감독이 꿈이 꺾인 자신의 스산한 내면을 옮겨담은 게 역력한 이 영화는 삶의 돌파구가 없어진 주인공 폴(마론 브란도 분)이 익명간의 파격적 섹스를 통해서라도 그 어떤 소통로를 찾고자 하나 결국은 거부를 당한 채 쓸쓸히 죽어가는 삶의 한 삽화상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뭉크의 절규 그림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폴이 지나가는 전철 소리에 머리와 귀를 싸매며 그 어떤 절망감의 고통에 휩싸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다시 제 길을 가는데 여주인공인 잔느(마리아 슈나이더 분)가 폴을 이상하게 여기며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거처를 구하려 어느 아파트의 방들을 둘러보다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아까 길에서 짧게 봤던 폴이 먼저 와 뒤켠에 앉자 있는 게 아닌가.. 단답형 대화를 잠깐 나누다 나가는 듯 하던 폴이 돌아와 잔느를 거칠게 한구석으로 몰아 섹스를 요구한다. 이상한 분위기에 감전된 듯 잔느는 별 저항도 하지 않고 익명의 남자와 얼떨결에 섹스를 나눈다. 다짜고짜 격렬한 행위를 마친 두 사람은 가벼운 통성명도 없이 각각 따로이 거리로 나선다.
잔느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로 약혼자 톰에게 안긴다. 폴은 아내가 자살한 여관으로 향한다. 장모는 폴에게 딸의 자살 이유를 묻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내 로자가 마르셀이란 정부에게 최근 수년간 자신의 것과 똑같은 잠옷 및 술을 제공하며 이중으로 살았다는 사실 뿐이다.
얼마 후 그 아파트에서 또 아무 약속 없이 조우하게 된 두 사람은 이번에도 자동기계처럼 한차례 정사를 치룬 뒤 잔느는 폴에게 묻는다. "왜 날 알고 싶어하지 않아요?" 하자 "난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넌 이름이 없고 나도 없어. 우린 모든 걸 잊는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폴은 아내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 가져다 준 절망과 고독을 철저한 익명성 속에 헤쳐나가려 한다. 어쩌면 5년 간 같이 살았던 아내가 정부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감지한 순간부터 더 큰 좌절과 회의에 빠져 세상과 사람과의 관계를 증오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잔느라는 자기주장이 강한 젊고 앳띤 여자를 만나 도발적인 섹스에 탐닉하며 세상 속의 벽을 더욱 더 높게 세운다. 말하자면 폴에게 섹스란 존재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정사를 갖는 그 순간만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폴의 입장에서 이 깡마른 정사는 쾌락이나 유대감보다는 고통스런 자기확인 만을 요구한다.
한편 잔느의 애인인 톰은 잔느의 기록 영화를 찍는다며 열심이지만 정작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른다. 어느 날 잔느는 톰으로 부터 청혼을 받고 폴의 아파트를 찾아가지만 그는 없었다.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진 그가 갑자기 그리워져 그를 찾아 일시적이나마 헤맨다. 뭔가 일탈의 자유를 느끼게 해준 그 이상한 중년 미국인과의 성적경험이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는 이제 사라졌다 여겨지기에 더욱 아쉽게 다가왔으리라.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만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센 강변을 걷는 잔느 앞에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폴이 나타난다. 갑자기 밝아진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폴에게 잔느는 "우린 이제 끝났어요" 하며 차갑게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폴은 이전과 달리 "끝났기에 새로 시작할 수 있지" 하고 유들유들하게 반응한다.
자기는 작은 여관을 하나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처분한 뒤 잔느와 함께 시골에서 목가적 삶을 갖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쟌느는 시골생활이 싫다고 밝혔지만 폴이 술이나 한잔하자는 청은 거절하지 못한다. 술집을 찾아가니 마침 거기서 탱고 페스티발이 벌어지고 있다.
계속 쟌느를 설득하고 거절이 오가는 실랑이 속에 폴은 잔느에게 "탱고는 하나의 제례의식이야.. 우리도 춤추자" 하며 홀 중앙으로 데려간다. 폴의 평소 기벽이 술기운을 빌어 다시 튀어나오며 패스티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제지하는 주최측 요원들에게 폴은 자신의 엉덩이까지 까보이면서 조롱하는 온갖 진상을 떤다. 잔느는 폴의 이런 안하무인적 태도와 집착어린 광기에 갑자기 질려 도망치지만 그는 잔느의 집까지 쫓아간다.
하지만 잔느는 방까지 따라와 자신을 껴안으려 달려드는 이 남자가 익명성을 포기하고 진지함과 집착을 동시에 보이자말자 왜 그리도 두렵고 혐오스러워 보이는지 군인아빠가 남겨놓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다.
총을 맞은 폴은 "내 아이들, 내 아이들..." 이라는 웅얼거림을 내뱉으며 발코니 쪽으로 다가가 씹던 껌을 뱉어 붙여놓고는 천천히 웅크린채 죽어간다. 그러자 쟌느는 "난 저사람 몰라. 날 겁탈하려 했어. 난 저 사람 이름도 몰라" 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 허망한 끝마침으로 가기 위한 장치공간으로서의 탱고장과 탱고라는 춤은 무엇을 상징했을까? 원래 탱고란 춤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간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수시로 파고드는 외로움과 박탈감을 떨치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다. 그래서인지 상체를 곧추세운 두 춤꾼이 펼치는 동작은 언제나 격렬하다.
