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이해

6주차 과제: 이완용의 매국행각 역정과 배경

백조히프 2021. 4. 28. 22:24

6주차 과제: 이완용의 매국행각 역정과 배경

 

 

제출자: 김재민(법학과 2, 10201917)

과목: 역사의 이해

담당교수: 윤영인 교수

 

아래 동영상의 핵심 내용을 2문단 정도 (700자 이상)로 요약하여 (워드 혹은 한글로 작성) 온라인 과제 창에 제출하세요.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47]

 

https://www.youtube.com/watch?v=jRF3S7DX2nk

 

 

이완용(1857~1926)의 매국행각 역정

 

- 몰락 양반의 자제로써 출세욕 충만

 

* 가세가 몰락한 잔반의 자제로 출생한 이완용은 10세 때 당대의 세도가 이호준의 집으로 양자 입양되자 좋은 입신출세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과거준비를 하여 급제를 함

* 깔끔한 외모와 머리회전 빠른 상황판단력, 상전을 잘 받드는 싹싹한 처세로 고종의 눈에 들어 측근으로 근무하며 청년 외교관료들을 양성 교육하는 육영원에 입소하여 엘리트 외교관료로의 성장코스를 밟게 됨

* 일본의 내정간섭에 시달리던 고종은 러시아와 미국을 끌여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책략 속에 미국 파견 외교사절단에 이완용을 집어넣어 친미파 전문가로 육성하려 함

* 이완용은 1년여 미국에서 외교사절로 근무하며 서구중심주의자로 변모한 뒤 미국의 정치, 사회경제, 문화적 파워와 국제열강 간의 세력균형 게임에 대한 촉감을 기른 채 귀국함

 

- 국내에서 고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매국행로 개시

 

* 귀국한 뒤 미대사관 허버트 알렌 참사와 교분을 쌓으며 친미파의 대표성을 획득한 뒤,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의 아관파천사건을 주도하여 왕의 총애가 더 깊어짐

* 하지만 자신은 조선의 국운이 이미 쇠했다는 판단 속에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 쳐줄 세력과의 연줄 확보를 위해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열강 간의 각축세를 끊임없이 분석하며 기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섬

*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의 힘이 더욱 세어지자 이번에는 고종이 미대사관으로 피신하며 일본 견제책을 구사하려 했으나, ‘태프트-카스라밀약으로 미국이 조선을 버렸다고 파악한 이완용은 일본세로 갈아타기 위해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접근함

 

* 많은 내각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명분론보다 국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강력한 일본에 기대어 사직을 보존하는 것도 일책이라고 주장하며 히로부미의 을사조약을 유일하게 적극 찬성하며 그의 호감을 크게 사는 동시에 고종을 겁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성사시킴

* 기왕지사 매국의 길로 들어선 이상 히로부미의 앞잡이 역을 마다않고 받아들여 고종의 퇴위 주도와, 군대해산을 행한 뒤 1910년 한일합방 조약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매국행각의 정점을 찍고는, 국내 테러를 당하면서도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의인으로 추앙받음

* 일본왕실로부터 후작 작위와 요즘 돈 50억원에 해당하는 은사금을 받은 뒤 전국에서 1,570만 제곱킬로의 토지를 사유화 하며 떵떵거리다 19262월 민족에 대한 회한의 반성 한 점도 없이 지병으로 사망함

 

국민 매국노 이완용이 된 사고관 배경

 

- 출세지향 욕구와 빈곤한 철학관

 

* 잔반의 후손으로 운좋게 명문 세도가에 입양되자 미천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강한 자들(서구세와 일본)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욕구에 충만한 채 입신양명의 길을 한평생 줄기차게 달리기만 했음

* 인문학적 공부보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고시공부에만 급급하여 바라던 관료사회에 진출했으나, 어떤 상황에 처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아가야 할 올곧고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함이 없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자신을 구명하려는 난관돌파책 추구에만 급급함(동서고금에서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음)

 

* 어떤 이상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소멸시킬 수도 있는 역사적 충신열전이나 칸트의 실천이상비판같은 도덕철학 같은 것을 한번도 접해보지 않는 인간들처럼 이완용도 살아 생전에는 떵떵거렸겠지만, 죽어서는 전국민의 대표 역적으로 영원히 회자되는 실패한 삶의 원형으로 전락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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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영

