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이해

개화기 조선 지식인의 인종주의적 사고관

백조히프 2021. 5. 18. 12:53

박노자 - 한국적_근대_만들기 인종주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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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은 1890~1905년 무렵 조선 개화기에 서구 문물을 접했던 지식엘리트들이 인종주의적 사고관을 갖게 되었던 과정을 살펴 본 박노자(러시아 출신 한국귀화 지식인)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글을 읽고 느낀 인상을 과제 리포트로 작성해 내었네요. 꽤 그럴 듯한 분석이라 여겨 소개해 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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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차 중간고사 대체 과제: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제출자: 김재민(법학과 2, 10201917)

과목: 역사의 이해

담당교수: 윤영인 교수

제출일: 2021. 4. 19

 

 

6주차에 읽은 박노자의 논문 내용을 토대로 아래 질문에 답을 작성하여 과제 창에 업로드 하세요.

 

논문 링크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323808 (박노자, 한국적 근대 만들기)

 

 

 

1. 서구 세계체제의 최악의 정신적 독약인 인종주의는 어떻게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에 정착하였는가?

 

2. 서구와 일본에 의해 타자화되었던 [즉 인종주의 차별을 받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오히려 인종주의를 추종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독립신문기사 등에 보이는 개화파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분량은 총 1500~2000자 내외로 (각 질문 당 최소 750) 워드나 한글로 작성하세요 [이 과제에 원고지 형식을 사용하지 마세요].

 

- 파일이름은 학과-학번-이름-중간고사로 하세요. [) 간호학과-1000001-홍길동-중간고사.hwp]

 

* 2021423일 금요일 오후 6시까지 과제제출 창에 업로드해야 합니다.

 

* 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중간고사 불응시로 간주되어 최종 성적이 F 학점으로 처리됩니다.

 

* 주요 감점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주제와 관계없거나 불필요한 내용

 

- 형식 [서론과 결론 등의 부재]

 

- 내용에 대한 이해 부족

 

- 동일한 내용 반복

 

- 표현 [맞춤법과 어휘]의 문제 등

 

* 질문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1. 서구 세계체제의 최악의 정신적 독약인 인종주의는 어떻게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에 정착하였는가?

 

서구 제국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인종주의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을 본 논문의 저자인 박노자는 조선이 쇄국정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으로 꼽고 있다.

 

그가 볼 때 그 이전의 조선에서는 인종차별은 물론 인종이라는 용어적 개념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중화문명을 접한 ()‘(양반과 중인 식자층)와 그렇지 못한 ()‘(문명화되지 않은 외인 오랑캐와 교육받지 못한 자국 하층민) 계층으로 크게 구분되어 있어 그 나누는 기준은 피부색과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교육 및 계급신분이었다.

 

특히 유교적인 예법을 아는가의 여부가 조선사회의 상층부와 하층부를 나누던 경계기준에서 피부색과 혈통에 의한 인종적 기준으로 바뀐데는 1842년 영국과 청이 벌인 아편전쟁에서 청이 일방적으로 패하자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조선의 지식층 사회에도 주목받게 되었다.

 

청을 통해 선진문물을 입수하던 북학파 같은 조선 실학을 숭상하던 진보적 개화세력이 이 담론을 통해 서구문명을 최고의 가치체계로 숭상하게 되자 서구의 주요 사상인 인종주의마저 그 독소같은 폐악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문명화를 위한 습득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본을 거쳐 유길준 등에 의해 조선에 소개되어 초기 인종주의의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후 이 현상은 그후 현대화된 한국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무의식적인 고착의 뿌리를 내려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신앙적 독트린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2. 서구와 일본에 의해 타자화되었던 [즉 인종주의 차별을 받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오히려 인종주의를 추종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독립신문기사 등에 보이는 개화파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구에 의해 열등 황인종으로 타자화된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문물을 미친 듯이 받아들이려는 탈아입구(脫亞入毆)의 기치를 내세우며 근대화를 이루자 바로 조선정복을 시도하였고, 이것이 성공하자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문화적으로 얕보던 일본을 서구적 강국으로 단기간에 개조시킨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한껏 품게 되었다.

 

일본과의 교류와 미국유학을 통해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 조선 신지식층이 접해본 구미문화의 근저에는 인종차별을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인 사회적 진화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구인들은 중세부터 근세중기까지 세계사의 한 혹을 긋던 중국, 인도, 이슬람 문명권들이 과학문명 경쟁에서 뒤처지자 미신과 야만이 횡행하는 동양문명 멸시론으로 변환시켜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진화론이란 틀로 한번 더 포장했다.

 

그 틀의 내면에는 비백인 혈통자체를 동양적 열등성의 근원으로 보는 인종과학적 오만감이 내재되어 인종차별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적자생존우승열패라는 사이비 과학적 근거까지 만들어내었다. 그리하여 이런 이론에 심취한 조선의 엘리트들은 우월한 힘이 있는 적자(適子)’인 미국이나 서구국이 힘이 없는 부적자인 동양인을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윤치호와 서재필이 운영했던 독립신문에서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담론들이 서구적 인종차별 사상을 적극 지지하고 개화의 상징으로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비판받을 문화사대주의적 굴종이 아니었다. 미국인들로부터 유학시절 동양인 차별을 많이 목격하고 당해본 두 사람은 오히려 청인(중국인)들보다는 조선 인종이 서구와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우등 인종임을 입증하고자 애쓸 정도였다.

 

이들은 어떻게든 서구적 인종주의의 틀을 문명화를 위한 필요불가결한 공간적 척도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인의 문명화 저력을 청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성을 보여주려 전력을 다했다. 덧붙여 피부가 검은 흑인들을 매우 천한 인종으로, 백인들을 고도화된 문명 인종으로 양 극단에 세운 채 황인종 중에서는 유전자가 서구인에 근접한 조선인은 백인층에 가까운 학문과 습속을 어떻게든 열심히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된 백인 콤플렉스검은 유색인에 대한 차별의 뿌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서구적 핵심부에 인종적 동경심을 보이면서, 주변부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희생자들에게는 인종적으로 백인 못지않게 경멸하던 개화기 지식인들의 굴종적 타자화의 왜곡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