외로움의 춤인 만큼 두 사람 간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될 뿐 결코 결코 가까이 밀착해 추는 춤은 아니다. 따라서 탱고는 열정적이긴 하나 외로움 속 갈망이 더 드러나는 춤인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중요 포인트는 파트너와의 호흡과 감정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탱고는 네개의 발 위에서 가슴이 하나되는 춤이라지 않던가..
탱고장은 소통을 꿈꾸지만 일정 선을 넘어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함을 탄식하는 인간군상이 부나비같은 슬픈 몸짓으로 자신을 내던지게 하는 마지막 공간을 제공한다. 아마도 베루톨루치는 이런 인간존재의 고독을 이 춤과 그 공간의 상징성으로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릇 모든 이상은 불가능을 지향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패배감을 겪은 68세대 베르톨루치에게 세상의 모든 믿음은 이제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그에게 오롯하게 남은 것은 아마도 자기경멸과 이런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의 교차가 아니었을까 싶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컬트무비답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소통을 거부하는 날선 존재들의 비참함으로 가득차 있다. 절망이 영혼의 무지개를 대신해 걸려있는 그런 갈회색 톤의 풍경화로써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이 영화에서 한줄기 빛처럼 가볍고 밝은 쟌느를 연기한 마리아 슈나이더는 정작 자신의 진짜 삶에서는 가볍지 못했다. 이 영화 출연의 명성에 눌려 더 이상 제대로 된 작품 속에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놓친 채 2011년 2월 58세의 나이로 운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한번 인생무상을 절감케 한다. 부디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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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토] 2013-07-29 17:52:11
이전 학창시절 이 영화를 보았고 그 이후에도 한차례 더 감상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작품의 의미와 윤곽을 온전히 잡지 못했는데 김박사의 해설을 읽으니 모든 것이 아주 선명해지는 느낌입니다. 영화의 장면들도 새삼스레 다시금 선명히 기억되어 옵니다.
해당 여배우가 근래 작고했다는 내용이 새로우면서도 무언가 가슴을 아리게 하는 여운을 남기는군요.
작품을 읽거나 보고 나름으로 이해/해석하는 일이 또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라 합디다만.. 작가나 해석자의 근본 취지에 동감할 수 있음은 누구 말씀마따나 감상자로써의 크나큰 행운이자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김재민] 2013-07-30 08:35:50
73년도던가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렀던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가 처음 언론지면들에 오르내렸을 때 우리국민은 그저 대부의 배우 마론 브란도가 체모를 다 드러낸 어느 유럽 신인 여배우와 화끈한 섹스씬을 보여줬기에 전세계적 화제작이 된 줄 알았지요.. 저 역시 그렇게만 알았으니 말임다..
그 당시 앙콤한 매력의 탈랜트 한혜숙이 파리로 우리영화 찍으러 갔다 이 문제작을 보고난 감상기를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약간은 자랑스럽게 밝혔을 때 "와, 한혜숙이는 참 복도 많다!" 하고 입맛을 다시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아마 다른 동기들도 나와 거의 같은 생각들이었으리라 짐작됨다.. 비슷한 케이스로 70년대 후반 네델란드 여우 실비아 크리스텔이 주연한 <마담 엠마누엘 1>도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보였으리라 여겨지고요..
<파리에서 탱고>는 독일시절 비디오와 TV영화를 통해 봤지만 마리아 슈나이더와 마론 브란도의 크게 이해 안되는 과감 성애장면들만 열심히 챙겨보느라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인, 암울한 사회분위기 속에 개인적 삶이 피폐해진 소통불능자의 고통 따위를 포착하는 것은 거의 안중에 없었지요.. 그래서 나도 서토처럼 이 영화가 왜 이런 제목 속에 다양한 암시들을 던지며 약간 지루할 정도로 모호하게 스토리를 끌어가느냐에 대해 많이 헷갈렸슴다.. 그 난해함을 엽기적인 섹스씬들로 커버하여 흥행성적을 올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베르톨루치라는 감독의 정치적 성향과 68혁명의 실패라는 당시 서유럽의 사회적 분위기를 늦게나마 이해하니 이 영화의 명작성에 대해 그간 품었던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게 됩디다.. 탱고라는 춤의 상징성도 이 감독이 적절하게, 그러면서도 번뜩이게 잘 활용했다 여겨지고요..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일약 세계적 유명세를 탄 마리아 슈나이더가 소위 '2년차의 함정'에 빠져 더 이상 연기파 배우로써 빛을 보지 못한 채 후속작품들의 흥행실패와 함께 쓸쓸한 말년을 맞았다는 사실은 전형적인 'Easy Come Easy Go'의 사례라 아니할 수 없심다.. 나도 노년 사진 보고 깜짝 놀랐네요.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용모가 저 지경으로 바뀌었을까 하고요..
베르톨루치 감독의 꼬임연출에 솔깃한데다 마론 브란도라는 대배우와의 상대역이 된다는 그 어떤 강박감이 19세의 신인여우를 시대를 한참 앞서간 정사씬에 결국은 동의하게 몰아갔을거라 짐작됨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는 그후 화끈한 정사씬들만 강조되는 후속작들이 제의되었고 이를 탈피하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실패했다는 보도들이 나타납디다..
오죽했으면 말년에 자신은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생각한다고 고백할 정도였슴까?.. 이 영화 이후로 베르톨루치와 슈나이더는 한번도 만나지 않고 원망을 품은 채 세상을 떳다 하네요.. 참 인생만사 새옹지마이고 길흉화복은 돌고돈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또 한번 일깨워 주는 듯 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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