첫댓글 21.04.28 22:57 새글

난 이 완용 李哥가 아닙니다.본관이 龍仁입니다.
(누가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김재민

11:14 새글

길영공, 오랜만이요.. 잘 지내시능교? 싸모님도 여전하시고.. 난 허리통에서 파생된 오른쪽 허벅지의 우리~한 통증으로 바깥 출입을 최대한 줄이고 집에서 사부작거리는 생활을 근 한달 째 하고 있소이다. 다행히 더 악화는 되지않아 그런대로 며칠 전부터는 헬스 가서 3~40분 정도 살살 움직이는 운동은 하고 있네요.

이완용이 본관이 어딘지는 나도 궁금하네요.. 70년대 TV 드라마 인기작가였던 이서구든가 PD였던 이항구씨가 그 손자였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네요.

 

이길영

10:30 새글

@김재민 이 완용이는 전주 이씨입니다.

 

백민호

08:21 새글

이완용 후손들 소유 토지는
몰수 했는지
그것도 조사 해보시지요?

 

김재민

09:33 새글

뉴스 보도를 보니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들이 물려받은 토지재산을 일부는 판결에 의해 국가가 몰수한 사례도 있다 합디다. 사필귀정이라 여김다.

 

백민호

10:25 새글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 되찾기 사례도 있네요.

http://omn.kr/743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353

 

김재민

13:33 새글

허어 참, 이완용의 직계 증손자라는 이윤형이라는 자가 참 역사의식과 민족 매국노의 후손이라는데 대한 수오지심은 눈꼽만큼도 없는 탐욕적인 식충이 같구려.. 거기에 기생해 피빨아 먹으려는 변호사 나부랭이들하고는.. 예라이..

뭐라 할 말이 없심다. 앞 뒤 사정 같은 것은 전혀 도외시한 채 '계약은 지켜져야 하고, 사적 재산권도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져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민법 논리에 기대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날파리처럼 달려드니 어이가 없네요.

불법적인 계약은 원천무효이고, 사적 재산권도 공공성과 적정한 균형을 유지해 행사되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법판관의 손님실수라는 요행을 바라며 대리인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법전문가놈들이 더 밉심다. (하기사 이런 놈들이 진행형으로써 지금도 도처에 깔려 있으니..)

 

이길영

10:31 새글

친일파 토지는 서울시 공무원들이 아주 오래전에 다 해처먹었습니다.

 

김수인

11:59 새글

어차피 나이들면 빈손으로 땅에 묻히는데 부귀영화 얼마나 누린다고...
좋은? 머리를 나라 구하는데 썼으면 지금껏 교과서에 실리고 국민적 추앙을 받을건데...인간의 욕심이란...

 

김의철

12:17 새글

저개인적으로는..그가, 상당부분 빈곤한 철학관을 가졌다는 김박사의 지적이 가장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이원균 선생님이 이완용에 대하여 상당한 시간과 열의를 가지고
말슴을 해주신 기억을 지니고 있는 바..

당시 대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막연히 지니고 있던 매국적 이완용을 말슴하지는 않았다 기억합니다.

당시 각료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인품과 실력이 뛰어났다는 말슴이었고..
당시 그로써는, 우리가 지금은 일본에 일단 굴복하는 것이 일단 큰 국가적 피해를 줄일 수 있고
또한 아울러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써..

그 개인 나름으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는 당시 그것이 유일할 길로 판단했기에
전국민적 반감을 무릅쓰고 자신이 독박을 쓰기로 했다는 식의 설명을 하신 것으로 기억함미다.

혹시 저의 이러한 기억과는 매우 다른 기억을 가진 동기들이 있는지 알고 싶네요.^^

 

김수인

12:41 새글

하, 나는 하나도 기억 안나는데 서토는 기억력이 비상하시네...이원균 쌤의 견해도 인정할 부분이 있네요. 어차피 역사엔 가정이 없으니 결과가 모든 걸 말하므로 뭐가 옳다고 결론 내리기 쉽지 않죠.
그래도 이완용이 지 부귀영화를 던지고 애국하는 쪽으로 매진했었어야 사관들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기울었을듯.

 

 

김재민

12:48 새글

아마 그 얘기는 소수적 견해를 살펴보기도 좋아한 이원균 선생의 볼테르식 관용정신의 소치일 것 같기도 하네요. 만사에서 빛과 그림자 양면을 다 살펴보자는 균형적 시각을 옹호하던 이 선생이 이번에는 의뢰인을 이완용으로 하는 변호인의 입장에서 이런 이바구를 당시 우리에게 설파한 듯 함다. (소생은 2-3반, 3-6반 출신이라 이 선생 국사 강의시간에 이 소리를 같이 들었는지 기억이 아물사물하네요).

아무튼 아무리 이완용의 내면입장도 살펴보는 관용정신을 발휘한다해도 대다수 역사가들이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시대정신'을 두루 살펴본 뒤 그를 '국민 매국노'로 판정한 이상, 아마 살아서 법정에 섰다하더라도 극형에 가까운 엄벌을 면치 못했을거라 여김다.

김수인

21.04.29 13:46 새글

@김재민 그래 말이요. 김재규처럼 극형에 처해졌겠죠...
김재규는 분노 조절 장애로 국가원수를 총살했지만 유신독재를 중단시킨 엄청난 공로가 있는데 급하게 사형시킨건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

 

김의철05:58 새글답글기능 더보기

  • 역사에 가정이 없는 것이고 또한 김박사의 지적이 맞겠지만..이원균 선생님 평소 연구행적으로 보아..
    당시의 사료와 자료를 소상히 살펴보아 내린 나름으로의 결론이리라 공연히 생각해 봄미다.

    또한 당시 이완용 자신도 지혜가 남달라...스스로 독박이 될 줄을 알고서 행한 회심의
    결단(?)으로 간주해 줄 수도 있으리라 봄미다.

    그에게 부귀영화가 온 것은..애초 그것을 탐했기 때문이기 보다는, 독박을 각오한 그러한
    결심에 따라.. 자연스레 따라오게된 부로 또한 간주할 수도 있겠지요.

    저승의 이완용은 지금도..자신의 묘가 파헤쳐지고..강력한 비난과 더불어, 자신이 가졌던
    모든 부가 흩어지는 상황을 바라보며..자신에 대한 독박 예측이 정확했음에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을 지도-

    또한 조선이...자신의 예상대로.. 이후의 후일이 도모되어..지금은 일본을 무시하며
    일본에게 점차 호령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음에 기뻐하고 있을 지도 -

    또 한 편으로는..자신이 택한 방안 외에, 진정 어떤 방도의 다른 선택안들이 그 당시
    있을 수가 있었겠는지..지금의 후대들에게 지속 질문을 던지고 있을 지도 - ^^
  •  
  • 김재민21.04.29 20:39 새글답글기능 더보기
  • 서토의 삐딱이 똥고집이 유머러스하게 발현되는 것 같소이다. 음모론 및 소수견해의 신봉과 반어법의 권위자답게 이완용으로 빙의하여 '당시 나는 숙고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긴 호흡으로 한신이 가랑이를 기듯 국토와 민족 보존을 위해 총대를 맸던게야.. 이몸 덕에 한국이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성장해 한일 역전극이라도 펼칠 수 있게된 것임매.." 하는 내면을 읽을 수도 있었다는구려.

    참으로 견강부회의 극치같은 생각으로 내게는 여겨짐다. 이거슨 아닌 듯 하외다. 이완용이는 소인배로 자신의 영화만 추구했지, 아래 모재도 설파했던 바르게 배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의'라는 것을 배운 적도 느낀 적도 없이 한평생 살다간 미천한 필부에 불과했다 여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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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의철06:19 새글답글기능 더보기
  • @김재민 댓글에 대한 김박사의 반박내용이 아주 이성적이며 적확한듯 하여 보기에 좋군요.
    말슴대로..이완용의 입장에 서서, 그에 빙의된듯한 정황에서 그의 주장을 한 번 적어보았습니다.^^

    유서깊은 오랜 역사의 나라가 어이없이 넘어가게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하겠는 바..
    당시 권력을 지닌 사대부들의 입장과 더불어..이후로 현재까지의 권력층 입장에서는..

    이완용을 비롯한 몇 사람들에게 보다 비중있는 잘못과 책임을 덮어씌워..
    그러한 귀책점을 마무리라도 해놓아야 하는 입장이엇으리라 또한 생각해보게 됩디다.

    권력층 = 명리학 / 이완용 = 실학 이란 구도는 또 어떨지..모재께 한 말슴 부탁함미다 - ^^
  • 김강호21.04.29 19:13 새글답글기능 더보기

  • 이완용의 과거급제와 수오지심을 언급한 김박의 견해에 첨언하면,

    이완용이 과거급제를 했다면 일단 전통유학의 기본은 학습했다고 할 수 있겠슴미다마는 그 가운데서도 기본이 되는 동양 인문학 정신인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의 정신을 실천하지 못한
    천추의 한을 남긴 거지요.

    특히 나라의 고위관리로서 외교를 담당한 외무관리라면, 개인 간에도 중차대한 가치인데,

    하물며 국가 간에 의(義)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각하지 못한 그 천박한 유학자의 말로를 우리는 역사적 교훈의 푯대 위에 매달아 세워놓고 있는 셈이지요.

    천추(千秋)에 잊지 못할 그 오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유학의 핵심인 인의예지 4덕 가운데서도 맹자가 그처럼 강조한 의(義)의 정신을 자각하고 실천하지 못한 이 이완용의 담론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항상 마주하는 의(義)와 비의(非義)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의(義)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군자(君子)이자 대장부(大丈夫)의 삶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해봄미다.
  • 남영복21.04.29 21:21 새글답글기능 더보기
  • 이 완용에 버금가는 매국노 송 병준에 관한 일화를 올립니다. 한번 판단해 보시기를... 여러 의견이 있을 듯 합니다.
    한일합방 직후 송 병준을 처단하기 위해 손 병희가 보낸 자객에게 송 병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자네는 나를 욕하거나 칼로 찌르기보다 테라우치(조선 총독)나 카츠라 타로(일본 수상)를 찔러라. 그렇게 해서 한국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을지 어떨지 시험해 보는게 어떠냐? 지금 일본군이 우리 한국을 공격해 오는 경우 자네 같은 애국병사가 몇만명, 몇십만명 있은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청나라와 러시아를 패퇴시킨 군대이다. 우리 동포에게 전쟁의 참화를 입히지 않는 방법은 와신상담, 괴롭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당분간은 일본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무관 출신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퇴각이나 항복도 병가의 상사이다. 몇만명이나 되는 부하를 승산 없는 싸움으로 개죽음시키지 않는 것이 지휘관의 의무이며 현명한 위정자의 책임이다. 나도 괴로워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한일합방이었다"
    자객은 송 병준의 말에 설복되어 처단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 김재민21.04.29 22:51 새글
  • 남교수, 잘 지냈능교? 모처럼 나타나 긴 댓글까지 보시해주니 감사하기 짝이 없소이다.

    이완용이와는 체급이 좀 달랐지만, 출신 성분이 이완용보다 더 미천해(잘해야 기생출신 모를 둔 서출) 일개 무관이었던 자가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암살자로 갔으나 그의 화술과 인품에 감화되어 절친으로 돌아섰다는 스토리가 여기 일화에서도 반복되는 듯 하네요.

    하지만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수장이 되고 일본인과 1호 합작상인, 1호 창씨개명자로서 일본에 더 저돌적으로 충성하여 작위까지 받고 권력형 재산강탈을 일삼으며 조폭형 거부로 일어선 사실은 팩트이니, 남교수가 소개한 일화는 언변은 그럴 듯 하나 교묘한 자기합리화의 임기응변 같아보여 자객을 김옥균이처럼 감화시켜 돌려보냈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믿어지네요.

    다른 한편으론 결국 자상을 당했지만 어찌어찌 살아났다는 얘기를 읽은 적도 있심다. 아무튼 송병준이나 이완용은 정유재란시 인조에게 항복을 권한 최명길이와는 클래스가 다른, 오직 자기보신형 반역도들이라고만 여겨짐다.. 그럼에도 남교수가 이 자리에 한 댓글 피력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